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 숲 삼릉 숲 / 나호열 소나무 숲을 지났을 뿐이다 화살 촉 같은 아침 햇살이 조금씩 끝이 둥글어지면서 안개를 톡톡 칠 때마다 아기 얼굴 같은 물방울들이 잠깐 꽃처럼 피었다 지는 그 사이를 천 년 동안 걸었던 것이다 너무 가까이는 말고 숨결 들릴 듯 말 듯한 어깨 틈만큼 그리워했던 것 순.. 타인의 슬픔 2008 2012.06.07
신탄리행 신탄리행 / 나호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 없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 없다 가슴 서늘해지는 끝이라는 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마지막 역에서 얼마나 나는 부끄러워지는가 온기 가득했던 한 잔의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작별의 편지 한 장 다 쓰기도 전에 이렇게 당도해버린 낯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05
사막에 살다 사막에 살다 / 나호열 사막에 살기 위하여 나는 늑대가 되었다 숲에서는 모두들 나를 피해 달아나지만 이곳에서는 오로지 나 혼자일 뿐 혼자만의 바람이 불고 혼자만의 달이 떠서 추위에 떨고 있는 나와 혼자 부르는 어떤 이름과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는 이곳에서 멀다 사랑이여 굶주림.. 타인의 슬픔 2008 2012.06.04
정선 장날 정선 장날 / 나호열 이제는 늙어 헤어지는 일도 섭섭하지 않은 나이 사고 싶은 것도 없고 팔아야 할 것도 없는 장터 이쯤에서 산이 높아 일찍 노을 떨구는 잊어버린 옛사랑을 문득 마주친다면 한 번 놓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낯익은 얼굴들 묵묵부답인 저 표정을 배울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02
사막의 금언 사막의 금언 / 나호열 목마른 자에게는 신기루를 보여주고 꿈을 가진 자에게는 길을 내어준다 몇 십 년 만에 한 번 그것도 한 순간 내리는 비에 눈을 뜨는 풀들과 애벌레들 부드러우면서도 잔인한 침묵의 혀에 매달려 있다 끝까지 가라 앞으로 가거나 뒷걸음질 치거나 맹목 盲目! 타인의 슬픔 2008 2012.05.31
경강 역에서 경강 역에서 / 나호열 떠나려는 것도 아니고 돌아오기 위하여 이 곳에 온 것도 아니다 잠시 젖은 그림자를 한철 꽃무더기처럼 펼쳐 놓다가 황급히 몸속으로 구겨 넣을 뿐 떠나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거나 돌아오는 사람에게 눈길을 훔치려고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다 도道를 가르는 것이 .. 타인의 슬픔 2008 2012.05.29
경강이라는 곳 경강이라는 곳 / 나호열 주인이 사라진 거미줄에 하늘이 걸려 있다 문은 하나인데 너는 출구라고 하고 나는 입구라고 우긴다 하늘이나 깊은 바다를 본 탓이다 푸름을 시간에 잘못 입력했던 까닭에 출렁거리는 현에 날개가 닿는 순간에도 눈빛이 맑다 참을성이 많은 주인은 좀처럼 모습을.. 타인의 슬픔 2008 2012.05.28
춤 춤 / 나호열 절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강가의 탑처럼 조금씩 허물어지는 육신의 틈이라고 나는 배웠다 직립을 꿈꾸면서도 햇살에 휘이고 바람에 길들여지는 나무들의 허공을 부여잡은 한 순간 정지의 날숨이 춤의 꿈이라고 나는 배웠다 그러나 또한 동천 언 하늘에 길을 내는 새들의 날.. 타인의 슬픔 2008 2012.05.27
75 번 국도 75 번 국도 / 나호열 생전 가 보지 않은 길을 꿈꾸고 있다 부드러운 입술이 뭉클해지는 가슴이 자꾸 길을 막는다 강 건너에서 헤어졌던 길인데 다시 여기서 만나 이런 부끄러움 일 때 안개는 산을 하늘께로 밀어올려 푸른 꽃을 만들고 꽃대궁 속으로 또르르 굴러들어가는 눈물같이 길은 또.. 타인의 슬픔 2008 2012.05.24
낮달 낮달 / 나호열 바람이 슬며시 옷자락을 당기듯이 당신을 생각할 때 오래된 구두를 깁고 있는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슬픈 짐승의 가죽 같은 가슴은 피의 더운 색깔을 지워버리고 단단히 동여매었던 이야기는 실밥이 터져버렸다 아직은 걸어야 할 길이 더 남았다는 듯이 내가 깁고 있는 것.. 타인의 슬픔 2008 2012.05.22
김옥희씨 김옥희씨 / 나호열 열둘 더하기 열둘은? 이십사 팔 곱하기 팔은? 육십 사 이백오십육 곱하기 이백오십육은? 아…외웠는데 까 먹었네, 생일이 언제? 구월 이십 팔일 오늘은 며칠? 그건 알아서 뭐해 그날이 그날이지 자목련 꽃진 지 이미 오래인데 왜 꽃이 안 피냐? 저 나무는…아홉시 반에 .. 타인의 슬픔 2008 2012.05.20
풍경 풍경 / 나호열 깊은 산중 홀로 숨어 들어와 가슴으로 우는 사람들처럼 지천에 깔린 꽃들은 한결같이 바람을 가득 담고 있다 휘적휘적 앞에 가는 김남표 씨 배추농사를 짓다가 작파한 땅에 온갖 씨앗을 흩뿌렸다지 힘들게 고개 들어 보니 고산준령, 숨 헐떡이는 하늘이 가까워서 좋은데 여.. 타인의 슬픔 2008 2012.05.19
시간을 견디다 시간을 견디다 / 나호열 진부령 고개를 넘어오다가 짐칸에 소나무 한 그루 태운 트럭을 앞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구비를 돌 때마다 뿌리를 감싼 흙들이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습니다. 마치 제 집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발자국을 남기려는 것처럼, 눈물처럼 떨어져 내렸습니다. 늙으면 우.. 타인의 슬픔 2008 2012.05.16
그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통 같은 고독 때문에 슬프다고 그가 말했다. 황선홍 선수가 골을 넣고 세 번 손을 내저었던 것은 아내에게, 딸에게, 그리고 아들에게 보낸 자랑스런 선물이라고 벌써 사 년 전 얘기인데 티브이 화면 속에서 눈물이 울컥거릴 때였다. 마침 아무도 없는 텅.. 타인의 슬픔 2008 2012.05.10
긴 편지 긴 편지 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둥켜 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타인의 슬픔 2008 2012.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