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보름달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 타인의 슬픔 2008 2012.04.10
원경 遠景 원경 遠景 / 나호열 썼다가 금세 지워지는 힘찬 일획 저 그림, 저 글씨를 어디에 담으려 하는가 어떻게 뜻으로 읽으려 하는가 하늘 한 장 그리고 몇 만 마리의 가창오리 떼 하늘이 휘청 한쪽으로 기울 때마다 지상으로 낙하하는 그림자들 가까이 다가서지 마라 고단한 날갯짓과 노동의 땀.. 타인의 슬픔 2008 2012.03.22
가을의 기도 / 나호열 가을의 기도 / 나호열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만 그 열매를 삼켜버렸다 눈물은 안으로 잠길수록 단단하게 여무는 씨앗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여 내가 그대의 몸으로 들어가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움터 오를 그 날까지 이 햇볕 짱짱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타인의 슬픔 2008 2012.03.20
낙엽에게 낙엽에게 나무의 눈물이라고 너를 부른 적이 있다 햇빛과 맑은 공기를 버무리던 손 헤아릴 수 없이 벅찼던 들숨과 날숨의 부질없는 기억의 쭈글거리는 허파 창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였다 슬픔이 감추고 있는 바람, 상처, 꽃의 전생 그 .. 타인의 슬픔 2008 2012.03.10
밤길 밤길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휘휘 저으며 간다 그의 느린 발걸음은 쫓겨가는 자의 밤을 도와 줄행랑을 치는 비겁한 사내의 초조와는 거리가 멀다 우두커니 서서 되새김질하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신호등 앞에서도 공손하다 한 번 껌벅일 때마다 점멸하는 몇 번의 신호를 흘려보내.. 타인의 슬픔 2008 2012.03.08
삼부연 폭포 삼부연 폭포 왜 울고 싶은 날이 없을까요 서러운 마음 뚜우뚝 떨어지고 떨어지고 혼절해버린 울음이 그네처럼 너울거리네요 꽃들이 죽어 별이 되다가 육신을 얻어 꽃이 되려던 별이 누군가의 시린 벽을 부여잡고 있네요 시퍼런 하늘을 장작 패는 날 바람처럼 도끼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 타인의 슬픔 2008 2012.03.07
장성 지날 때 장성 지날 때 총알 같은 것이 휘익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섬광 같은 것이 망막 속으로 텀벙 뛰어들었다 무엇을 그리 부여잡았는지 굳은살이 손금을 타고 넘을 때 눈 한 송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속도위반 통지서 고갯길을 숨차게 달려 넘었던 언제였나 나비 떼가 꽃으로 피던 겨울, 어느날.. 타인의 슬픔 2008 2012.03.04
겨울밤 겨울밤 / 나호열 황소가 한 마리 들어온다 두 마리 들어온다 망나니의 칼이 허공을 가른다 틈을 막아야 했는데 틈으로 들어오는 손을 피해 태아처럼 온몸을 둘둘 둥글린 방이 먼저 허공에 뜬다 저 탯줄을 끊어야 해 손은 방 안을 황소처럼 헤집고 칼 비린내를 풍긴다 나는 허공에 갇히고, .. 타인의 슬픔 2008 2012.03.02
산에 들어 / 나호열 산에 들어 / 나호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겨울 산에 들어 그 산이 품고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싶었다 직립한 나무들의 선정과 곤줄박이 같은 작은 새들의 지저귐과 얼음으로 굳어 있는 말들과 낙엽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새싹들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주인이면서 주인임을 부.. 타인의 슬픔 2008 2012.03.01
제 1부 내일이면 닿으리라 제 1부 내일이면 닿으리라 폭설 / 나호열 하늘이 똥을 누신다 무량하게 경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위로 몇날 며칠을 똥을 누신다 거름이다 말씀이다 사람들이 만든 길을 지우고 몇 그루의 장송도 넘어뜨렸다 아우성에도 아랑 곳 없이 부질없는 쇠기둥을 휘게 만들었다 하늘에 방목한 것은 .. 타인의 슬픔 2008 2012.02.28
시집을 엮으며 시집을 엮으며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이 지리멸렬하다는 것을 안다. 인 간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 나의 절망이고 그 절망 끝에서 시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믿는데서 희망이 샘솟 는다. 너무나 사소하여 부끄러울지라도 조각난 시들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서툴기 이.. 타인의 슬픔 2008 2011.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