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옛길 당신에게도 아마 옛길이 있을 것입니다. 운하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피를 나눈 길들이 당신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헤어질 때에는 될 수 있으면 뒤로 돌아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 한 채로 뒷걸음을 치면서 고통스럽겠지만 조금씩 멀어.. 타인의 슬픔 2008 2012.05.07
오래된 책 오래된 책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가 지루하게 갈피 속에 숨어들어 납작해진 벌레의 상형에 얹혀있다 매일 내려 쌓이는 눈 위에 발자국처럼 길게 어디론가 마침표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쌓이는 세월보다 녹아 스며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 수심이 깊은 호수가 출.. 타인의 슬픔 2008 2012.05.05
사막의 문 사막의 문 어제는 힘없이 초식의 어금니가 부러지고 어머니는 자꾸만 기억을 놓으신다 익숙하게 여닫던 문 삐걱거린다 안과 밖의 경계가 신기루만큼 멀다 마음의 지도는 비어 있다 그 속에 나는 구름을 그린다 헐거운, 낡아가는, 틈, 깊어지는 눈, 기다리는, 견디는, 싹, 제법 두꺼웠던 마.. 타인의 슬픔 2008 2012.05.02
겨울의 자화상 겨울의 자화상 꽃도 이만큼 피었다 지고 가을은 서둘러 와서 귀뚜라미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청맹과니 같으니, 마을 사라지고 길이 사라지니 못 본 장승이 우두커니 서 있구나. 내 보기에도 무서운 얼굴 펴려고 하니 겨울바람이 철석 따귀를 때리고 지나간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 타인의 슬픔 2008 2012.05.02
사랑은 앓는 것이다 사랑은 앓는 것이다 발밑에 밟히는 나뭇잎들의, 착각이기를 바라지만 목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운명의 시간을 맞이한 저 무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억압에도 웃거나 우는 법 없이 겨울의 사전 속에 막막하게 들어와 박히는 자음들, 아직도 뇌리에서 절름거리는 발자국처.. 타인의 슬픔 2008 2012.04.30
하루 하루 그 편지는, 어김없이, 내 앞에 놓여져 있다. 발신인이 없는 편지는 수상하다. 나는 한번도 그 내용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되돌려 보낼 주소가 없으므로 투덜대다가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기로 한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흡혈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밀봉의 틈새로 언뜻 비치기도 .. 타인의 슬픔 2008 2012.04.29
음지식물 음지식물 태어날 때 어머니가 일러주신 길은 좁고 어두운 길이었다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송곳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울음은 그렇게 푸르지 않았을 것이다. 몸에 남아 있는 푸른 얼룩은 고통의 살점 알 수 없는 적의는 죄와 길이 통하고 먼저 내 살점을 뚫고 나서야 허공을 겨눈다 이.. 타인의 슬픔 2008 2012.04.27
법고 치는 사내 법고 치는 사내 저녁 이었다 배롱나무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지만 어느 새 기지개를 펴고 주먹을 내지를 것이다 가지를 단단히 움켜 쥔 새가 호르륵 호르륵 앞산 뒷산을 넘고 넘기는 기억의 씨는 더 깊게 무덤으로 파고들 것이다. 그가 굽이치며 걸어 올라왔을 길이 이제는 혼자 휘적이.. 타인의 슬픔 2008 2012.04.25
인두염 앓던 날 인두염 앓던 날 봄이 오면 말문이 막힌다 목구멍 깊숙이 붉은 꽃 피고 꽃 피 묻은 날개로 박쥐는 소리를 파먹는다 절대 침묵으로 한 문장으로 한 마장쯤 긴 편지 밤새 창문을 흔들던 몇 그램의 바람이 봄을 저만치 끌고 갈 때까지 말을 잃는다 입 안에서 곪아터진 구름이 목련의 이름으로 .. 타인의 슬픔 2008 2012.04.22
사월의 일기 사월의 일기 말문을 그만 닫으라고 하느님께서 병을 주셨다 몇 차례 황사가 지나가고 꽃들은 다투어 피었다 졌다 며칠을 눈으로 듣고 귀로 말하는 동안 나무속에도 한 영혼이 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허공에 가지를 뻗고 파란 잎을 내미는 일 꽃을 피우고 심지어 제 머리 위에 .. 타인의 슬픔 2008 2012.04.21
내일이면 닿으리라 내일이면 닿으리라 내일이면 닿으리라 산새소리에 매화가 피고 시냇물 향기만큼 맑은 그 마을에 가 닿으리라 나그네는 밤길을 걸어야 하는 법 어둠이 피워내는 불빛을 보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지 그것이 멀리 있어야 바라보이는 그리운 얼굴인지 알아 나그네는 또 걷고 걷는다.. 타인의 슬픔 2008 2012.04.18
바람소리 바람소리 전화기 속으로 수많은 말들을 쏟아 넣었는데 먼 곳에서 너는 바람소리만을 들었다고 한다 돌개바람처럼 말들이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빙하의 목구멍을 지나는 동안 한 계절이 속절없이 지나고 텅 빈 머리 속에서 꽃이 졌던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처음부터 그 말들은 문법.. 타인의 슬픔 2008 2012.04.17
큰 물 진 뒤 큰 물 진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 다시 푸르고 햇빛은 강물에 뛰어 들어가 은빛 비늘을 반짝였다 사나운 마음이 그런 것처럼 붉은 혀 널름거리던 시간이 지나자 영영 사라져 없어질 것 같던 길이며 작은 풀꽃들 휘었던 어깨를 곧추세우고 어느 사람은 뛰고 어느 사람은 천천히 걷고 .. 타인의 슬픔 2008 2012.04.12
너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는다 유목의 하늘에 양 떼를 풀어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 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 타인의 슬픔 2008 2012.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