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03

한 걸음 더디게

한 걸음 더디게 늘 그랬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걸음 더디게 꽃 진 자리에 당도하여 섬광이 사라진 가지를 잡아보거나 그리하여 다음 해의 부질없는 약속을 중얼거렸다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일 때 저 바람도 이곳에 닿기 전까지 시간의 육탈을 견디며 달려온 누구였음을 안타까운 포옹으로 허공에 그려보는 것이었다 계간 시와 산문 가을호

노고단 가는 길

노고단 가는 길 빠른 길 일부러 놓치고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눈길 한번 주지않고 흘러가는 냇물이 마음을 씻어주고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씻어주고 비탈진 돌길 오르다 언뜻보이는 하늘 한자락 잡아 흐르는 땀을 씻었다 花蛇화사 한 마리가 느긋하게 몸과 마음 사이를 가로질러가자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소름이 돋았다 노고단은 몇 송이 붉은 원추리를 보여주었지만 아랫녘 세상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구름 타고 놀라고 꿈 깨면 아득하게 멀어지라고 빠른 길 걸어왔던 몇몇은 피기도 전에 져버렸는지 화사가 이번엔 마음에서 몸으로 가로질러 갔다.

나한 42-어떤 하루

나한 42 -어떤 하루 적막을 지우려고 빗자루를 든다 추락한 햇볕의 발자국 허공을 휘저으며 날아가던 새가 무거워 던져놓고 간 그림자 맴만 돌다가 입을 봉한 말들이 한 목소리로 내게 덤벼든다 갈대로 만든 빗자루가 휘청휘청 정처 없는 생각을 쓸어낼 때마다 주문 呪文이 되는 쓸쓸은 사실은 빗자루가 내뱉는 목맨 쉰 소리일 뿐인데 불교문예 2023 여름호

나한 39-곰 잡으러 가자

나한 39 -곰 잡으러 가자 문을 열고 나가니 아직 퇴각하지 못한 구석기 이전의 어둠이 내 앞에 서 있다 막막한 아침의 배꼽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몽환 속에 들어설 때 나는 맛이 없는 외로운 짐승일 뿐 따먹어야 할 열매는 이미 흙으로 돌아가고 투박한 돌도끼 대신 휘청거리는 볼펜 한 자루 쥐고 두리번거리는 화면의 미망에 망연하다 빙하기가 다시 오려는지 저 멀리서 쿵쿵거리며 울리는 발자국 소리 나는 거역할 수 없는 거인을 공손히 기다린다 희망은 공포를 가득 안은 막차 자꾸 수만 년 전 동굴 속으로 몸을 구겨넣는다 이럴 때 미련한 곰은 위대한 신화의 주인공이다 불교문예 2023년 여름호

봄날, 119

봄날, 119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꽃 피는 소리는 안들려도 만리 밖 꽃 지는 소리는 왜 그리 서운한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닿는 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한 시간 걸리는 다정한 초록버스는 기다려도 오지 않네 환청으로 들리는 일일구 귀 어두운 친구가 어디 아프냐고 묻네 아냐아냐 일일일구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초록버스가 지나가네 봄날을 싣고 휑하니 지나가네 저 앞에 내가 달려가네 십 년 후의 내가 기우뚱 보이네 계간 시인정신 2023 여름호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지?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지? 신발 속에 돌이 들어갔는지 움직일때마다 발이 아프다 바위가 아닌 손톱보다 작은 돌부스러기가 온몸을 아프게 한다 가던 길 멈추고 신발 속을 털어내면 그만인데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낡은 신발 털어도 소용 없는 미련한 깨달음 때문에 절뚝!한걸음 또 내딛는다 * 수정 중인 시이므로 복사는 삼가해 주시길^^

나한 56-백일홍 편지

나한 56 -백일홍 편지 길섶 모퉁이에 핀 백일홍을 보았네 지나가다 흠칫 되돌아보니 이제 막 붉어지려는지 하얗게 흔들거리네 아니 백일을 붉다가 웃음을 지워버리는 중인지도 모르지 누구를 기다리나 앉은 듯 서 있는 듯 향기는 없어도 나비는 찾아오고 여름 한낮 뙤약볕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려나 핏줄이면서 남인 누이의 얼굴이 나를 미워하다던 그 말이 이제는 서럽지 않네 한 송이 백일홍 편지를 읽다가 가던 길을 잊었네 문학과 창작 2023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