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03

네가 있던 자리

네가 있던 자리 아직은이란 말 속에는 언젠가라는 일방의 약속이 숨어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아직 살아 있다고 꽃지듯 걸어온 소식에 언제나 주어가 되지 못한 뒷길의 서성거림이 흔들리는 것인데 아직은과 언젠가 사이에 놓인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고 있다 아직은 살아 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품고 있는 눈물 한방울 뜨겁다

부록 - 사바나

부록 - 사바나 얼록말은 누구의 밥이 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있는것인지 질긴 풀을 질겅질겅 씹어넘겨야 누구에게도 잡혀먹히지 않는다는 것인지 , 입은 맛에 길들여지고 귀와 코는 불안의 너머에 가닿아있네 풀밭이 식탁이고 무덤인 사바나의 느릿느릿한 오후 굶주린 검독수리가 하늘에 장막을 치는 이 한 장의 평화 경희문학 2022

소나기

소나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은 강호를 찾아 헤매는 눈 먼 자들 길은 외길인데 어느 길로 가야 맞느냐고 묻는다 남루를 견딘 변방의 세월에 적선이라고 하려는 듯 빈 밥통에 떨어지는 눈물의 무게 새옹塞翁은 오늘도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길목에 나와 앉아 혼자 중얼거린다 어디로 가도 사막이야 고도는 오지 않아 진화를 기다리는 투명인간들이 후두둑 털고 가는 느닷없는 소나기 사이펀 2022년 여름호

공 날아가거나 머리를 부딪쳐도 튀어오르는 오기로 더 둥글어지기로 했다고 온몸에 바람을 잔뜩 숨겨놓고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거역할 수 없는 수동의 힘으로 나는 새를 꿈꾸고 하늘을 그리워했다고 발도 없는데 발이 아프고 없는 길이 멀어 풀섶에 없는 다리를 쉬는데 또 누가 걷어차 잠시 옛날을 꿈꾼다 발길에 채여도 좋다 나는 부화되지 않은 알 미지의 새라고 또 차가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이펀 2022년 여름호

어느덧

어느덧 슬며시 다가와 손을 잡아주네 어디에든 따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인이 되든 종이 되든 넉넉하게 머리도 좋고 꼬리라도 좋아 그저 몸통에 스며들어 날 선 미움도 부드러운 꽃바람 가여운 회초리로 만들어버리네 세월이 남긴 그리움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울음의 뒷모습 같은 것 나는 어느덧을 사랑하네 어느덧이면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있네 한 나무에서 돋아나 하나 둘 떨어지는 꽃잎들이 이룩하는 뼈없는 문장들처럼 고요히 다가와 하염없이 나를 감싸안는 어둠처럼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하는 숨처럼 그 한 마디가 멀리서 나를 살리네 계간 《동안》 2022년 가을호

섬 너머 섬

섬 너머 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섬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산다 수평선을 담장으로 두르고 아무렇지 않게 파도를 걸치면 아무 때나 날아오르는 푸른 새 그리움의 편지는 구름으로 쓰고 우표 대신 바람으로 부치면 아득하니 숨어버리는 섬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섬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산다 섬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섬을 품고 있다 저 출렁거리는 꿈 시현실 2022년 여름호

어둠이라는 벽

어둠이라는 벽 누가 가슴에 대못을 치고 있나 보다 물렁물렁한 것 같아도 어둠은 슬픔을 감추기엔 너무나 완강한 벽인데 뻔한 드라마 한편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명랑을 잊어버린다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못을 칠 때마다 컹컹컹 개 짖는 소리, 슬쩍 우물거리다 옷깃만 스치는 미지근한 체취,밀렵꾼의 성급한 발자국이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어둠은 망명지가 아니라 슬픔의 유배지이다 시현실 2022년 여름호

풍로라는 풀 또는 꽃

풍로라는 풀 또는 꽃 허락 없이 돋는 풀이 있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하냥마냥 꽃도 핀다 내맘대로 바람이 가는 길이라 부르고 가난한 냄비 밥 올려놓던 풍로라 내치기도 하고 바람이 키우는 서리라고 슬그머니 발밑에 내려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 옹졸한 가슴에 쳐들어와서 햇살 한줌이면 그만이라고 피고 지고 또 피는 이 사랑을 내치고 싶지 않음이 내 마음이 아니더냐 어디 피라고 해서 피고 지라고 해서 지는 사랑이 어디 있더냐 시와 시학 2022년 여름호

늦봄

늦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슬픔이 내게는 늦봄이다 오래 전 지금의 내 나이 때 목로에 앉아 어머니 말씀하셨다 한 숨 돌려도 지치고 서서도 잠이 드는 곤궁의 한 때 난 지금 늦봄이야 그 속뜻을 헤아리는데 길이 멀었다 아직 피지 못한 꽃인데 저 시퍼렇게 달려드는 뙤약볕 해맑게 맞이하고 싶은데 봄이 오면 돌아온다던 사람 아버지는 먼 세상 사람인데 여름이 와도 늦봄이라고 우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 모진 슬픔에서 배어나오는 말 나도 지금 늦봄이다 문예감성 2022년 여름호

임서기 林棲期

임서기 林棲期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해 길이 끝나는 외딴 곳까지 왔다 먼저 이 곳에 와 있던 키 큰 살구나무를 대문삼아 울타리가 없는 집이라 하였다 대처를 떠돌았으나 여전히 이 자리에서 문설주는 주저앉고 헛된 지식의 밤하늘은 스러지는 별똥별을 내려주었다 어느덧 낡은 집에 오가던 인적은 사라지고 경계가 사라진 벽과 문턱 너머로 꽃이 아니라고 내쳐진 봉두난발의 사내처럼 개망초가 부끄러웠다 살구나무가 흐드러지게 우두커니 눈물을 떨구던 봄날 숲으로 가야겠다 문예감성 2022년 여름호

꽃 이름 외우기

꽃 이름 외우기 아주 먼 먼 어느 날에 꽃을 보고 이름을 지어주고 꽃말을 가슴에 묻어둔 사람이 있어 그 꽃말 하나하나가 모두 내가 배우고 따라야 할 말씀이어서 보고 또 보고 얼굴을 기억해도 고들빼기를 씀바귀라 하고 수국인지 불두화인지 헷갈려 할 때 문득 떠오르는 우리라는 말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어딘가 닮은 그 언제인가 몸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갈래 길에서 머뭇거리던 아주 먼 어느 날이 가여워진다 나는 왜 개망초이고 당신은 왜 망초인가 이제는 꽃 이름을 외우지 않을테다 모든 이름 뒤에 나는 그저 꽃이라는 훈장을 달아줄테다 이 모든 꽃의 꽃말은 외우지 않아도 된다 모두 사랑합니다 *현대시학 2022년 1,2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