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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 14:37

거룩한 낭비

중앙일보

입력 2024.01.02 02:35

고진하 시인·목사

적설 20㎝, 폭설이다. 털 장화를 꺼내 신고 우선 마당과 집 앞의 도로에 길이라도 내려고 넉가래를 들고 나선다. 함박눈 덮인 도로엔 동네 작은 개들이 몰려나와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경로당으로 통하는 마을 길의 눈을 넉가래로 다 밀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돌담 밑 장독대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털어낸 그녀가 마당에서 눈덩이를 뭉쳐 굴리고 있다.

“찰눈이라 잘 뭉쳐지네요.”

그래, 오늘은 하늘이 선사한 공일(空日). 담 너머로 눈 덮인 마을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속계에서 선계로 탈바꿈했구나. 저 황홀한 선계에 들어 아무 일도 않고 눈사람처럼 우두커니가 된들 누가 뭐라 하랴. 나는 동심의 눈빛 반짝이는 그녀 곁에서 눈사람 만드는 걸 거들었다. 흐린 하늘에선 계속 잔눈송이들이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고…. 눈덩이를 굴리고 굴려 눈사람 몇 분을 마당귀에 모시고 나니 손발이 꽁꽁 얼어버렸다.

삶의 향기

집안으로 들어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인 후 창밖에 흩날리는 잔눈송이들을 바라보다가 시심(詩心)이 솟았다. 나는 몇 줄 떠오르는 문장을 얼른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오늘따라 낭비를 즐기시는 하느님이 마음에 든다/흰 눈썹을 낭비하고,/흰 섬광의 시를 낭비하는 하느님이 마음에 든다//내리는 족족 쌓이는 족족/공손히 받아 모시는/겨울나무들처럼//나 두 팔 벌려 하느님의 격정을 받아 모신다//받아 모시니, 詩다!”

격정이 느껴질 정도로 흰 눈썹, 흰 섬광의 시를 낭비하길 즐기시는 하느님, 나는 그분의 그런 낭비를 ‘거룩한 낭비’라 부른다. 봄날에 퍼붓는 향기로운 꽃비도 그렇지만, 이런 낭비가 없다면 지구별에서의 삶은 얼마나 적막할까.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 이 소멸의 계절에 고요하고 눈부신 설경이 없다면 우리의 상상력마저 소실되고 말지 않겠는가.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우리 집 슬레이트 지붕 처마 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엊그제부터 내린 눈이 천천히 녹아내리며 만든 고드름들. 길쭉길쭉한 고드름을 보니, 어릴 적에 부르던 동요가 생각났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선계로 탈바꿈한 설경에 시심
"삶은 경험해야 할 신비" 절감
모름의 신비에 무릎 꿇는 아침

쪽마루에 앉아 고드름 노래를 한 바탕 부르고 나니, 천진난만한 아이로 돌아간 듯 상쾌하다. 문득 외삼촌과 얽힌 오래된 추억 하나. 초등학교 시절 나는 겨울방학이면 외갓집으로 놀러 가곤 했는데, 고등학생인 외삼촌이 친구처럼 잘 놀아주었다. 그런데 외삼촌은 초등학생치고 제법 키가 큰 날 보고 ‘고드름장아찌 같은 눔’이라며 놀리곤 했다. 고드름장아찌? 첨 듣는 말이라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고드름 하나를 뚝 따서 주며 빨아보라고 했다. 맛이 어때? 싱거워요. 외삼촌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장아찌처럼 길쭉하게 생겼는데 고드름처럼 싱겁잖아!

나는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며 우리 집 처마 끝의 고드름을 따 쭉쭉 빨아보았다. 역시 싱거웠다. 그래, 맵고 짠 것들이 득세하는 세상이지만, 나는 고드름장아찌처럼 싱거운 놈으로 살아야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난 뒤란의 조팝나무 가지 하나를 뚝 꺾어 처마 끝의 고드름을 실로폰처럼 두드렸다. 가는 고드름은 고음이 나고 두툼한 고드름은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고드름으로 실로폰 놀이를 하고 있는데, 아침밥을 짓고 있던 그녀가 부엌문을 열고 나왔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하늘이 선물한 실로폰을 치고 있지.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이렇게 한바탕 장난을 치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문득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란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젊은 날 생사의 위험한 고비를 넘으면서 내 ‘앎’이란 것이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그때 마음눈이 열린 나는 삼라만상이 들려주는 모름의 신비에 무릎을 꿇었다. 장엄하고 불가해한 우주적 신성 앞에서 지성이라는 말로 포장된 ‘앎’이라는 장난감을 버리고 ‘모름’의 희열을 맛보았던 것. 오만한 지성은 그 알량한 ‘앎’의 희열만 알았지 ‘모름’의 희열을 알지 못한다.

장난치고 노느라 땀에 젖은 손발을 씻고 거실로 들어가니, 모락모락 김이 솟는 밥상이 차려져 있다. 한 그릇 밥은 온갖 신비가 총동원되어 지어진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오늘 나는 물질로 화한 하느님의 신비를 맛보는 것이 아닌가. 황홀한 눈꽃과 고드름실로폰 소리의 여운을 즐기며 먹는 밥맛은 꿀맛이었다.

고진하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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