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11

구름꽃

구름꽃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저쪽 세상으로 걸어가는 기러기들이 기럭기럭 발자국들을 강물에 던져놓고 간다 강물은 몸으로 발자국을 받아 숨기며 얼어가는 울음을 파문으로 남긴다 가끔 갈 길을 잃어 망망해진 마음일 때 남쪽 바다에서 피어난 구름이 기여코 내게로 올 때 머물듯 흘러가면서 기럭기럭 무봉의 날개를 내게 입혀주려는듯 하다 여전히 이 세상이 낯설어 저곳을 걸어가는 나를 위하여 길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너가는 것이라고 또 뉘엿뉘엿하다 문학의식 2022년 겨울호

자화상

자화상 구순 어머니, 그림 그리기 시간에 자화상을 그렸나 보다.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어 지난 세월은 다 잊었어도 옛 얼굴은 잊지 않았는지 주름살 없는 봄날 왜 나는 내 얼굴을 그릴 수가 없나 시간에 쫓기는 얼굴, 낭패감에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할 수 없나 붓을 드니 늪이 그려지고 늪을 지우면 사막이 나온다. 사막을 걷어내니 낙타 한 마리, 마두금이 시린 바람을 끊어내고 있다. 검게 변한 백지에 별 하나 그려 넣어라 하늘에 계신 어머니 말씀이다 계간 시선 2022년 겨울호

하루

하루 밧줄에 매달린 채 고층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 사내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바닥 밑에 또 바닥이 있어 캼캄한 흙속에서 기어 올라온 지렁이가 지룡의 헛된 꿈을 꾸며 햇볕에 말라가고 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안간 힘과 솟구쳐 오르려는 욕망이 한 순간의 불꽃놀이로 스러지는 한 생 불붙은 심지를 꽁무니에 매달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너는 누구냐 시와 사람 2022 겨울호

눈물을 먹다

눈물을 먹다 연두도 아니고 보라도 아닌 이 세상 가장 예쁜 사람에게 목걸이로 만들어 주고 싶은 작은 알맹이들 저 예쁜 것들을 땅에 묻으면 무우가 된다 어차피 흙속에 들어가 무우가 될텐데 누가 물과 하늘빛을 버무린 저 빛깔을 내려줬을까 누군가 내게 생을 물어봤을 때 정답을 모르는 나는 문득 이 생각이 떠올랐을 뿐 무우는 먹는게 아니라 근심이 없어지는 눈물이라고 시와 사람 2022년 겨울호

한 발짝

한 발짝 쓸쓸을 숫돌 삼아 붓을 간다 스윽슥 헛된 그림자가 날이 서고 한 발짝 건너면 다른 세상 너에게로 간다 여립이 가고 봉준이가 걸어갔던 길은 보이지 않고 신기루 같은 중얼거림이 깃발로 나부끼는 저 먼 곳 먹물로 살았는데 벼루는 말라 단지를 하려니 목숨이 위태롭다 벼 옆에 들러붙은 피를 누가 나무랄 수 있나 한 발짝 딛기도 전에 기우뚱거리는 대동의 깃발 영영 붓은 무딘 칼도 되지 못하려는지 혀를 동여맨 말들이 봉두난발 엉켜 춤춘다 글쎄, 한발짝 내딛기 평생이 모자란다 2022년 12월 공시사

빛의 속도

빛의 속도 그렇게 닿았다고 한다 느릿느릿 걸어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가에 와있다고 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저 부드럽고 깊이를 알수 없는 문장을 읽으려 할 때 처럼 나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인데 강물 따라 같이 흘러가거나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그리워하는 일이 빛의 속도인 것이다 계간 《동안》 2022년 가을호

네가 있던 자리

네가 있던 자리 아직은이란 말 속에는 언젠가라는 일방의 약속이 숨어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아직 살아 있다고 꽃지듯 걸어온 소식에 언제나 주어가 되지 못한 뒷길의 서성거림이 흔들리는 것인데 아직은과 언젠가 사이에 놓인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고 있다 아직은 살아 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품고 있는 눈물 한방울 뜨겁다

부록 - 사바나

부록 - 사바나 얼록말은 누구의 밥이 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있는것인지 질긴 풀을 질겅질겅 씹어넘겨야 누구에게도 잡혀먹히지 않는다는 것인지 , 입은 맛에 길들여지고 귀와 코는 불안의 너머에 가닿아있네 풀밭이 식탁이고 무덤인 사바나의 느릿느릿한 오후 굶주린 검독수리가 하늘에 장막을 치는 이 한 장의 평화 경희문학 2022

소나기

소나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은 강호를 찾아 헤매는 눈 먼 자들 길은 외길인데 어느 길로 가야 맞느냐고 묻는다 남루를 견딘 변방의 세월에 적선이라고 하려는 듯 빈 밥통에 떨어지는 눈물의 무게 새옹塞翁은 오늘도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길목에 나와 앉아 혼자 중얼거린다 어디로 가도 사막이야 고도는 오지 않아 진화를 기다리는 투명인간들이 후두둑 털고 가는 느닷없는 소나기 사이펀 2022년 여름호

공 날아가거나 머리를 부딪쳐도 튀어오르는 오기로 더 둥글어지기로 했다고 온몸에 바람을 잔뜩 숨겨놓고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거역할 수 없는 수동의 힘으로 나는 새를 꿈꾸고 하늘을 그리워했다고 발도 없는데 발이 아프고 없는 길이 멀어 풀섶에 없는 다리를 쉬는데 또 누가 걷어차 잠시 옛날을 꿈꾼다 발길에 채여도 좋다 나는 부화되지 않은 알 미지의 새라고 또 차가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이펀 2022년 여름호

어느덧

어느덧 슬며시 다가와 손을 잡아주네 어디에든 따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인이 되든 종이 되든 넉넉하게 머리도 좋고 꼬리라도 좋아 그저 몸통에 스며들어 날 선 미움도 부드러운 꽃바람 가여운 회초리로 만들어버리네 세월이 남긴 그리움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울음의 뒷모습 같은 것 나는 어느덧을 사랑하네 어느덧이면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있네 한 나무에서 돋아나 하나 둘 떨어지는 꽃잎들이 이룩하는 뼈없는 문장들처럼 고요히 다가와 하염없이 나를 감싸안는 어둠처럼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하는 숨처럼 그 한 마디가 멀리서 나를 살리네 계간 《동안》 2022년 가을호

섬 너머 섬

섬 너머 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섬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산다 수평선을 담장으로 두르고 아무렇지 않게 파도를 걸치면 아무 때나 날아오르는 푸른 새 그리움의 편지는 구름으로 쓰고 우표 대신 바람으로 부치면 아득하니 숨어버리는 섬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섬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산다 섬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섬을 품고 있다 저 출렁거리는 꿈 시현실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