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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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 2008

밤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3. 8. 21:46

밤길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휘휘 저으며 간다

그의 느린 발걸음은 쫓겨가는 자의

밤을 도와 줄행랑을 치는 비겁한 사내의

초조와는 거리가 멀다

우두커니 서서 되새김질하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신호등 앞에서도 공손하다

한 번 껌벅일 때마다 점멸하는 몇 번의 신호를

흘려보내는 것이 마치 소의 생 속으로 들어갈 듯하다

밤이 깊을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살을 내주고

이윽고 그림자만이 남은 듯하다

멈춤과 결코 뒷걸음질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의

긴 한숨이 그림자를 포도 鋪道 위로 날려버리자

그는 사라지고 뭉툭해진 열쇠 하나가 스키드 마크 위에 얹혀졌다

무언가 급정거한 불온한 생 위로 마치 새싹처럼 돋아 오른 열쇠

그의 천천한 발걸음은 아마도 사라져버린 방을 찾기 위해서일까

온통 굳은 자물쇠로 채워진 세상의 어딘가에

사라져버린 방은 이미 남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는 그렇게 밤길을 갔다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바람의 매를 맞으며

웃으며 물음표를 닮은 열쇠를 지상에 남겨두고

새벽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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