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03

구름시편

구름시편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저쪽 세상으로 걸어가는 기러기들이 기럭기럭 발자국들을 강물에 던져놓고 간다 강물은 몸으로 발자국을 받아 숨기며 얼어가는 울음을 파문으로 남긴다 가끔 갈 길을 잃어 망망해진 마음일 때 남쪽 바다에서 피어난 구름이 기여코 내게로 올 때 머물듯 흘러가면서 기럭기럭 무봉의 날개를 내게 입혀주려는듯 하다 여전히 이 세상이 낯설어 저곳을 걸어가는 나를 위하여 길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너가는 것이라고 또 뉘엿뉘엿하다

초원으로의 초대

초원으로의 초대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아무도 잡으려하지 않는 저 바람이 사실은 초원에서 탈출한 말들이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질주가 포획을 두려워하는 공포로부터의 몸부림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시구는 말의 말이면서 제 몸을 분쇄하여 초원을 탈출한 바람의 연역 저 붉은 신호등 앞에 선 말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니 넘어질듯 뒷발로 서서 앞다리를 손이라고 우기는 저 안간 힘이라니 시와 문화 2021 겨울

어둠의 벽

어둠의 벽 누가 가슴에 대못을 치고 있나 보다 물렁물렁한 것 같아도 어둠은 슬픔을 감추기엔 너무나 완강한 벽인데 뻔한 드라마 한편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명랑을 잊어버린다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못을 칠 때마다 컹컹컹 개 짖는 소리, 슬쩍 우물거리다 옷깃만 스치는 미지근한 체취, 밀렵꾼의 성급한 발자국이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어둠은 망명지가 아니라 슬픔의 유배지이다 시와 문화 2021 겨울호

개망초

개망초 가슴이 터엉 비면 어느새 찾아오는 개망초 꺾어도 베어도 무섭게 푸르른 솟대에 앉아 있는 저 얼굴 오상고절의 그 님은 어디로 가고 저 먼 이국땅에서 흘러온 이리 치이고 저리 내동댕이쳐지는 이름이 되었나 아니야 아니야 저 남도의 가인이 일러주기를 지워도 지워도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있어 아니 무진 세월이 지나도 잊지 말라고 피는 꽃이 개망초라고 일러주었네 어디에서인들 그립지 않으냐 텅 비어갈수록 가득 차오르는 웃고 우는 저 얼굴이여 충남 포에지 2021

어쩌다

어쩌다 꽃이 우리를 위해 피지 않는 것처럼 하늘이 노고지리를 위해 푸르지 않은 것처럼 바지랑대에 걸린 줄 위에 빨래는 속절없이 햇살도 맞고 바람도 맞고 허수아비의 춤을 춘다 참 오랫동안 깃발이 되기 위하여 단막극의 인생을 뼈 없이 살아왔구나 에라이! 누가 바지랑대를 걷어찼나 와르르 하늘이 무너지고 해진 옷 속의 무늬들이 벚꽃잎 이라고 깔깔대며 떨어지는구나 충남 포에지 2021

음력 8월 1일

음력 8월 1일 무수히 손길이 얹혀지고 지워진 손잡이에 아직 체온이 남아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문의 흔적을 차가운 쇠붙이에 남기고 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제 몸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나비를 기억하지 않는 꽃처럼 나는 숙성을 모른다 익어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몸을 발효하는 술처럼 오래 기다릴 수도 없다 침묵을 지우개로 지우면 곧 삭아버릴 것 같은 시간의 뼈가 일 년 전 신문 기사로 환생하는 밤 숙성과 성숙이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 하던 한 생을 꾸짖는 듯하다 다시올 2021년 가을호

이름을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몇잎 붉게 피어난다 이제는 옛집으로 남은 사람아 끝내 종착역은 더 멀리 떠나 내 몸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어둠을 걸어 닿으리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끝끝내 피어있는 동백아 가여운 내 몸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깃든 장항선 철길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2021 년 서천문협 시

초원으로의 초대

초원으로의 초대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아무도 잡으려 하지 않는 저 바람이 사실은 초원에서 탈출한 말들이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질주가 포획을 두려워하는 공포로부터의 몸부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시구는 말의 말이면서 제 몸을 분쇄하여 초언을 탈출한 바람의 연역 저 붉은 신호등 앞에선 말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니 넘어질 듯 뒷발로 서서 앞다리를 손이라고 우기는 저 안간 힘이라니 시와 문화 2021 겨울호

풍경과 배경

풍경과 배경 누군가의 뒤에 서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듯 감싸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말표 고무신 260

강원도 홍천 어느 농부의 신발 말표 고무신 260 일주일에 한 번 산길 거슬러 오는 만물트럭 아저씨가 너를 데려다주었어 말표 흰 고무신 260 산 첩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이곳에서 몇날며칠을 달려도 닿지 못하는 지평선을 향해 내 꿈은 말이 되어보는 것 이었어 나도 말이 없지만 너도 말이 없지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없이 그저 흙에 머리를 조아릴 때 내 못난 발을 감싸주는 물컹하게 질긴 너는 나의 신이야 * 월간 중앙 2021년 9월호

강아지풀에 묻다

강아지풀에 묻다 무심히 풀도 꽃도 아닌 채로 아니, 풀이면서 꽃도 피우면서 한해살이면 너끈하다고 더 바랄 것 없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여기까지 왔다 무심히 없으면서 있는 척은 너무 쉬워 무심히 있으면서도 없는 척 하기는 너무 어려워 가까이 다가온 너에게는 어쩔 수없어 나는 그만 꼬리를 흔들어대지 나이는 묻지 않기로!

석등에 기대어

석등에 기대어 초여름보다는 애써 늦봄이라 하자 소나기는 말고 눈물이 아니라고 우겨도 좋을 눈썹 가까이 적시는 가랑비라 하자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아침보다는 기다리는 이 없어도 돌아가는 마음이 앞서는 저녁 어스름이라 하자 마음이 하냥 깊어져야 만나는 개선사지 꽃대궁만 키를 세우고 피어나지 않는 꽃 그 앞에 서면 꽃은 피는 것이 아니라 창을 여는 것이라고 우겨도 좋겠다 시방 十方을 한 눈에 담고 제 그림자를 옷깃으로 날리는 꿈을 잊지 않았느냐고 화창 花窓에 어리는 혼잣말 어디에도 세월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 더 살고 싶은 외로움을 손 잡아주는 그 어디쯤 나도 네가 되어 있는 것이다 * 개선사지 : 전남 담양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절터 * 2020 대한문학에 발표 개선사지 석등

추암에서

추암에서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어떤 거만함도, 위세도 멀리서 달려와 발 밑에 부서지는 포말에 불과한 것임을 모르는 채 깨닫게 된다.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보지 않으려해도 볼 수 밖에 없는 수평선을 보며 위태로운 줄타기의 광대가 되는 자신을 떠올리거나 수평선의 끝을 잡고 줄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무의식적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고무줄처럼 수평선을 끌어당기고 싶다면 아직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좀 더 살아야하는 것이다. 2015.07.18 동해시 추암 해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