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녕, 베이비박스 2019 76

잊다와 잃다 사이

잊다와 잃다 사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곳에서 사라진 시계와 지갑 같은 것 청춘도 그리하여서 빈 자리에 남은 흠집과 얼룩에 서투른 덧칠은 잊어야 한다는 것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버린 아쉬움이라고 하여도 새순으로 돋아오르는 잊어야지 그 말 문득 열일곱에서 스물두 살 그 사이의 내가 잃어버린 것인지 놓아버린 것인지 아슬했던 그 이름을 며칠째 떠올려 보아도 가물거리는 것인데 왜 나는 쓸데없이 손때 묻은 눈물에 미안해하는가 낮달처럼 하염없이

상원사 적멸보궁

상원사 적멸보궁 꼭 한번은 가 봐야 한다고 맹인 불자가 안내를 부탁했다 그러마고 이십 리 선재길 걷고 걸어 상원사에 올랐으나 그만 다리를 접질렸다 여기서도 한참 그러나 여기가 그곳 불자는 두 손을 모으고 절을 올렸다 그래 적멸보궁에 가도 법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 비로 위에 문득 뭉게구름이 빙그레 웃고 몸을 허물어뜨리니 저 구름이 적멸보궁이네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 바람을 맞으면 오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좋다 얼마나 먼 길이었으면 살과 뼈를 나눠주며 이윽고 몸도 버리고 당도한 것인지 그 서늘한 영혼이 설핏 머무르다 던지고 가는 모음에 함부로 얹을 수 없는 웅얼거림 바람이 지나고 난 후에 훅하고 피어났다 스러지는 살내음에 오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남겨두는 서운함이 좋다

의자 4

의자 4 사람은 의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려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줄 때 일 것이다 의자는 오랜 시간 홀로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에게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잠시 고단한 발걸음을 멈춘 이들이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하여 하인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미련 없이 떠나는 그때까지 묵묵하게 무게를 견딜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의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허물어 쓰레기가 되어 산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땅히 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닮은 어떤 일들에 필요한 노역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물끄러미

물끄러미 매일 벽을 밀다가 끝내 절벽 앞에서 새가 되어 날아간 사람을 알고 있다 또 먼 수억 광년 너머의 별이 잘게 부서지며 새로 날아와 이윽고 지상에 내려앉은 천사를 알고 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손가락 끝에 닿을 때 태어나는 물끄러미는 사람과 새와 별과 천사를 품은 고요한 거울 시선이 닿을 듯 말 듯한 그만큼의 어스름에서 들려오는 새끼를 찾는 어미 소의 긴 울음소리

목발 16― 대학大學강의

목발 16 ― 대학大學강의 오래 걷지 않았는데 발이 주저앉았다 먼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는데 눈이 비를 내린다 정심正心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일임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마음이 숨은 곳을 아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 마음을 찾아가는 험로 그 먼 세상을 놓치고 말아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헛된 소문에 커져가는 귀와 넝쿨처럼 허공을 붙잡는 손 댓돌 위에 얌전히 놓인 신발과 금이 간 돋보기 바람의 매를 맞으며 펄럭이는 깃발이 마음일지 몰라 오늘도 결석인 정심이라는 학생

목발 15― 뼈의 말

목발 15 ― 뼈의 말 뼈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문득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 그 순간의 고요를 고통으로 들었다 하나였던 것이 찢기듯 나누어졌던 늦겨울의 밤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이 돌아와도 뼈는 붙지 않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 차마 토해내지 못한 신음이 낙엽으로 수북하게 쌓여있는 가슴속에서 그래도 태어나는 꿈이 있는지 어느 날은 처음 날개가 돋은 새가 보이고 어느 날은 지팡이가 요술방망이가 되어 하늘을 난다고 정신과 의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청과 환각 증세라고 희망 대신 처방전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참 좋은 일요일 지팡이도 쉬고 싶다는데 은행잎 깔린 길을 휘적거리며 간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넘어지면 끝이라고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목발 14― 어느 날의 하프

목발 14 ― 어느 날의 하프 바람으로 살았다 어디에든 닿았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았으나 기쁨과 슬픔의 빨랫줄에 걸린 부끄러운 속옷이 된 나를 붙잡아 줄로 맨 사람이여 그대가 짚어내는 내 몸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오고 물소리가 감춘 음표들이 꽃 열리는 순간을 낙엽이 떨어질 때 움켜쥔 하늘 한 자락이 깔리는 어스름을 사랑으로 받겠느냐 야윈 그림자를 바지랑대 삼아 눈 먼 악보의 노래를 뜯어내는 그대의 손길에 속절없이 나는 숲속의 여린 꽃잎 하나 훔치지 못하는 가난한 사냥꾼일 뿐이다

목발 11― 나들이

목발 11 ― 나들이 한 사람은 부끄러워서 한 사람은 어색해서 평생 손 마주 잡지 못했다 오늘은 고샅길 지나 꽃구경 간다 날마다 지게 지고 소쿠리 이고 다니던 산길에 산수유도 피고 매화도 활짝 얼굴을 폈다 허리도 굽고 다리 힘도 없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 꼭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부끄러움도 없이 어색함도 없이 한 그루 꽃나무로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