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하나 돌멩이 하나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를 누구는 발로 차고 손에 쥐고 죄없는 허공에 화풀이를 하네 볼 품이 없어 이리저리 굴러다니지만 엄연히 불의 자손 하늘을 가르며 용트림 하던 그 청춘의 불덩이를 잊지 않기 위해 안으로 얼굴을 감춘 갑각류의 더듬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오늘도 날개를 꿈틀거리는 돌멩이 하나 시와시학 2020년 겨울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4.16
구름 19 구름 19 막 꽃잎을 떨구는 살구나무와 수작을 거는 찰나에 한 사내를 만났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그에게 건성으로 반갑다고 했다. 정규직 백수라고 하면서 아직 희망은 있다고 그가 말했다. 죽고 싶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고 손을 흔들며 그가 지나갔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4.03
양구 楊口 양구 楊口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슬픔으로 자라나는 나무를 만날거라고 누가 나에게 강을 일러주었나 옛길은 승천하듯 물길과 함께 분명 홀연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잊힘으로 버려진 아버지처럼 죽음 저 너머 너울거리는 신기루임을 채 알아채기도 전에 북녘으로 향하는 아득한 외길을 걸었다 아무도 나를 검문하지 않는 숲을 지나서 한낮에도 인적이 드문 마을을 지나서 슬픔으로 자라는 나무는 어디에도 없음을 믿어야 하는 나이쯤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강을 만났다 슬픔의 통증을 놓아주기에 부끄럽지 않은 곳 양구라고 하였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4.02
사막의 꿈 사막의 꿈 나 호 열 어느 사람은 낙타를 타고 지나갔고 순례자는 기도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때마다 화염을 숨기고 뜨거워졌다가 밤이면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빛으로 얼음 속에 가슴을 숨겼다 나에게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침묵과 고요 속에서 태어난 바람으로 지우며 육신의 덧없음을 일깨우곤 했다 오늘도 낙타의 행렬과 순례자들이 끝없이 지나갔지만 나는 꿈을 꾼다 그 사람이 오고 백년 만에 비가 내리고 백년 만에 내 몸에서 피어나는 꽃을 어쩌지 못한다 안녕이라는 꽃말을 가진 사람 * 두레문학 게제 (2020년 여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3.31
일월 日月의 노래 일월 日月의 노래 나호열 바다로 가려고 하니 높은 산마루가 있어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일월이라 하네 이 산마루 오르면 해도 달도 저 동해바다 깊은 심장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인 것을 알게 된다네 뭇 생명들 태어나고 스러지는 이 길이 쉬임없이 해와 달이 남긴 발자국이라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3.24
나는 날마다 대구를 지난다 나는 날마다 대구를 지난다 나는 날마다 대구를 지난다 한 걸음도 내딛지 않은 채 모른 척 지나간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과수원에서 사과를 몰래 따서 한 입에 베어물기도 하고 신천 어디쯤 얼굴을 물에 비춰보다가 앞산에 올라 망연히 그대 사는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나는 날마다 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3.09
만종 (晩鐘) 만종 (晩鐘)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고 짐승들의 고막을 찢던 포탄이 종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에 모습을 드러내는 달과 밤이면 새싹처럼 돋아나던 별들 그들이 일러주는 시간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숨처럼 논둑길을 달리고 성황당 고개 너머 얕은 토담을 끼고 돌아 나그네일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3.04
구름 구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피어나기는 하나 지지 않는 꽃이다 하늘에 피는 꽃은 구름 그저 푸른 하늘만 있으면 사계절 가리지 않고 핀다 향기도 없고 벌 나비도 찾아오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그네 긴 발걸음 끌고 가는 구름이다 『인간과 문학』 2020년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2.24
손금 손금 길 없음의 표지판을 믿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야 비로소 태어나는 말이 있다 눈 먼 더듬이가 짚어내는 모르는 단어는 가슴 어딘가에서 피어나는 꽃의 눈빛을 닮았으나 그저 입 안에서 맴도는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의 영혼이다 길의 끝에서 우리는 강을 만나고 절벽을 만나고 사막을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0.02.13
구월의 노래 구월의 노래 귀뚜라미가 운다고 말했다 노래한다고 말했다 우는 것도 아니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짝을 찾는 수컷의 절명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그림자로 펄럭이는 초청받지 못한 손님으로 이 세상 앞에 마주섰을 때 함부로 뱉은 그 말이 울음이 되고 노래가 되고 절명이 되는 것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9.09.17
화풀이 화풀이 어느 사람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마음이 풀어질 것 같으면 욕이라도 하라고 했더니 그러마하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구름 바람 매미 귀뚜라미 미꾸라지 송사리 생전 처음 이런 욕을 들어봅니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9.08.27
비애에 대하여 비애에 대하여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뻐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급..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9.08.21
댓글러 댓글러 아고라는 목소리가 너무 커 비둘기는 유해조류가 된지 오래 뒷짐 지고 있기엔 주먹이 근질근질해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동경하지 이 쯤에서 백장인가 천장인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말라고 아고라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슬며시 지나가지 누구든 핏대를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9.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