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녕, 베이비박스 2019 76

목발 7

목발 7 온몸을 지탱하며 수고로운 걸음으로 땅을 딛던 발을 손이 씻기고 있다 굳은살 박히고 신발 속에 갇혀 냄새 스멀거리는 발을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공손해지는 손 말발굽 같은 목발을 대야에 담글 때 함부로 잊고 있었던 이 세상의 목발들이 떠오른다 가까이 다가왔으나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고독처럼 지금껏 보지 못했던 꽃이 눈물에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봄밤

목발 6

목발 6 목발을 짚고 걷는다는 것은 땅을 믿는다는 것이다 무른 땅을 만나면 목발은 기우뚱거리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휘청거린다 몸은 목발에 기대고 목발 이외에는 그 무엇도 잡을 수 없는 손이 발이 되는 순간 뛸 수 없어 가끔 놓치는 버스 올라야 할 계단이 높고 많아 주저앉아 있을 때 앉은뱅이 민들레가 그래도 봄은 온다고 시멘트 틈 사이로 말을 건넨다

목발 3

목발 3 바람의 속내를 모르고 바람의 흉내를 내며 빠르게 멀리 함부로 쏜살같이 달려가다 바람에 걸려 넘어졌다 한 걸음 내딛는 일 절벽을 뛰어넘고 깊은 강 건너가는 일임을 새싹 돋듯이 오래 감춰뒀던 비밀의 말씀처럼 몸에서 스며 오른 목발이 일러준다 어떤 웃음의 끝 소절에 맺힌 쉼표 그 짧은 휴지 속에 무너져 내리던 바람의 뼈 내 몸에서 돋아나온 꿈의 날개가 겨드랑이 아래로 땅을 딛는 목발이라고 직립의 첫날을 내게 돌려준다

목발 1

목발 1 자유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배웠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갈구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깨우쳤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말없이 행하는 사물들을 업신여기고 값어치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속박과 결탁하면서 수인에게 던져주는 메마른 빵을 굶주림과 바꿨다 발목이 부러지고 나서 내게 온 새로운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그런데 친구야 네가 나를 의지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너의 온 힘을 전해 준다는 것이지 언젠가 너에게 버려질 날이 오겠지만 그날이 기쁜 날이지 그날까지 날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 아, 절뚝거리는 속박과 함께 비틀거리는 목발

십이월

십이월 뉘엿뉘엿 저물어가면서 느리게 닿았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 여린 풀과 꽃과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자고 곧 땅거미가 지면 이 세상의 모든 집을 향하여 돌아가는 때 혹 길을 잃으면 구슬처럼 돋아나는 별들 오래 머무르지 않는 구름들 기울어진 달이 나뭇가지에 힘겹게 걸려 있을 때 아직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는 눈이 내게 있다고 그 눈에 아직도 남아있는 한 방울의 눈물이 모여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고 그렇게 뉘엿뉘엿 목화이불 한 채 내려주시는 하늘을 우러르는 달

꿈길

꿈길 ― 눈사람에게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어갑니다 당신이 일러준 그 길은 겨울밤의 눈길입니다 버선발로 부풀어 오르는 달이 서산으로 지기 전까지 걸어오라 하셨습니다 봄날의 수줍은 꽃 푸르게 이파리를 흔들던 젊은 날의 열기 붉게 물들던 세월을 지나 아, 저기 길의 끝에 당신이 서 있네요 이미 산촌의 밤은 깊어 이미 난로는 발그스름 낯이 붉어졌는데 흘러간 노래는 몇 번을 돌고 돌았는데 서산 넘어가던 보름달이 궁금을 견디다 못해 창안으로 눈을 슬며시 밀어 넣었는데 당신은 차갑게 순결한 눈사람 안으면 스르르 녹아버릴까 참나무 장작을 깊숙이 밀어 넣으며 새 아침을 향해 돌아서는 길 그래도 불씨 하나는 가슴에 담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먼 길을 눈은 또 하염없이 내리고

겨울 우화

겨울 우화 동지 서릿발이 하늘을 베이는데 여기서 뻑 저기서 꾹 뻐꾸기가 운다 남의 둥지 안에 알을 뉘여놓고 어미야 어미 여기 있어 여름 지나면 새끼 데리고 가야하는데 북풍 몰아치는데 여기서 뻐꾹 저기서 뻐꾹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네 저기 두부장수 트럭이 틀어놓은 확성기 속에서 한 마리 두 마리 날아오르는 뻐꾸기 눈이 내린다

긴 편지 2

긴 편지 2 거칠고 비탈진 땅밖에 남지 않았다 눕지 못하고 바늘로 곧추서야 살 수 있는 사나운 바람이 채찍을 휘두르는 세상 밖에 말뚝을 박고 발걸음을 멈추었으니 방랑이었다면 수행의 게으름 유배라면 휴식의 기쁨을 주어가 사라진 향일성의 동사動辭를 뼈에 새기고 한 번에 부싯돌을 그어주기만 하면 분신의 탑으로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살아온 날들만큼의 수많은 내가 눈발로 흩날리듯 그림자로 어두워질 때 천 리 밖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백 년 후의 일이다 자작나무!

영웅을 기다리다

영웅을 기다리다 신성리 갈대밭에 가 보아라 코끝을 에이는 강바람 한 겨울 하늘을 꿰뚫는 안행雁行의 몸짓으로 둑 위에 올라서면 오직 한 사람으로 보이는 군중의 함성을 듣게 되리라 하나로는 어림없어 둘이어도 너무 힘들어 다들 모여 무리를 이뤄야 목숨을 지킬 수 있어 하구로 밀려들어오는 적들이 어디 한두 해 일인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세우고 눈 부릅떠야해 칼이 없어도 창이 없어도 우리라는 튼튼한 울타리 우리라는 마음이 있어 쓰러질지언정 무릎 꺾지 않는다 신성리 겨울 갈대밭에 가 보아라 누구 이름 불러도 다 같이 대답하는 흔들리며 서로의 그림자로 몸을 묶은 거대하지만 고독한 영웅을 만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