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119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꽃 피는 소리는 안들려도 만리 밖 꽃 지는 소리는 왜 그리 서운한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닿는 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한 시간 걸리는 다정한 초록버스는 기다려도 오지 않네 환청으로 들리는 일일구 귀 어두운 친구가 어디 아프냐고 묻네 아냐아냐 일일일구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초록버스가 지나가네
봄날을 싣고 휑하니 지나가네
저 앞에 내가 달려가네
십 년 후의 내가 기우뚱 보이네
- 계간 《시인정신》 2023년 여름호
새싹을 노래함
눈이 있는가
굳센 팔이 있는가
어디 힘차게 디딜 다리 힘이 있는가
견고한 땅을 밀어내며
얼굴을 내미는 새싹은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으로 말미암아 땅의 틈새가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침묵을 조금씩 들어올려
이윽고 땅의 틈새로 하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눈먼 채로
벙어리인 채로
혼자 커가는 그리움처럼
-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2004
어느 봄날에 일어난 일
이파리 하나 달리지 않은
나뭇가지가
툭 하고 부러졌다
무엇인가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 목 부러진다 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2004
마네킹의 봄
이곳에 온 지 오래되었다
누가 나를 옮겨놓았는지
이 세상에
쇼윈도우 안에
오른팔은 우아하게 펼쳐 가는 손가락 마디에 구름이 잡히고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처럼
왼팔은 약간 기운 채로 힘겨워
그러나 박제된 웃음은 변함이 없어
흘러가는 저 수상한 강물
쌍심지를 켠 차량들과
어둠에 길들여진 눈빛
그 사이를 면벽하듯 바라본다
누군가 옷을 벗길 때
나는 전율한다
누군가 또 다른 기성품의 옷을 입힐 때
슬픔을 참을 수 없다
침을 삼키며 저 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
나의 알몸을 밀쳐내며
그 위에 덧칠되는 액세서리를 갈망하는 사람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2004
벚꽃 축제
나 생화야
생화야
살아 있어
잘 봐 떨어지고 있잖아
산화하면서
더 눈부신
더 빛이 나는
벚꽃나무 아래서
나는 불임의 꿈을 꾼다
-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2004
꽃
꽃이 늙다니!
그런 일이
조화 속에 맗없이
숨죽이고 있다니!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봄, 마곡
이른 봄 마곡에 가서
마곡의 저녁을 만났다
아직 몽우리조차 움트지 못한 나무들과
칼을 입에 물고 있는 개울물
아직 몸을 곧게 펴지 못한 길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목을 매달아야
영혼을 던져야
맑은 솔바람을 내는 종이여
한 번 구비치고
두 번 휘돌아 돌고
끊어질 듯 이어지던
이른 봄 그 작은 신음들
왜 온몸에 소름처럼 돋는 것인지
마곡의 저녁은
왜 눈물 한 방울 만하게
세상을 비추는 것인지
아득하다, 그 봄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春麻谷 秋甲寺라 하였다. 유구에서 새로 뚫린 고속도로 때문에 길을 놓치고 저녁 어스름이 되어서야 마곡에 닿았다. 나이는 연하이지만 늘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고고학자 김희찬 교수와 불교문화에 조예가 깊은 김용은 박사와 함께 四物을 보았다. 大鐘의 둔중한 울림이 절 아래 마을까지 따라오던 어느 해, 너무 일러 산수유도 왕벚꽃도 보지 못하였던 어느 봄, 그리고 저녁의 기억이다.
매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사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 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제비꽃이 보고 싶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春香
목울대를 차고 오르는
이 초록빛 눈물을 어쩔 수 없다
말의 독이 가득 퍼진
침묵은 평생 읽어야할 편지
햇살처럼 새 한 마리
높은 산을 넘어 간다
-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봄비
알몸으로 오는 이여
맨발로 달려오는 이여
굳게 닫힌 문고리를 가만 만져보고 돌아가는 이여
돌아가기 아쉬워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여
발자국 소리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면
문득
뒤돌아 초록웃음을 보여주는 이여
- 시집 《안녕 베이비박스》 2019
봄
어쩔 수 없다
눌러도 눌러도 돋아오르는
휘영청
수양버들의 저 연둣빛 회초리
바람맞은 저리마다
까르르
웃음소리
- 시집 《안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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