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분류 전체보기 6374

봉선사 종소리에 답함

오래 전부터 탑을 보러다니다가 곁들여 사찰의 종소리에 맛을 들였다. 큰 절이라고 모두 범종 소리가 아름답지는 않다. 그 중에서 공주 마곡사와 남양주 봉선사 종소리는 그윽하고 맑다. 특히 봉선사 범종은 불타버린 양양 낙산사 동종과 같은 시기에 같은 스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내 생각) 의미가 깊다. 그런데 봉선사 동종은 오래된 탓에 타종이 어려워 새로 주조 되었다. (봉선사 종루는 그래서 2층 구조이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 무렵 듣는 봉선사 종소리는 내게는 위로의 말씀과도 같다 김재진 시인과의 인연으로 김나은 시낭송가가 영상으로 꾸며 주셨다. 2024년 첫 선물을 받았다 봉선사 종소리에 답함 봄밤 아득하게 피어나 홀로 얼굴 붉히는 꽃처럼/ 여름 한낮 울컥 울음 쏟아내고 가는 소나기처럼/ 가을이 ..

물가에 서 있는 옛 ‘훈장님’이 심어 키운 함양 목현리 구송

[나무편지] 물가에 서 있는 옛 ‘훈장님’이 심어 키운 함양 목현리 구송 ★ 1,213번째 《나무편지》 ★ 2024년 새해 첫 주, 잘 보내셨지요.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먼저 지난 《나무편지》에서 잘못 적은 내용부터 고치고 시작하겠습니다. 새해 첫 편지인 지난 주 《나무편지》는 별다른 내용 없이 ‘새해 인사’만으로 짧게 채웠습니다. 일단 초고를 만들고, 사진을 넣어 html 코딩을 마친 뒤에 평소처럼 한번 더 살펴보니, 고쳐야 할 문장과 오탈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시 살펴보면서 잘 고치기는 했습니다. 그래놓고는 홈페이지 솔숲닷컴에는 고친 파일을 올렸는데, 아뿔싸! 《나무편지》를 발송하는 메일링시스템에는 고치기 전 파일을 업로드하고 말았습니다. 문장이 엉망이었던 건 둘째 치고, 《나무편지》를 오래 이어..

[46]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6]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2.30. 03:00 강운구, 조세희, 경기 가평, 1993. “사람들 얼굴 위로 빛과 그늘이 부단히 교차한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강운구) 사람과 때가 만나 시절의 운이 생긴다. 때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하고 떠나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때에 따라 모임과 흩어짐이 달라진다. 나의 때와 누군가의 때가 엮이고 섞이면서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렇게 사람도 흘러간다. 강운구(1941~ )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자존심이다. 꼿꼿하고 빈틈없는 성품에 두꺼운 애호가층과 열렬한 추종자들을 거느린 사진계의 ‘선생님’이다. 그의 ..

가을 편지

가을 편지 당신의 뜨락에 이름 모를 풀꽃 찾아 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멀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어느 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지요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 죽인 발자국과 까맣게 타버린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그냥 상처는 웃는다라고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만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러브레터

러브레터 단편소설 당선작 권희진 조선일보 입력 2024.01.01. 03:00업데이트 2024.01.01. 08:41 결국 여기로 왔다.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으나 막상 여기 16층에 와서는 마땅히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가만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그걸 집 밖에서 해본 적은 없다. 집이 아닌 곳에서 정지해 있으면 사람에 치이고 차에 치이고 무언가에 자꾸 치이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 이동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 16층에는 흐름이 없다. 바람이 있고 소음이 있지만 딱히 흐름이랄 것은 없다. 낮 시간대에는 사람들이 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사적인 전화를 하다 가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한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가 목적을 다하면 다시..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

[172] 건상유족(褰裳濡足)

[정민의 세설신어] [172] 건상유족(褰裳濡足)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08.21. 23:31업데이트 2012.08.28. 16:37 굴원의 『초사(楚辭)』 「사미인(思美人)」에 나오는 한 구절. “벽라 넝쿨 걷어내려 해도 발꿈치 들어 나무 오르기 귀찮고, 연꽃으로 중매를 삼고 싶지만 치마 걷어 발 적시고 싶지는 않네.(令薜荔以爲理兮,憚擧趾而緣木. 因芙蓉而爲媒兮,憚褰裳而濡足.” 지저분한 벽라 넝쿨을 말끔히 걷어내고 싶지만, 나무를 타고 오를 일이 엄두가 안 난다. 연꽃을 바쳐 사랑하는 여인의 환심을 사고 싶은데, 옷을 걷고 발을 적셔가며 물에 들어가기는 싫다. 『후한서(後漢書)』「최인전(崔駰傳)」에도 이런 말이 있다. “일이 생기면 치마를 걷어 발을 적시고, 관이 걸려있어도 돌아보지 ..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막차와 첫 차 사이 4시간 쓱싹쓱싹…신도림역 우렁각시들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중앙선데이 입력 2023.12.30 00:41 업데이트 2023.12.30 23:0 김홍준 기자 신수민 기자 구독 SPECIAL REPORT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신도림역이 다시 태어났다. 지난 15일 막차가 들어온 직후 시작한 물청소 작업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오전 3시10분 경에 끝났다. 유형순씨가 낮고 빠른 자세로 밀대질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여기서 잠자는 차가 들어오면 출동해야죠. 어. 들어오나 보다.” 지난 15일 오전 1시14분, 신도림역 4번 승강장으로 ‘잠자러 오는 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신도림역의 어제 기준 막차이자 오늘의 첫차가 될 7523호였다. 대기하던 역무원들이 들어가 주로 ..

종로의 새 명소 익선동

“익선동은 서울의 자궁” 우리 소리 울려퍼진 풍류의 고향 중앙선데이 입력 2023.12.30 00:01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종로의 새 명소 익선동 서울은 만원(滿員)이다. 소설가 이호철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가 1969년, 인구 500만 명을 육박한 상황에서 그렇듯 비명을 질러댔다. 사람이 살 곳 아니라지만 사람이 살려고 서울로 모이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처럼 ‘서울불(不)서울’이다. 그러나 지금도 늘 익선동 주변을 도는 이른바 종3(종로3가) 세대가 우리 세대에 수두룩하다. 아직도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익선동 하면 늘 추웠던 기억이 흐른다. 사람을 떠나게 해도 돌아오게 하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힘을 느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야성을 이루는 포장마차길 따라 정처 없는 ..

문화평론 2024.01.02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1]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문태준 시인 입력 2024.01.01. 03:00업데이트 2024.01.02. 14:18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1921-1984) 일러스트=박상훈 김종삼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때는 등단한 지 서른 해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거의 서른 해 동안 시를 썼..

연말 서점가 휩쓰는 쇼펜하우어 열풍

대한민국은 왜 200년 전 꼰대 독일 철학자에 빠졌나 [아무튼, 주말] 연말 서점가 휩쓰는 쇼펜하우어 열풍 이혜운 기자 입력 2023.12.30. 03:00 요한 셰퍼가 그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초상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교 도서관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고는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한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사회를 ‘불’에 비유했다.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은 ‘정중함과 예의’라고도 했다. 그는 ‘고독’을 찬양하고 ‘허영심’을 경계했다. 괴팍하고 냉소적이던 200년 전 독일 철학자에게 2023년 대한민국이 푹 빠졌다.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는 강용수의 ..

철학 강의실 2024.01.02

거룩한 낭비

거룩한 낭비 중앙일보 입력 2024.01.02 02:35 고진하 시인·목사 적설 20㎝, 폭설이다. 털 장화를 꺼내 신고 우선 마당과 집 앞의 도로에 길이라도 내려고 넉가래를 들고 나선다. 함박눈 덮인 도로엔 동네 작은 개들이 몰려나와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경로당으로 통하는 마을 길의 눈을 넉가래로 다 밀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돌담 밑 장독대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털어낸 그녀가 마당에서 눈덩이를 뭉쳐 굴리고 있다. “찰눈이라 잘 뭉쳐지네요.” 그래, 오늘은 하늘이 선사한 공일(空日). 담 너머로 눈 덮인 마을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속계에서 선계로 탈바꿈했구나. 저 황홀한 선계에 들어 아무 일도 않고 눈사람처럼 우두커니가 된들 누가 뭐라 하랴. 나는 동심의 눈빛 반짝이는 그녀 곁에서 눈사람 만드는 걸 거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