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산문 읽기 8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말을 하자면'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말을 하자면' 입력2024.01.01 04:30110 소설 당선자 김영은 캘리그라피 백연수 우리 모두 형우다. 나는 피켓 문구를 바라보았다.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문구가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 아래에는 정의연대연합 마크가 찍혀있었다. 너는 목이 말랐던지 음료를 단숨에 마셨다. “자기소개서는 잘 쓰고 있어?” 나의 물음에 너는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다. 너는 경쟁률이 높기로 소문난 H신문사에 입사 준비 중이었다. 경기도 본서 생활하는 너는 가끔 나의 자취방에 놀러오기도 했지만 졸업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뜸해졌다. 나는 네 소식을 SNS로 자주 접했다. 매번 피드에 올라오는 네 글에선 너의 말투가 그대로 느껴졌다. 단호하고 직설적인 말투. 물론 일상적인 이야..

산문 읽기 2024.01.23

러브레터

러브레터 단편소설 당선작 권희진 조선일보 입력 2024.01.01. 03:00업데이트 2024.01.01. 08:41 결국 여기로 왔다.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으나 막상 여기 16층에 와서는 마땅히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가만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그걸 집 밖에서 해본 적은 없다. 집이 아닌 곳에서 정지해 있으면 사람에 치이고 차에 치이고 무언가에 자꾸 치이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 이동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 16층에는 흐름이 없다. 바람이 있고 소음이 있지만 딱히 흐름이랄 것은 없다. 낮 시간대에는 사람들이 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사적인 전화를 하다 가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한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가 목적을 다하면 다시..

산문 읽기 2024.01.04

낮에 접는 별 -

낮에 접는 별 - 양수빈[2023 신춘문예] 문화일보입력 2023-01-02 09:16업데이트 2023-01-02 10:28프린트댓글폰트공유 일러스트=여수진 ■ 단편소설 홍주가 가야 할 강의실은 3층 301호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 멈춰 서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엘리베이터는 내려오지 않았다. 버튼을 두세 번 더 누르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주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가팔랐고, 한 명이 겨우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홍주는 누군가 위에서 내려오는 상상을 했다. 그럼 누가 물러나야 할까. 아무래도 뒤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양보해야겠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던 홍주가 코트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홍주는 ..

산문 읽기 2023.01.16

무겁고 높은

[신춘문예 2022/단편소설 당선작] 무겁고 높은 동아일보 입력 2022-01-03 03:00업데이트 2022-01-03 03:57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땅에 붙인 두 발바닥. 그것이 시작이다. 바벨을 쥘 때는 엄지를 먼저 감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싼다. 무게가 실리면 엄지가 짓눌리지만 그래야 더 꽉 쥘 수 있다. 놓치는 것보다는 아픈 게 낫다. 다음은 무릎의 각도. 허벅지와 허리의 긴장. 그리고 등을 잡을 것. 다른 사람의 등이라면 붙잡을 수도 밀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등을 어떻게 잡을까. 말로는 못해도 몸으로는 해내야 했다. 송희는 고개를 들었다. 목과 등, 허리의 자연스러운 정렬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약간 위를 보는 게 좋다. 역도는 위로 솟는 운동이니까...

산문 읽기 2022.01.07

조선일보 [2022 신춘문예] 소설당선작

조선일보 [2022 신춘문예] 소설당선작 무료나눔 대화법 단편소설 당선작 임현석 조선일보 입력 2022.01.01 03:00 빨간색 원형 테이블보를 걷어내자 갈색 원목 상판이 드러났다. 손으로 가운데 옹이 무늬에서 굴곡진 주변부, 용접식 철재 프레임으로 제작된 차가운 다리를 쓸었다. 모든 이음새가 단단하게 붙어 있고 균형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마치 거실에 뿌리를 두고 내린 또 다른 형태의 나무처럼 느껴졌다. 상판 가장자리는 실제 나무처럼 자연스러운 곡률을 따라 모양이 잡혀 있었다. 아내가 11년 전 장인을 통해 주문제작한 물건이었다. 나는 최근 들어서야 아름다움을 감별하는 아내의 눈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찍은 사진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중고거래하는 스마트폰 애플리..

산문 읽기 2022.01.02

말 라문숙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흐린 하늘에 바람까지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얇은 코트 안으로 목을 집어넣으면서 혹시 근처에 들어갈 만한 카페가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벌써 만나기로 한 시간에서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만 늦어도 미리 연락을 하곤 했던 평소와 달리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공원에도, 공원 옆길에도 사람들이 드물어 한적했다. 오랜만에 홀로인 기분이 얼마나 가벼운지 바람에 휘날리는 보자기라도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헐렁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고 말거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공원 밖으로 나가는 대신 계속 서성이며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이 고작이었다. 봄바람에 머릿속..

산문 읽기 2021.07.09

얼음 창고 /이경숙: 국제신문 2021 신춘당선작

[2021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얼음 창고 /이경숙 국제신문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20-12-31 19:07:11 - 새로 단장한 사주문 옆의 얼음 창고는 더 낡아 보였다 - 문 씨는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창고 문이 사라졌어!” - 새롭게 칠한 붉은색 창고 벽은 두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 문 씨가 전기톱으로 사주문 나무 기둥을 자르고 있었다 나는 얼음을 자르고 있는 문 씨를 보았다. 두 동강이 난 얼음은 자로 잰 듯 길이가 비슷해 보인다. 문 씨는 소매로 땀을 훔쳐내고 한 토막을 다시 자르기 위해 얼음 위에 홈을 파고 전기톱을 가져다 댔지만 전원은 켜질 듯하다 이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잠잠해졌다. 플러그를 뺐다 다시 꽂아 보았지만 전기톱은 움직이지 ..

산문 읽기 2021.01.25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유랑의 밤 - 한인선-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유랑의 밤 - 한인선- 태어난 지 두 달 된 새끼 고양이는, 밤색 털에 유리구슬 같은 밤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의 밤색 눈과 고양이의 밤색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길게 묶은 내 머리카락의 끝을 모니터에 갖다 댔다. 같은 색. 고양이의 밤색 털, 나의 밤색 머리카락. 그때부터 밤이는 나의 식구였다. 같은 색의 털, 눈동자를 가진. 서울로 지역을 좁히면, 밤이는 나의 ‘유일한’ 식구였다. 나는 밤이와 내가 서로 더 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 이 썩은 밤아, 저리 꺼져!” B는 280밀리미터의 거대한 발로 옷더미 위에 올라가 있던 밤이를 밀어냈다. 밤이도 끼아옹 소리를 내며 털을 곤두세웠지만 곧 B의 발에 걷혀 옷더미 위에서 떨어졌다. ..

산문 읽기 202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