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07

돌멩이 하나

돌멩이 하나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를 누구는 발로 차고 손에 쥐고 죄 없는 허공에 화풀이를 하네 볼 품이 없어 이리저리 굴러다니지만 엄연히 불의 자손 하늘을 가르며 용트림 하던 그 청춘의 불덩이를 잊지 않기 위해 안으로 얼굴을 감춘 갑각류의 더듬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오늘도 날개를 꿈틀거리는 돌멩이 하나 시와시학 2020 겨울호

구걸 求乞의 풍경

구걸 求乞의 풍경 거지라고 다 같지는 않다 어느 놈은 사기치고 도둑질을 하지만 그래도 양심 있는 거지는 동냥을 한다 양심 있는 거지라도 낯이 두껍지 못하면 지하철 계단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 바쁜 발자국 소리를 하염없이 염불 소리로 듣는다 같은 지하철 계단이라도 조금 낯이 두꺼워지면 깡통을 놓고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듯 자세를 잡는다 돈이 쌓이면 사람들은 배부른 거지라 지레짐작하고 지나치기에 동전은 놔두고 지폐는 재빨리 거두어야 한다 이제 공력이 쌓이면 직립하여 서울역 같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진출한다 어느 거지는 오백 원만 달라고 한다 줄 마음이 있으면 애써 오백원 동전을 찾기 보다 천원 지폐를 꺼낼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런 잔 머리보다 아예 천원만 달라고 손 내미는 정직한 거지도 있다 구걸하는 거..

진화론을 읽는 밤

진화론을 읽는 밤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 말 그렇게 믿어왔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의 조롱으로 메아리 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삵에게 쫒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 만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새가 되리라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두레문학 2020년 여름호

당신이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양산 천성산 노전암 능인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 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꼽 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이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계간문예 2020년 가을호

후생 後生

후생 後生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얼굴도 없이 뼈도 없이 맹물에도 풀리면서 더러운 것이나 훔치는 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늘만 바라보면서 고고했던 의지를 꺾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무엇이든 맞서 싸우되 한 뼘 땅에 만족했던 우직함이 나를 쓰러뜨렸다 나무는 벌거벗어도 실체가 없음의 다른 말이다 벌거벗어도 보일 것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다 당신이 나를 가슴에 품지 않고 쓰레기통에 처넣는다 해도 잠시라도 나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는 휴지가 되기로 한다 나는 당당한 나무의 후생이다 계간 문학과 사람 2020년 가을호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 나호열 촉도(蜀道)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시집 『촉도』 (2015)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

안부 安否

안부 安否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일 없냐고 아픈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픈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라기 별과 같은 것이다 평생동안 깨닫지 못한 말뜻을 이제야 귀가 열리는 밤 ..

오월에 전화를 걸다

오월에 전화를 걸다 나호열 누구든 내게 오라고 오래 서 있는 공중전화를 보면 땅에 누워 눈물 흘리는 작약처럼 멀리, 저 머얼리 향기를 보내고 싶다 얼굴은 바람에 흩어지고 목소리는 새가 남기는 그림자처럼 어디든 날개의 꿈을 펄럭이듯 그저 멀리, 저 멀리 달그락 꽃잎 한 장에도 붉어지는 젊은 날 심장의 들날숨 소리 못다 쓴 편지의 여백으로 오월은 혼자 부끄러워지는가 손길 닿는 곳마다 문득 푸르러지는 오월에 부재중의 나에게 걸려오는 저 발자국 소리 깊어지는 수심을 살피며 안부를 묻는 당신은 누구신가 * 2018,0528 평화방송 발표시 * 시집 엔 수록하지 않았음

자선 대표시 5펀

: 나호열 촉도(蜀道)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시집 『촉도』 (2015)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

일용직 나 씨의 아침

일용직 나 씨의 아침 아무리 늦게 세시에 자도 네 시면 눈이 뜨인다 내 몸무게만큼의 어둠이 눈꺼풀을 눌러도 어김없는 계시로 번득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와 눈의 낭만은 잊은 지 오래 침묵이 가득한 아고라 인력시장을 향하여 순례를 떠난다 호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개 이름은 구호품 구호받지 못하고 아침해를 등지고 돌아올 때 나씨에게는 허기를 때울 잠이 필요할 뿐 다이어트를 위해 아침밥은 거르고 점심도 건너뛰고 저녁은 생략한다 보라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오늘도이글거리는데 나는 외친다 나는 일용직이 아니다 나는 프리렌서다

일용직 나 씨의 저녁

일용직 나 씨의 저녁 곧바로 천국에 닿을 것만 같은 쭉 뻗은 대로의 의붓자식 같은 외로움을 한 번 꺾어들면 음지그늘이 독버섯처럼 웅크린 뒷골목 해고가 없는 일용직에서 해고당한 나씨의 컵라면 앞에 말라비틀어진 김치쪼가리 마침 저녁이면 저 세상을 보여주는 맛집 기행 덕에 만찬은 풍요롭다 컵라면은 한 입에 사라지지만 잡을 수 없는 화면 속에 시선을 넣으면 온갖 산해진미가 내 것인 양 한 상 가득하다 나 씨가 일 년 동안 먹어도 남을 허기에 대한 헛 가락질이 인생을 지휘하는 마스터 같다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을까 곰 사냥을 나갔다 곰에게 쫓겨 돌아온 배고픈 안도감으로 일용직 나 씨의 밥상은 보이지 않는 풍요로 가득 찬다 몽유의 이 짜릿한 육즙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