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11

나한 42-어떤 하루

나한 42 -어떤 하루 적막을 지우려고 빗자루를 든다 추락한 햇볕의 발자국 허공을 휘저으며 날아가던 새가 무거워 던져놓고 간 그림자 맴만 돌다가 입을 봉한 말들이 한 목소리로 내게 덤벼든다 갈대로 만든 빗자루가 휘청휘청 정처 없는 생각을 쓸어낼 때마다 주문 呪文이 되는 쓸쓸은 사실은 빗자루가 내뱉는 목맨 쉰 소리일 뿐인데 불교문예 2023 여름호

나한 39-곰 잡으러 가자

나한 39 -곰 잡으러 가자 문을 열고 나가니 아직 퇴각하지 못한 구석기 이전의 어둠이 내 앞에 서 있다 막막한 아침의 배꼽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몽환 속에 들어설 때 나는 맛이 없는 외로운 짐승일 뿐 따먹어야 할 열매는 이미 흙으로 돌아가고 투박한 돌도끼 대신 휘청거리는 볼펜 한 자루 쥐고 두리번거리는 화면의 미망에 망연하다 빙하기가 다시 오려는지 저 멀리서 쿵쿵거리며 울리는 발자국 소리 나는 거역할 수 없는 거인을 공손히 기다린다 희망은 공포를 가득 안은 막차 자꾸 수만 년 전 동굴 속으로 몸을 구겨넣는다 이럴 때 미련한 곰은 위대한 신화의 주인공이다 불교문예 2023년 여름호

봄날, 119

봄날, 119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꽃 피는 소리는 안들려도 만리 밖 꽃 지는 소리는 왜 그리 서운한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닿는 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한 시간 걸리는 다정한 초록버스는 기다려도 오지 않네 환청으로 들리는 일일구 귀 어두운 친구가 어디 아프냐고 묻네 아냐아냐 일일일구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초록버스가 지나가네 봄날을 싣고 휑하니 지나가네 저 앞에 내가 달려가네 십 년 후의 내가 기우뚱 보이네 계간 시인정신 2023 여름호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지?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지? 신발 속에 돌이 들어갔는지 움직일때마다 발이 아프다 바위가 아닌 손톱보다 작은 돌부스러기가 온몸을 아프게 한다 가던 길 멈추고 신발 속을 털어내면 그만인데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낡은 신발 털어도 소용 없는 미련한 깨달음 때문에 절뚝!한걸음 또 내딛는다 * 수정 중인 시이므로 복사는 삼가해 주시길^^

나한 56-백일홍 편지

나한 56 -백일홍 편지 길섶 모퉁이에 핀 백일홍을 보았네 지나가다 흠칫 되돌아보니 이제 막 붉어지려는지 하얗게 흔들거리네 아니 백일을 붉다가 웃음을 지워버리는 중인지도 모르지 누구를 기다리나 앉은 듯 서 있는 듯 향기는 없어도 나비는 찾아오고 여름 한낮 뙤약볕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려나 핏줄이면서 남인 누이의 얼굴이 나를 미워하다던 그 말이 이제는 서럽지 않네 한 송이 백일홍 편지를 읽다가 가던 길을 잊었네 문학과 창작 2023 여름호

나한 62 -텅 빈

나한 62 -텅 빈 새벽이 오기도 전에 거칠지만 겸손한 손으로 온갖 쓰레기를 거두어가는 당신이 없었다면 모두들 큰 길을 찾아 몰려갈때 혼자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당신이 없었다면 왼손이 하는 일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누추한 나의 허물을 기꺼이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는 당신이 없었다면 이 텅 빈 세상이 쓸쓸하기도 하여 화르르 피어 스르르 지는 봄꽃 같이 하염없이 울었으리 오체투지의 낮은 자세로 하늘을 우러르는 일을 알려주는 저 먼 지혜로 숨어있는 텅 비어 가득 찬 희망이라는 당신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 당신은 성분이 안좋군요 감자를 먹기 위해 사정없이 꽃을 꺾어버리네 이제 피려고 하는 중이었으니 쓸데없이 지는 일은 없을 거야 주렁주렁 당신의 생에 매달린 수식어가 늘 문제지 나도 모르는 성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도대체 성분이 뭔데 누구는 자랑스럽게 훈장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그 장부 왜 내가 꼬드긴 정부라고 오독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성분이 안좋아 반드시 검은 정장을 입도록 하시오 눈 먼 개미들이 입에 확성기를 달고 행진을 할 때 노란 중앙선을 밟으며 저기 중간인이 오고 있다 계간 시현실 202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