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42-어떤 하루 나한 42 -어떤 하루 적막을 지우려고 빗자루를 든다 추락한 햇볕의 발자국 허공을 휘저으며 날아가던 새가 무거워 던져놓고 간 그림자 맴만 돌다가 입을 봉한 말들이 한 목소리로 내게 덤벼든다 갈대로 만든 빗자루가 휘청휘청 정처 없는 생각을 쓸어낼 때마다 주문 呪文이 되는 쓸쓸은 사실은 빗자루가 내뱉는 목맨 쉰 소리일 뿐인데 불교문예 2023 여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6.15
나한 39-곰 잡으러 가자 나한 39 -곰 잡으러 가자 문을 열고 나가니 아직 퇴각하지 못한 구석기 이전의 어둠이 내 앞에 서 있다 막막한 아침의 배꼽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몽환 속에 들어설 때 나는 맛이 없는 외로운 짐승일 뿐 따먹어야 할 열매는 이미 흙으로 돌아가고 투박한 돌도끼 대신 휘청거리는 볼펜 한 자루 쥐고 두리번거리는 화면의 미망에 망연하다 빙하기가 다시 오려는지 저 멀리서 쿵쿵거리며 울리는 발자국 소리 나는 거역할 수 없는 거인을 공손히 기다린다 희망은 공포를 가득 안은 막차 자꾸 수만 년 전 동굴 속으로 몸을 구겨넣는다 이럴 때 미련한 곰은 위대한 신화의 주인공이다 불교문예 2023년 여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6.11
봄날, 119 봄날, 119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꽃 피는 소리는 안들려도 만리 밖 꽃 지는 소리는 왜 그리 서운한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닿는 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한 시간 걸리는 다정한 초록버스는 기다려도 오지 않네 환청으로 들리는 일일구 귀 어두운 친구가 어디 아프냐고 묻네 아냐아냐 일일일구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초록버스가 지나가네 봄날을 싣고 휑하니 지나가네 저 앞에 내가 달려가네 십 년 후의 내가 기우뚱 보이네 계간 시인정신 2023 여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6.08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지?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지? 신발 속에 돌이 들어갔는지 움직일때마다 발이 아프다 바위가 아닌 손톱보다 작은 돌부스러기가 온몸을 아프게 한다 가던 길 멈추고 신발 속을 털어내면 그만인데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낡은 신발 털어도 소용 없는 미련한 깨달음 때문에 절뚝!한걸음 또 내딛는다 * 수정 중인 시이므로 복사는 삼가해 주시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6.05
나한 56-백일홍 편지 나한 56 -백일홍 편지 길섶 모퉁이에 핀 백일홍을 보았네 지나가다 흠칫 되돌아보니 이제 막 붉어지려는지 하얗게 흔들거리네 아니 백일을 붉다가 웃음을 지워버리는 중인지도 모르지 누구를 기다리나 앉은 듯 서 있는 듯 향기는 없어도 나비는 찾아오고 여름 한낮 뙤약볕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려나 핏줄이면서 남인 누이의 얼굴이 나를 미워하다던 그 말이 이제는 서럽지 않네 한 송이 백일홍 편지를 읽다가 가던 길을 잊었네 문학과 창작 2023 여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6.01
나한 38-그믐달 나한 38 -그믐달 누구나 가슴 깊이 칼 한 자루 지니고 산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물도 베이고 웃음도 찔리는데 그 칼이 먹고 사는 것은 묵언의 피 이제는 닳고 닳아 어디에든 닿고 싶은지 바위에 튕겨지는 못처럼 가끔 혼자 운다 사랑이 되지 못하는 칼 소심한 주인을 닮은 칼 문학과 창작 2023 여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5.31
나한 62 -텅 빈 나한 62 -텅 빈 새벽이 오기도 전에 거칠지만 겸손한 손으로 온갖 쓰레기를 거두어가는 당신이 없었다면 모두들 큰 길을 찾아 몰려갈때 혼자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당신이 없었다면 왼손이 하는 일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누추한 나의 허물을 기꺼이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는 당신이 없었다면 이 텅 빈 세상이 쓸쓸하기도 하여 화르르 피어 스르르 지는 봄꽃 같이 하염없이 울었으리 오체투지의 낮은 자세로 하늘을 우러르는 일을 알려주는 저 먼 지혜로 숨어있는 텅 비어 가득 찬 희망이라는 당신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3.24
저만치 찔레꽃 저만치 찔레꽃 나는 바람으로 덜려가서 어디든 닿는 사람 어디는 닿아서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사람 소유를 꿈꾸지 않으니 맹목이 나의 친구 길이 없어도 가고 지나간 발자국이 남지 않는 혹여 눈길 닿는 곳에 작은 손 흔들며 피는 꽃이 있으면 바람에 쓴 빛의 마음으로 그대 읽어 주시길 눈물로 거두어 주시길 시현실 2023 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2.24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 당신은 성분이 안좋군요 감자를 먹기 위해 사정없이 꽃을 꺾어버리네 이제 피려고 하는 중이었으니 쓸데없이 지는 일은 없을 거야 주렁주렁 당신의 생에 매달린 수식어가 늘 문제지 나도 모르는 성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도대체 성분이 뭔데 누구는 자랑스럽게 훈장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그 장부 왜 내가 꼬드긴 정부라고 오독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성분이 안좋아 반드시 검은 정장을 입도록 하시오 눈 먼 개미들이 입에 확성기를 달고 행진을 할 때 노란 중앙선을 밟으며 저기 중간인이 오고 있다 계간 시현실 2023 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2.20
아하! 아하! 뜬 구름이었구나 이 세상이 아득하게 발 밑에 그러고보니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 것이구나 이 구름 저구름 만나고 헤어지면서 이제는 연기가 되려는지 눈 앞이 가물가물하구나 가벼워지는구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2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