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포스트잇 잊지 않으려고 네가 내 가슴에 새겨 둔 말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꿈꾸었다네 어느 하루 어떤 일 사소했으나 네가 주인공이었던 한 문장의 그림자 그러나 기억을 잊으려고 나를 떼어 버린다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네가 듣고 싶은 말 나는 쉼표로 너에게 남겠네 어느 하루 어떤 일 그 행간 사이에 가랑잎처럼 가벼이 내려앉겠네 가을이 오고 또 그 다음에도 가을이 오는 것처럼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2.01.22
감자꽃 감자꽃 너는 감자꽃이야 옆구리를 휘익 스치며 지나간 그 말 오십 년 뒤에 뜻을 알아듣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은밀히 땅속을 더듬던 손이 바람난 머리채 쥐어뜯듯이 내던져 버린 감자꽃 나도 감자꽃처럼 살았다는 걸 뿔 대신 흰 머리칼 수그려 오르는 나이에 꽃말을 배운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2.01.18
함박꽃 함박꽃 아침에 아내는 국수를 삶았다 이가 아픈 남편은 아무 말 안 했다 후루룩 국수 가락이 목으로 넘어가는데 손가락에 관절염이 온 아내는 연신 헛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은 속으로 많이 늙었네 목구멍이 간질거릴 때 늙은 아내가 활짝 꽃 피었다 함박꽃이 웃었다 많이 늙었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2.01.11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꽃에게 화를 내나 예쁘다고 밉다고 함부로 꺾고 제멋대로 버리나 내가 뭐라고 바람을 향해 소리치나 잡히지 않는다고 숨결이 보이지 않는다고 못난 손을 함부로 내지르나 내가 뭐라고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2.01.07
오월의 편지 오월의 편지 절뚝이며 느리게 온 봄은 목발의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아쉬운 사람의 얼굴을 닮은 목련은 눈을 감아도 올해도 피고 지고 눈물 떨어진 자리에 자운영 행여 밟을까 먼 산 바라보면 뻐꾸기 울음소리에 푸르게 돋아 오르는 이름이 있어 나는 편지를 쓴다 외로워 별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별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별인지 몰라 더 외로운 사람에게 주소를 몰라도 가닿을 편지를 쓴다 심장에서 타오르는 장미 한 송이 라일락 향기에 묶었으나 그예 남은 그림자 한 장 봄이 지나간 자리에 놓인 꿈이라는 한 짝의 신발 우리는 모두 그 꽃말을 기억하고 있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2.01.04
벚꽃 앤딩 벚꽃 앤딩 열두 살 손녀가 삼십 년 뒤엔 뭘 하고 있을까 헤아려 보고 있는 동안 벚꽃 잎이 와르르 웃음인지 울음인지 흩날리고 있었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2.30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 번번이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과녁에 닿지 못하고 파랑새가 되어 날아갔는데 이제는 활도 화살도 없이 저 홀로 타면서 뜨거워지지 않는 저녁노을 가까이 몸을 기대어 이곳저곳에서 속삭이는 파랑새 날갯짓을 품는다 놀라워라 햇살이 비껴간 그늘 한 구석에 떼구르르 구르면 지옥에라도 닿을 듯한 비탈길에 놀라워라 내가 쏜 화살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피어 있다니 살은 사라지고 화만 활짝이다니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2.22
에필로그 에필로그 마지막 숨을 거두며 어린 병사가 부른 어머니 꽃들이 필 때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열목어가 수백 리 물길을 온몸으로 더듬으며 절망보다 더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 거친 숨을 산란할 때 아득한 절벽 둥지에서 태어나자마자 비오리 어린 새끼가 처음이자 마지막 투신을 마다하지 않을 때 폭죽이 되어 떨어지는 꽃비 저 거센 물살과 수직의 허공에 수를 놓듯 펼쳐진 봄날이 이룩한 장엄한 에필로그 외로워서 걷는 길의 한 장면이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2.14
숲으로 가는 길 숲으로 가는 길 오래전 떠나온 초원을 그리워하는 낙타처럼 먼 숲을 향하여 편지를 쓴다 하늘을 향해 무작정 기도를 올리는 나무들과 그 나무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순정한 목소리를 알아듣게 될 때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면 나는 숲으로 숨어 들어가 그저 먹이에 충실한 채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짐승이 되거나 아니면 마음의 때를 씻고자 하는 수행자가 될 것이다 매일이라는 절벽 앞에서 마른 울음을 삼키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지만 곧 나는 숲으로 갈 것이다 짐승이 되거나 아니면 수행자가 되거나 나는 매일 숲에게 편지를 쓴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2.09
몽유夢遊 몽유夢遊 어떤 꽃은 제 몸을 사루면서 빛을 내밀고 또 어떤 꽃은 제 마음을 지우면서 향을 뿌리듯 허공에 울음을 떨구어놓고 멀리 날아가는 새가 그러하던가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면 웅크린 채 앉아있는 그림자를 고독이라 부를까 세상은 넓은데 갈 곳이 없어 감옥을 등에 지고 어디로 갈까 전생에 유목민이었던 나는 어느 속담을 기억한다 안녕이란 말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는 봄이 지나고 나서야 봄을 그리워하는 몽유夢遊의 날들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2.06
제1부 제1부 몽유 013 숲으로 가는 길 014 에필로그 016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 017 꽃처럼 018 벚꽃엔딩 019 오월의 편지 020 내가 뭐라고 021 함박꽃 022 감자꽃 023 포스트잇 024 영웅을 기다리다 026 긴 편지 2 028 겨울우화 029 꿈길 ―눈사람에게 030 눈길 032 예뻐서 슬픈 033 십이월 0434 동백 후기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2.06
시인의 말 시인의 말 나에게 시는 세상으로 날아가는 파랑새였지만 결국은 때 묻고 허 물만 남아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돌팔매였다. 순간순간 내게 달려들 던 괴물의 정체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 시詩와 인人의 불화를 또 부끄 럽게 내놓는다. 2019년 가을, 울타리가 없는 집에서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1.11.23
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 < 나호열 시집 『안녕, 베이비박스』 해설> 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시인이 시집의 해설을 부탁하면서 내게 마지막 시집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시들을 읽으면서 ‘마지막’이라는 이 슬프고도 단호한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 안녕, 베이비박스 2019 202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