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을 신봉하다 전등을 신봉하다 / 나호열 반짝거리는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별이 전등이 아니기 때문 수없이 깜박거리는 내 눈을 용서하는 것은 그 눈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 별이 아닌 전등이 깜박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못해 기어코 전등 갓을 뜯어내자 틈새로 들어가 죽은 수많은 날벌레들 가볍게 .. 타인의 슬픔 2008 2012.07.16
강물에 대한 예의 강물에 대한 예의 / 나호열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 타인의 슬픔 2008 2012.07.14
안아주기 안아주기 / 나호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타인의 슬픔 2008 2012.07.13
검 검 / 나호열 미간 사이로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살이 깊이 패여 있다 웃어도 지워지지 않고 눈을 감아도 흐려지지 않는다 메리 고 라운드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탄 웃을 때마다 꽃무더기 무너져 내리던 주인공 아프지 않게 시간이 할퀴고 간 흔적이다 그 검을 찾아라, 내어 놓아라! 몽.. 타인의 슬픔 2008 2012.07.12
아다지오 칸타빌레 아다지오 칸타빌레 / 나호열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넘어졌다 너무 멀리 내다보고 걸으면 안돼 그리고 너무 빨리 내달려서도 안돼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멀리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발이 내려앉고 나의 발이 평발임을 알게 되.. 타인의 슬픔 2008 2012.07.10
문 / 나호열 문 / 나호열 그가 문을 닫고 떠날 때마다 나의 생애는 오래 흔들거렸다 위태롭게 걸려 있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고 정전의 암흑이 발자국들을 엉키게도 했다 세차게 닫히는 쿵하는 소리가 눈물을 한 움쿰씩 여물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 두렵고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 타인의 슬픔 2008 2012.07.09
백발의 꿈 백발의 꿈 / 나호열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는 꿈을 꾼 그 젊은 날은 얼마나 서러웠는지 지금은 어느새 백발이 되어가는 내가 서러웠던 그 젊은 날을 꿈꾸고 있는 중 얼마나 하늘에 가까이 닿아야 만년설을 머리에 인 설산이 될 수 있을까 불화살 같은 햇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 타인의 슬픔 2008 2012.07.07
어느 나무에게 어느 나무에게 / 나호열 이제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눈 감고도 먼 길을 갈 수 있는데 왠지 눈앞이 자주 흔들립니다 어느 날에는 한 페이지의 적막을 읽다 오고 또 어느 날에는 민들레처럼 주저앉아서 솜털 같은 생각들을 날려 보내기도 했었지요 한 그루 나무 앞 구름을 타고 가기도 하고 .. 타인의 슬픔 2008 2012.07.03
고백하라, 오늘을 고백하라, 오늘을 / 나호열 별보다 반짝이는 말이 있다 꽃보다 향기로운 말이 있다 바람보다 부드러운 말이 있다 누구나 그 말을 가슴속에 간직하지만 그 말의 열쇠는 내 손에 없다 반짝이는, 향기로운, 부드러운…그 말의 주어는 늘 침묵 속에 있다 지도는 마음의 깃발로 출렁인다 타인의 슬픔 2008 2012.06.30
길을 찾아서 길을 찾아서/ 나호열 옷고름 여미듯이 문을 하나씩 닫으며 내가 들어선 곳은 어디인가 은밀하게 노을이 내려앉던 들판 어디쯤인가 꿈 밖에 떨어져 있던 날개의 털 길 모퉁이를 돌아 더러운 벤치에 어제의 신문을 깔고 누운 사람이여 어두운 계단을 점자를 읽듯이 내려가며 세상 밖으로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23
모래를 쌓다 모래를 쌓다 / 나호열 길지 않은 생을 모래만 푸다 말 것 같다 모래를 푸다 배운 것은 모래가 되기도 쉽지 않다는 것과 모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온 시간 보다 더 많은 공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하염없이 모래를 푸고 나르는 일이 빛나는 일은 아니지만 하염없이 그 누군가의 몸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20
커피에 대하여 커피에 대하여 / 나호열 사랑을 믿지만 과녁에 꽂히는 화살처럼 가슴에 적중하는 사랑이 나는 두렵네 오늘 밤 뜨겁게 일렁이는 사랑이 지나간 후 속삭이는 바람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힘드네 조금씩 오조준하여 빗나가는, 그리하여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오해받을지라도 나는 그대의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16
먼 길 먼 길 / 나호열 - 제주도 기행. 2 결코 제 발로는 벗어날 수 없는 섬에 왔다 섬과 구름을 헷갈리면서한 시간의 유폐는 지루했다 성산포에서 버스를 탔다 기다려 주는 사람 없는 타지를 향해서 바다가 가끔씩 나타났다 사라지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자리가 넉넉했다 시흥, 종달, 세화, 조.. 타인의 슬픔 2008 2012.06.11
어느 새에 관한 이야기 어느 새에 관한 이야기 / 나호열 -제주도 기행. 1 십 년도 넘었던 것 같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그 모습을 끝내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 머리 위로 철 지난 동백이 툭툭 떨어졌다 어느새라고 적으면 빨간 밑줄이 그어진다 잘못 입력된 맞춤법 검색 어느새 뒤에는 아무 말도 붙이지 말라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10
탑과 나무가 있는 풍경 탑과 나무가 있는 풍경 / 나호열 얼마동안이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니? 바람의 수작에 울컥 꽃을 토해내거나 균열을 일으키며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는 풍경 속의 고요를 담아낸 하늘은 저리도 고운데 아무 것도 동여매지 못한 허리띠 같은 길이 숨는다 죽은 채로 태어나 그냥 .. 타인의 슬픔 2008 201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