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녕, 베이비박스 2019 76

너무 많은

너무 많은 너무 많은 것을 보지 마세요 안과의사가 말했다 너무 많은 것을 들으려 하지 마세요 이비인후과 의사가 말했다 병든 몸을 씻으려 강가에 와서 눈물을 쏟았다 먼지가 돼버린 신기루가 꽃씨처럼 휘날렸다 귀에서 몇 필이나 되는지 목쉰 바람만 흘러나왔다 사막은 너무 많은 나 휘발된 눈물과 호명되지 않은 이름의 발효 지금의 나는 오래 전에 떠나왔던 초원을 기억하는 단봉낙타

어느 장례식

어느 장례식* 부고를 보냈다 살아 있는 노옹이 자신의 죽음을 알렸다 숨이 끊어지고 난 후에 그리워하면 뭐 하나 살아 있어도 사람 구실 못하면 죽은 것이지 저 세상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고 미운 마음 서러운 마음 눈 녹이는 웃음으로 날려 보내자고 누구나 시한부 인생 어느 노옹이 그렇게 장례식을 치렀다 부끄러움은 인생을 썩게 하지 않은 방부제** 함께 부끄러움을 나눴다 * 어느 팔순 넘은 노인이 생전 장례식을 치렀다는 신문기사가 나왔다. 살아서 치르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장례식 얼마나 멋진 일인가! ** 어느 신문의 오늘의 내 운세 : 부끄러움은 인생의 방부제이다

구둔역에서

구둔역에서 어느 사람은 떠나고 어느 사람은 돌아오고 어느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어느 사람은 끝끝내 잊혀지지 않고 저 홀로 기다림의 키를 세우고 저 홀로 그리움을 아로새기는 저 느티나무와 향나무 구둔역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무엇이 된다 눈길 닿는 곳 허물어지고 낡아가는 그 무엇의 주인공이 되어 쿵쿵 가슴을 울리며 지나가던 청춘의 기차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누구의 구둔역인가 속말을 되뇌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오늘의 운세에 운명을 즐기면 근심이 없다고 적혀 있다 기쁨은 슬퍼하지 않을 때 찾아오고 사랑은 미워하는 마음을 버릴 때 저절로 가득 차는 것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오늘의 손님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어 오늘을 맞이하면 슬픔도 나그네일 뿐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미움을 잊어버리면 오늘의 운세는 늘 운명을 즐기면 근심이 없다

다섯 살 아이

다섯 살 아이 일요일 오후쯤이었으리라 모처럼 툇마루에 햇살이 내려앉은 이른 봄쯤이었으리라 예쁘게 웃어봐 예쁨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이는 웃고 기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두 손을 모았으리라 젊은 엄마는 긴 겨울날의 짧은 햇살로 이은 털실로 털 바지를 입히고 바람과 다름없던 아빠는 순간을 남기기 위해 분주히 사진기의 초점을 맞추었으리라 다시는 오지 않을 듯한 봄을 기다리는 일요일 오후 손바닥만 한 사진 속 아이는 흑과 백의 무채색의 세월을 지나 어디로 갔나 흘러가는 강물 속을 들여다보듯 주름살 하나 없는 웃음과 바랄 것이 없는 기도는 어디로 갔나 가끔 바람이 전해주는 풍문으로 해맑은 웃음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를 배우고 있는 누렇게 물든 가랑잎 발밑에 차다

빈 집

빈 집 우리 집 개는 심심하면 짜증을 낸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노란 앵무가 말을 배우려고 부리를 쭈빗대면 하얀 이빨을 들이대며 짖어댄다 그리하여 우리 집 티브이는 하루 종일 켜져 있다 다들 애국한다는 철새들이 흘리는 말들 감정을 몰입하며 가짜 눈물을 흘리는 연속극 우리 집 개는 한심하다는 듯이 턱 고이고 쳐다보다가 스르르 오수를 즐긴다 정말 우리 집 개는 심심해서 짜증을 내는 것일까 세상에서 쫓기듯 퇴출당한 사람은 정말 외로운 것일까 사람과 개가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묻는다 외로워? 개는 또 짖기 시작하고 사람은 길게 하품을 내뱉는 한낮 빈 집은 갈 곳이 없다

옆 집

옆 집 벽에 가로 가로막히고 기둥으로 숨겨진 암호로만 문을 여는 아득하게 은하계 저 건너편 먼 옆집도 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주인 몰래 들어가 낮잠도 자고 음악도 들을 수 있는 은은하게 가슴을 맞댈 수 있는 그런 먼 옆집도 있다 멀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등을 맞대지 않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옆집과 옆집 사이에는 카페 그리움이 있다 닉네임이 달린 그 수많은 옆집은 멀기만 한 내 가슴 속에 있다 바다가 되고 수심 모를 깊은 하늘이 되고 손 뻗쳐도 아쉽게 닿지 않는 별이 되기에 심장은 지금도 발자국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달려가고 있다

천수관음

천수관음 아무 곳에도 닿지 않는 천 개의 손이 있다. 움켜쥐기 위한 손이 아니라면 차라리 허공의 틈새를 찾는 눈이 맞겠다. 그렇다면 나뭇가지 하나가 허공을 더듬거리며 하는 일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내미는 것이리라. 먼 길 떠나 돌아오지 않는 어미를 기다리는 아이의 눈빛으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독약에 닿으려는 혀처럼 여린 가지는 나무에게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은 꿈의 길이다.

바람과 놀다

바람과 놀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갑니다 어느 사람은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냐 묻고 어느 사람은 죽어서 날아가는 먼 서쪽하늘을 그리워합디다만 서천은 에둘러 굽이굽이 마음 적시고 꿈을 입힌 비단 강이 어머니의 품속 같은 바다로 잦아드는 곳 느리게 닿던 역은 멀리 사라지고 역 앞 허름한 여인숙 어린 종씨는 어디서 늙고 있는지 누구에게 닿아도 내력을 묻지 않는 바람이 되어 혼자 울다가 옵니다

뾰족하다

뾰족하다 ‘뾰족하다ʼ 이 말이 데리고 오는 ‘못ʼ과 ‘가시ʼ. 못은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으니 세차게 머리를 맞으면서 살 속을 파고들어 집착을 만들고 가시는 제 살을 깎아 다가옴을 두려워하며 순간의 아픔을 기억하려 한다. 내 생이 뾰족하다 하니 나는 그 무엇에 박혀 있으며 어디에 돋아난 가시인가 뭉게구름은 쓰윽 다른 구름을 안고 모르는 척 둥글어지는데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들려오는 눈물은 못인가 가시인가. 고슴도치에게 묻는다.

동문서답

동문서답 나에게는 문신으로 남은 어둡고 긴 골목이 있다. 그 골목 을 드나드는 문장은 혹독한 겨울바람이다. 울음과 눈물을 겨누는 비수 같은 그 골목은 너무 비좁아 쓰러질 수 없는 골이고 하늘을 향해 길어져만 가는 목이다. 아무리 걸어도 우리는 동녘을 만날 수 없고 뒷걸음쳐 서 쪽으로 가도 서역을 만날 수 없다. 달이 이울다 차고 다시 여위는 동안 문신은 뼈로 파고들었다.

칼과 자(尺)― 이순을 지나며

칼과 자(尺) ― 이순을 지나며 칼을 품고 살았네 남을 해칠 생각은 없었지만 잴 수도 없는 사람의 깊이를 질러보거나 쓸데없이 너비를 어림잡아보기도 하였네 차고 이울어지는 것이 달의 이치인데 보름달만 달이라고 우기는 것이 어리석은 자 하나를 휘두르는 꼴이었네 칼이 송곳이 되는 세월을 살다 보니 너와 나의 간격을 가늠할 수 없는 자를 어디다 버릴까 궁리 중이네

수화手話의 밤

수화手話의 밤 인적 끊긴 거리에 신호등이 저 혼자 껌뻑거린다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지친 배처럼 등댓불을 바라보는 마음이 길을 건너지 못한다 저 눈빛이 내게 사랑한다 끝내 말 건네지 못하고 가버린 어머니 같아서 초록 빨강 몇 번이 바뀌어도 성하지 않은 발목에 투덜대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매운 바람에 날려 버린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