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07

이십 리 길

이십 리 길 이십 리 길을 갑니다 그 길은 어디에도 닿을 수 있으나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개를 넘다 스르르 사라지고 문득 강가에서 발길이 멈추기도 합니다 바람을 기다려 자식을 떠나보내는 풀꽂의 마음 슬하에 있어도 이십 리 멀리 떠나도 이십 리 이십 리 길은 내 그리움이 서러운 그 곳 까지 입니다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하고요 어린아이용 키 작은 의자가 있었으면 하고요 저녁 어스름에 닿아 가여운 내 그림자가 잠시라도 앉아 있으면 그만 입니다 이십 리 길은 내 마음의 길 당신도 그 길로 사뿐히 오시기 바랍니다

유적지

유적지 꾹꾹 눌러써도 흐려진 연필 글씨처럼 쌓으려해도 스스로 몸을 허물고 간 바람이 남긴 공터를 읽는다 햇살이 무심히 부리로 쪼아대는 적막의 깊이 속에 다시 푸르게 돋아오를 것 같은 발자국들 길이 없어도 눈이 환해지는 문장의 씨앗들 기다리지 않아도 자락자락 어둠이 내리고 그 어둠을 들여 더 큰 폐허를 일으켜 세우는 순한 짐승에게 기도를 바친다 모든 어머니!

미안하다 애인아

미안하다 애인아 세월은 거짓말도 용서한다 모질게 도망치듯 너를 보냈는데 때는 눈보라치는 겨울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에서 내게 결별의 찬 손을 내민 것은 너였다고 말한다 다시 어디서든 너를 만날까 두려웠는데 내 눈안에 너의 얼굴이 담겨 있어 눈물로 씻어내려 했다고 말한다 세월은 자꾸 흘러 거짓말은 거짓말의 진실이 되고 나는 로미오 너는 줄리엣이라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온몸을 웅크린 채 땅바닥에 내쳐진 돌멩이는 딱딱한 눈물이었다 세월은 주어를 이렇게 바꿔주는 것이다

동네 친구

동네 친구 동네 친구는 삼십년이 넘었어도 아는 게 없다 고향도 나이도 물어본 적이 없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알 필요도 없이 만나도 눈빛만 교환할 뿐이다 먼저 3동 친구는 그냥 산수유라고 부른다 부지런하게 봄이 오면 맨 먼저 노란 손수건을 흔들고 긴 겨울에도 붉은 열매를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꾼이다 6동 친구는 앵두나무라고 하자 키도 작고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는 폼이 의심스러운데 동그랗고 붉은 눈망울을 탐내는 새도 없다 경로당으로 가면 몇 년째 오지 않는 친구는 까치이다 반가운 손님은 보이지 않고 빈 목소리만 가득하다 하루 종일 고개 숙였지만 늦은 밤 당당히 하늘을 보면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눈물 한 방울을 발밑에 떨구어준다 집에서 청승떨지 말라고 동네를 한 바퀴 들며 만나는 친구들의 ..

허물

허물 옷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동물에서 사람이 되었던 날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 그 날 감추어야 할 곳을 알게 된 그 날 옷은 그로부터 넌지시 위계를 가리키는 헛된 위장의 무늬로 입고 벗는 털갈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진화하였다 우화의 아픈 껍질을 깨고 비로소 하늘을 갖는 나비를 꿈꾸며 나는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옷을 벗고 또 벗었으나 그 옷은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주었던 그 누구의 눈물과 한숨일 뿐 내 마음이 허물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가만히 내리는 빗소리 나를 대신하여 허물을 벗는 이의 아픈 발자국 소리로 사무쳐 오는 밤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옷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싶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가장과 위선의 허물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문신으로 나를 향해 먼 길을 오는 이의 기쁨으로 이름 짓고 싶..

연리목을 바라보다

연리목을 바라보다 강둑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바닷가 파도소리에 키를 세우는 나무들 깊은 산중 적막을 수행하는 나무들 산마루 허리 꺾고 넘어질듯 넘어지지 않은 나무들 그 나무들 오늘은 고고한 탑으로 내 앞에 서 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얼굴 보이지 않는 오래된 시계를 몸 어딘가에 감추어 놓은 울울함을 바라보며 아득한 먼 옛날 씨앗으로 움트던 날을 기억한다 생전에 그늘을 바라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달디 단 열매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흙속에 마음을 묻은 사람처럼 나도 한 그루의 작은 나무를 심는다 흰 구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날개를 가진 나무는 어느 생에 저 창공을 박차고 올라 마악 사랑을 배우는 사람들의 눈빛을 닮은 별이 될 것이므로 나는 한 그루 나무속에 내 이름을 숨기려 하니 나이테..

면벽 面壁

면벽 面壁 아무도 묻지 않고 나도 묻지 않았다 한 때는 뾰족한 아픔이 새 순으로 돋아오를 때라고 믿기도 하였으나 먼 길을 걸어온 늙은 말등에 얹힌 짐이 한 줌도 안되는 세월의 무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눈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세찬 빗줄기 꽂히는 아스팔트를 쪼아대는 비둘기의 투쟁과 몇 알 좁쌀을 입에 물고 무소유의 집으로 돌아가는 콩새가 전해주는 무언의 감사와 꽃도 아니라고 코웃음치던 들판에 십자가처럼 피어나는 개망초의 용서가 아직 뜨거운 심장에 한 장의 편지로 내려앉을 때 눈물은 오늘을 사는 나의 양식 오롯이 가식의 옷을 벗는 영원으로 가는 첫걸음 지상에서 배운 첫 낱말 혼자 울 때 아무도 호명하지 않은 꽃으로 핀다 다시올 2020 가을호

玉 다방

玉 다방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나를 사모하는 언니가 있었지 계란반숙을 몰래 주기도 하고 가끔은 거추장스럽다고 치마를 슬쩍 무릎위로 올리기도 했지 이제는 천국으로 떠났을 주인 이모는 장부에 적지도 않고 커피를 외상으로 주었지 강의실 대신 이 빠진 엘피판 저 푸른 초원 위에 뮤직박스에 앉아 시름 많은 청춘을 시라고 쓸 때 외상값은 발자국을 찍은 판넬로 받는다고 했지 학교는 학교 밖의 인생이라고 세상 밖 군대로 떠나는 나를 똥똥한 웃음으로 배웅해 주었지 그 언덕 너머 그 다방은 이제는 없네 레지라 불리던 언니는 어디서 나와 늙어가고 있는지 아직도 오십 잔 커피 외상값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이모는 어딜 갔는지 온데 간 데 없는 세상 밖에서 나는 오늘도 서성거리네 신문예 겨울호 2020

사랑의 온도

사랑의 온도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뎁힐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