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03

나한 62 -텅 빈

나한 62 -텅 빈 새벽이 오기도 전에 거칠지만 겸손한 손으로 온갖 쓰레기를 거두어가는 당신이 없었다면 모두들 큰 길을 찾아 몰려갈때 혼자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당신이 없었다면 왼손이 하는 일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누추한 나의 허물을 기꺼이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는 당신이 없었다면 이 텅 빈 세상이 쓸쓸하기도 하여 화르르 피어 스르르 지는 봄꽃 같이 하염없이 울었으리 오체투지의 낮은 자세로 하늘을 우러르는 일을 알려주는 저 먼 지혜로 숨어있는 텅 비어 가득 찬 희망이라는 당신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 당신은 성분이 안좋군요 감자를 먹기 위해 사정없이 꽃을 꺾어버리네 이제 피려고 하는 중이었으니 쓸데없이 지는 일은 없을 거야 주렁주렁 당신의 생에 매달린 수식어가 늘 문제지 나도 모르는 성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도대체 성분이 뭔데 누구는 자랑스럽게 훈장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그 장부 왜 내가 꼬드긴 정부라고 오독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성분이 안좋아 반드시 검은 정장을 입도록 하시오 눈 먼 개미들이 입에 확성기를 달고 행진을 할 때 노란 중앙선을 밟으며 저기 중간인이 오고 있다 계간 시현실 2023 봄호

구름꽃

구름꽃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저쪽 세상으로 걸어가는 기러기들이 기럭기럭 발자국들을 강물에 던져놓고 간다 강물은 몸으로 발자국을 받아 숨기며 얼어가는 울음을 파문으로 남긴다 가끔 갈 길을 잃어 망망해진 마음일 때 남쪽 바다에서 피어난 구름이 기여코 내게로 올 때 머물듯 흘러가면서 기럭기럭 무봉의 날개를 내게 입혀주려는듯 하다 여전히 이 세상이 낯설어 저곳을 걸어가는 나를 위하여 길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너가는 것이라고 또 뉘엿뉘엿하다 문학의식 2022년 겨울호

자화상

자화상 구순 어머니, 그림 그리기 시간에 자화상을 그렸나 보다.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어 지난 세월은 다 잊었어도 옛 얼굴은 잊지 않았는지 주름살 없는 봄날 왜 나는 내 얼굴을 그릴 수가 없나 시간에 쫓기는 얼굴, 낭패감에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할 수 없나 붓을 드니 늪이 그려지고 늪을 지우면 사막이 나온다. 사막을 걷어내니 낙타 한 마리, 마두금이 시린 바람을 끊어내고 있다. 검게 변한 백지에 별 하나 그려 넣어라 하늘에 계신 어머니 말씀이다 계간 시선 2022년 겨울호

하루

하루 밧줄에 매달린 채 고층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 사내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바닥 밑에 또 바닥이 있어 캼캄한 흙속에서 기어 올라온 지렁이가 지룡의 헛된 꿈을 꾸며 햇볕에 말라가고 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안간 힘과 솟구쳐 오르려는 욕망이 한 순간의 불꽃놀이로 스러지는 한 생 불붙은 심지를 꽁무니에 매달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너는 누구냐 시와 사람 2022 겨울호

눈물을 먹다

눈물을 먹다 연두도 아니고 보라도 아닌 이 세상 가장 예쁜 사람에게 목걸이로 만들어 주고 싶은 작은 알맹이들 저 예쁜 것들을 땅에 묻으면 무우가 된다 어차피 흙속에 들어가 무우가 될텐데 누가 물과 하늘빛을 버무린 저 빛깔을 내려줬을까 누군가 내게 생을 물어봤을 때 정답을 모르는 나는 문득 이 생각이 떠올랐을 뿐 무우는 먹는게 아니라 근심이 없어지는 눈물이라고 시와 사람 2022년 겨울호

한 발짝

한 발짝 쓸쓸을 숫돌 삼아 붓을 간다 스윽슥 헛된 그림자가 날이 서고 한 발짝 건너면 다른 세상 너에게로 간다 여립이 가고 봉준이가 걸어갔던 길은 보이지 않고 신기루 같은 중얼거림이 깃발로 나부끼는 저 먼 곳 먹물로 살았는데 벼루는 말라 단지를 하려니 목숨이 위태롭다 벼 옆에 들러붙은 피를 누가 나무랄 수 있나 한 발짝 딛기도 전에 기우뚱거리는 대동의 깃발 영영 붓은 무딘 칼도 되지 못하려는지 혀를 동여맨 말들이 봉두난발 엉켜 춤춘다 글쎄, 한발짝 내딛기 평생이 모자란다 2022년 12월 공시사

빛의 속도

빛의 속도 그렇게 닿았다고 한다 느릿느릿 걸어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가에 와있다고 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저 부드럽고 깊이를 알수 없는 문장을 읽으려 할 때 처럼 나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인데 강물 따라 같이 흘러가거나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그리워하는 일이 빛의 속도인 것이다 계간 《동안》 202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