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눈물이 시킨 일 2011

거꾸로 읽는 경전, 문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2. 4. 09:49

 

 

 

해설

거꾸로 읽는 경전, 문장

조영미(시인‧ 문학평론가)

 

 

▪꽃에서 태어난 말[言]

 

우리는 모두 꽃의 문을 열고 이 세상에 나온다.

당신은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어머니의 몸을 빌어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얻게 된 당신이 주위의 수많은 대상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질 때, 당신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눈높이로 말을 건넸다. 당신의 옹알이를 사람의 언어로 알아듣고 그 말에 대꾸해주던 어머니의 첫말, 그 말을 기억하는가. 또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의 몸으로 보고, 듣고, 먹고, 냄새 맡았던 그 수많은 경험을 기억해낼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꽃문을 열고 나와 당신이 터트렸을 첫울음, 아마도 당신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옹알이가 언어의 기호로 바뀌는 순간, 당신은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을 찾아 끊임없이 세상과 대면해 왔을 터다.

많은 시간이 흘러 당신은 당신의 눈높이로 당신의 아이와 눈을 맞추고, 당신의 어머니가 했었을 첫말을 당신의 아이에게 건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과 대면하며 또 다른 당신의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첫말은 그래서 나이가 들고나서야 알게 된다. 아니, 깨닫게 된다. 꽃에서 태어난 말[言]이 당신의 미래(어머니)이며 당신의 과거(아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꽃에서 태어나서 가슴에서 죽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가르치지만

그래서 침묵을 배우는 일은 더디고 힘든 일

――「파문」 일부

 

“꽃에서 태어나서 가슴에서 죽는” 우리네 삶은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 다시 살아진다. 육체의 현존은 유한하므로 영원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과 더불어 영원할 수 있으려면 당신의 기억 속에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대상과의 관계맺음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알다시피 관계맺음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쌍방의 신뢰와 사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무조건적인 희생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래서 섣부르게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배우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흔히 말[言]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입 밖으로 던져진 순간 그것은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독과 약, 또는 독약」) 그러므로 ‘독+약’의 중량을 제대로 가늠해야 말은 비로소 제 말[言] 뜻이 된다. “그래서 침묵을 배우는 일은 더디고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다.

[言]과 침묵 사이, 우리는 그 행간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를 나호열의 이번 시집에서 읽어낼 수 있다. 주지하는바 나호열의 시를 관통하는 핵심 기저는 ‘사랑’에 있다. 그의 시집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그리움이며 외로움, 슬픔 등은 말하기와 침묵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눈물이 시킨 일?은 말과 침묵 사이의 ‘사랑’을 어떻게 읽어 가느냐에 따라 감동의 진폭이 달라진다.

 

 

▪눈물이 시킨 일, 경전의 말

 

[言]하는 것과 침묵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시에서 여백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사이’는 시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 이쪽과 저쪽, 처음과 끝의 사이 등등 나호열의 시적 화자는 늘 ‘~사이’의 경계선 안팎을 아우르고 침묵의 말없음을 괄호로 묶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짧은 해를 기억하지 못 했”(「무지개는 밤에 뜨지 않는다」)다거나 “한 때는 불이었고 꽃이었던” “불꽃”(「불꽃」)이거나 “벌 준 사람은 없는데/ 스스로 벌 서는// 추억의 힘!”(「추억하는 소」)이라거나 “제 몸을 묶은 나무”(「말의 습성」), 그 외의 수 편의 시적 화자는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네 삶이 그렇다. 나의 중심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대상의 실체는 다르게 인식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중도中道를 설파하고 있지 않은가.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눈물이 시킨 일」 전문

 

경전經典은 우리네 삶의 변하지 않는 법도度法와 양식樣式을 아우르는 말이다.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우리는 경전에 쓰인 성현聖賢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런데 경전에 씌어진 수많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생활에서 그것들을 실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순간 순간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 알아차림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엔 무엇으로부터 해탈해야 하는지를 경전은 말하고, 말한다. 그 말은 “경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며 모든 것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공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매순간 지속되는 미완성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눈물이 시킨 일?은 완성과 미완성의 과정에 있는 하나의 실천행위인 셈이다.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 화자에게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은 삶의 고행이다. 주목할 것은 시의 제목으로 쓰인 ‘눈물’과 화자가 말하는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사랑과 눈물 사이에는 경전을 거꾸로 읽는 행위가 있고, 이 행위는 “꿈을 세우”고 “허물어 버리는” 일로 모아진다. 그렇다면 ‘사랑’과 ‘눈물’은 왜 이러한 “일”을 시키는 것일까.

 

말하자면 무턱대고 우리가 세상에 내린 것처럼

정류장에서 한참을 걷다보니 입산을 결심했던 것

길에는 바름과 그름이 없으므로

산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따라온 공동묘지는

덧없는 시간의 비석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 산에는 절이 없었다

바다가 한 눈에 보이고

돌아서면 산이 가로막았던 곳

나는 발목을 묻었다

고요히 절간이 되어가기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용케 허리가 휘지 않은 것은 저 채찍질

산과 바다 바람이 밤낮으로 나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새가 날아와서 잠시 머물렀으나 집은 아니라 했고

산꾼들도 고단한 등허리를 내밀지 않았다

독야청청은 내가 바란 바는 아니었으나

맞은 매 만큼 독이 올랐다

그대들은 모른다

날름거리는 혀가 겨냥하는 푸른 하늘

똬리를 튼 채로 허물을 벗으려 안간힘 쓰는

서서 우는 뱀의 꿈을 해독하지 못 한다

속이 텅 빈

저 소나무

――「저 소나무―제주도 기행‧7」 전문

 

이 세상에 꽃문을 열고 나온 것은 나의 순수의지가 아니다. “말하자면 무턱대고 우리가 세상에 내린 것”이다. “길에는 바름과 그름이 없”다고 화자는 말하지만, 기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분법적 사고가 너무나도 팽배해 있다. “덧없는 시간의 비석에 불과한” 우리네 삶은 세상 살아내기라는 혹독한 “채찍질”을 편리하게 견뎌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이것과 저것, 이쪽과 저쪽, 처음과 끝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세상은 살아가기가 수월하다. 화자의 말처럼, “먹고 먹히되/ 승자와 패자가 없는 곳/ 서로가 서로의 양식으로/ 몸을 내어주는 곳/ 값싼 동정의 눈물이 조금도 용납되지 않는 곳”이란 “인화되지 않는 꿈의 이면”(「세렝게티의 추억」)에 불과하다. 반드시 먹어야 하고, 승자가 되어야 하며 나의 양식은 나를 위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세상에서 “인화되지 않은 꿈”과 “서서 우는 뱀의 꿈”은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일이다. 즉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뽑히기를 평생 바랬으나”, “수많은 군중 속 하나에 불과한 것이”(「고사리 꺾기」) 지금의 화자이다.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고.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화자는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여지지 않는 시간의 문신”(「참, 멀다」)을 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독야청청은 내가 바란 바는 아니”였지만, 그로 인해 “맞은 매 만큼 독이 올랐”었음을. “속이 텅 빈/ 저 소나무”의 몸을 통해 “날름거리는 혀가 겨냥하는 푸른 하늘”이 무엇인지, “서서 우는 뱀의 꿈”이 무엇인지, 화자는 “똬리를 튼 채로 허물을 벗으려 안간힘” 써왔던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천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하루의 몇 시간쯤 천사가 될 수는 있는 일

꿈이 깨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예 꿈을 꾸지 않는 일

(…중략…)

달리는 시간보다

멈춰 서는 시간이 더 많은

택시 기사 윤병현 씨와

때로는 친구가 되고

때로는 손님이 되면서

당신도 꽃이 될 수 있다고

꿈을 가르쳐 준다

 

잠깐이라도 천사가 되고 싶다

――「꽃들은 달린다」 일부

 

꿈은, 꿈을 꾸는 자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꿈이 깨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꿈을 꾸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꿈의 크기나 질량을 잴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꿈일지라도 나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택시 기사 윤병현 씨와” “친구가 되고” “때로는 손님이 되면서” 화자는 “당신도 꽃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천사가 되고 싶”다는 화자의 꿈을 말한다. 종교적 신화에서 천사는 인간 세계에 파견된 중재자이다.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바람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가 바로 천사이다.

시인이 그렇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현 세상에서의 천사는 다름 아닌 시인이다. 화자는 “사람의 몸으로 천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하루의 몇 시간쯤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시를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시인은 “전지전능한 육백만 불의 사내도” 아니며 “스파이더맨도 아니”다. 그렇다고 “쾌걸 조로처럼 멋있는 칼솜씨도 없다”. 그저 “혼자 밥 먹고 뒷길로만 다”니는 “어쩔 수 없이 늙”(「슈퍼맨」)어 가는, “이 나이에/ 고아가 된다는 것이 문득문득/ 무서워”(「지도책」)지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꿈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꿈을 세우”고 “허물어 버리는” 시 쓰기이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과 ‘눈물’이 화자에게 시킨 거룩한 일이다.

 

 

▪경전과 문장 사이

 

나호열의 ‘사랑’과 ‘눈물’의 시 쓰기는 시인의 지나온 생을 다시 더듬어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말(시)=사람(문장)=경전’임을 말하고자 한다. 경전이란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경전이 사람을 만들어가고 이는 계속되는 순환을 통해 참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사랑’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가기 마련이다.

 

강가에는 왜 갔노

죽을라꼬 갔드나 니 없는 하루하루가 지옥이더라

물 속으로 들어가지 마래이

니 없으니 내사 살 맛 안 난다

죽지 마래이

내 아프로 잘 할끼다 증말이다 아프로 아프로

니 맘 안 아프게 할끼다

퍼뜩 오니라 사랑한데이

――「울퉁불퉁 씨」 일부

 

“쌀 한 가마를 두 손으로 번쩍 드는/ 울퉁불퉁 씨”의 “이두박근 삼두박근”은 “울음 보따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며 화자는 말한다. “어머니, 이제 돌아가셔야 해요/ 날마다 아버지께 어머니 빨리 데려가시라고 기도해요/ 어머니도 아픈 것은 싫잖아요/ 이제는 나을 희망도 없는데/ 어머니 그만 돌아가셔야지요”(「풍경」)라고. 그 풍경은 “눈물 걸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픔이다. 아니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이다. 화자는 “퍼뜩 오니라 사랑한데이”라는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있으며, “내 몸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새살처럼 돋아”(「종점의 추억」) 오르는 이유도 알고 있다. 그래서 “걸레가 없다면/ 지난밤의 얼룩과 더러운 눈물을/ 누가 지울까/ 그리하여 이 말은 욕이 아니다// 걸레 같은 놈!”(「거룩한 환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듣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말

(…중략…)

그 말이 그립다

살아있다고 파닥거리는

날갯짓

영혼 속에 손을 넣으면

아득하게 물컹거리는

그 말

그 말의 체온

――「사랑해요」 일부

 

화자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은 “살아있다고 파닥거리는/ 날갯짓” 즉, ‘사랑해요’이다. 그것이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든, 이성간의 사랑이든 사랑이라는 말에는 수만 가지의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은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화자는 “세 살배기” 손녀딸이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면서 “말 속에 숨어있는 슬픔”을 걱정하며 “말문을 닫”고 “문장을 지운다”.(「말 배우기」) “말의 체온”을 느끼려면 “슬픔도 늙어”가는 사랑의 힘임을 알아야 한다. “평생을 헤매다/ 배운 말”이 “뚝!”(「사이」) 하고, 살아 파닥거리는 말로 전해져야 한다. 그랬을 때 “수많은 주석을/ 눈물 대신 달아 놓”은 「나무」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길은 스스로 몸을 버”릴(「불의 산」) 수 있다.

 

긴 문장 하나가 산을 오른다

꼬리에 꼬리를 문 맹목의 날들처럼

검은 상복의 일개미들의 행렬처럼

발자국들 눌리고 덮이며 수직으로 서려는 탑인 듯

길은 꿈틀거린다

고독한 여행자 같은 가을이 느릿느릿

산의 몸을 더듬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숲을 지나서

이윽고 다다르는 불의 산

긴 문장은 품사를 버리고 하늘을 우러른다

사랑을 잃은 척박한 가슴이 저럴까

막 날개가 돋은 새들이 비상하기 전에 내지르는 으악 소리가

추억을 태울 때 드러나는 하얀 불길 같다

쉬익 쉬익 능선을 타고 달려온 말 무리들

어둠별을 닮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씨앗을 날리기 위하여

기꺼이 바람맞으러 왔다

혹은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길은 스스로 몸을 버렸다

――「불의 산―민둥산 억새」 전문

 

「불의 산」의 화자가 바라보는 것은 가을산을 타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어둠별을 닮은 사람들”이 날리는 “씨앗”을 보며 화자는 “긴 문장”의 “척박한 가슴”을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을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나호열만의 독법인 듯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책을 읽듯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시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하나의 긴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은 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러므로 시집 ?눈물이 시킨 일?은 ‘말(시)=사람(문장)=경전’에 관한 시이며 “햇빛에 순종하는 버릇을 잊어본 적 없는”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또 하나의 나”(「싹에 대하여」)를 위한 시집이다. 또한 “내일을 꿈꿔 본 적이 없”는(「K」) 사람들을 위한 시집이기도 하다. 그러니 시집 ?눈물이 시킨 일?을 거꾸로 읽어보면 어떨까. 거꾸로 읽다보면 우리도 시인이 읽어낸 문장의 생애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눈물이 시킨 일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0) 2014.02.02
나무   (0) 2014.02.01
묵념   (0) 2014.01.31
허물  (0) 2014.01.28
느리게   (0) 201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