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녕, 베이비박스 2019 76

포스트잇

포스트잇 잊지 않으려고 네가 내 가슴에 새겨 둔 말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꿈꾸었다네 어느 하루 어떤 일 사소했으나 네가 주인공이었던 한 문장의 그림자 그러나 기억을 잊으려고 나를 떼어 버린다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네가 듣고 싶은 말 나는 쉼표로 너에게 남겠네 어느 하루 어떤 일 그 행간 사이에 가랑잎처럼 가벼이 내려앉겠네 가을이 오고 또 그 다음에도 가을이 오는 것처럼

오월의 편지

오월의 편지 절뚝이며 느리게 온 봄은 목발의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아쉬운 사람의 얼굴을 닮은 목련은 눈을 감아도 올해도 피고 지고 눈물 떨어진 자리에 자운영 행여 밟을까 먼 산 바라보면 뻐꾸기 울음소리에 푸르게 돋아 오르는 이름이 있어 나는 편지를 쓴다 외로워 별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별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별인지 몰라 더 외로운 사람에게 주소를 몰라도 가닿을 편지를 쓴다 심장에서 타오르는 장미 한 송이 라일락 향기에 묶었으나 그예 남은 그림자 한 장 봄이 지나간 자리에 놓인 꿈이라는 한 짝의 신발 우리는 모두 그 꽃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 번번이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과녁에 닿지 못하고 파랑새가 되어 날아갔는데 이제는 활도 화살도 없이 저 홀로 타면서 뜨거워지지 않는 저녁노을 가까이 몸을 기대어 이곳저곳에서 속삭이는 파랑새 날갯짓을 품는다 놀라워라 햇살이 비껴간 그늘 한 구석에 떼구르르 구르면 지옥에라도 닿을 듯한 비탈길에 놀라워라 내가 쏜 화살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피어 있다니 살은 사라지고 화만 활짝이다니

에필로그

에필로그 마지막 숨을 거두며 어린 병사가 부른 어머니 꽃들이 필 때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열목어가 수백 리 물길을 온몸으로 더듬으며 절망보다 더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 거친 숨을 산란할 때 아득한 절벽 둥지에서 태어나자마자 비오리 어린 새끼가 처음이자 마지막 투신을 마다하지 않을 때 폭죽이 되어 떨어지는 꽃비 저 거센 물살과 수직의 허공에 수를 놓듯 펼쳐진 봄날이 이룩한 장엄한 에필로그 외로워서 걷는 길의 한 장면이다

숲으로 가는 길

숲으로 가는 길 오래전 떠나온 초원을 그리워하는 낙타처럼 먼 숲을 향하여 편지를 쓴다 하늘을 향해 무작정 기도를 올리는 나무들과 그 나무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순정한 목소리를 알아듣게 될 때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면 나는 숲으로 숨어 들어가 그저 먹이에 충실한 채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짐승이 되거나 아니면 마음의 때를 씻고자 하는 수행자가 될 것이다 매일이라는 절벽 앞에서 마른 울음을 삼키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지만 곧 나는 숲으로 갈 것이다 짐승이 되거나 아니면 수행자가 되거나 나는 매일 숲에게 편지를 쓴다

몽유夢遊

몽유夢遊 어떤 꽃은 제 몸을 사루면서 빛을 내밀고 또 어떤 꽃은 제 마음을 지우면서 향을 뿌리듯 허공에 울음을 떨구어놓고 멀리 날아가는 새가 그러하던가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면 웅크린 채 앉아있는 그림자를 고독이라 부를까 세상은 넓은데 갈 곳이 없어 감옥을 등에 지고 어디로 갈까 전생에 유목민이었던 나는 어느 속담을 기억한다 안녕이란 말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는 봄이 지나고 나서야 봄을 그리워하는 몽유夢遊의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