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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서점가 휩쓰는 쇼펜하우어 열풍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 14:40

대한민국은 왜 200년 전 꼰대 독일 철학자에 빠졌나

[아무튼, 주말]
연말 서점가 휩쓰는 쇼펜하우어 열풍

입력 2023.12.30. 03:00
 
 
 
요한 셰퍼가 그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초상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교 도서관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고는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한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사회를 ‘불’에 비유했다.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은 ‘정중함과 예의’라고도 했다. 그는 ‘고독’을 찬양하고 ‘허영심’을 경계했다.

괴팍하고 냉소적이던 200년 전 독일 철학자에게 2023년 대한민국이 푹 빠졌다.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는 강용수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8위는 쇼펜하우어의 책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19위도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쇼펜하우어의 글귀를 담은 ‘#쇼펜하우어’가 1만 건을 넘겼다. 배우 하석진이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있다”고 밝힌 후, 아나운서 전현무도 “나도 이거 읽는다”고 말했다. 왜 지금 한국인은 쇼펜하우어에 빠져든 것일까.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달리고 있는 철학 교양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격언을 모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도 인기다.

◇디지털 디톡스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투신 자살을 했다. 어머니는 스무 살 많던 남편이 사라지자 막대한 재산을 무기로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어머니에 대한 실망감. 사춘기의 쇼펜하우어는 ‘사교’를 증오하고 ‘고독’을 찬양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의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방증”이라며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가 재조명되는 첫 번째 이유, 이런 그의 말이 ‘풍요 속의 빈곤, 군중 속의 고독’을 겪는 MZ세대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분석이다. 요즘 세대는 소셜미디어로 수천, 수만 명과 연결돼 있지만, 너무 외롭다. 동호회와 모임으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만날 수 있지만, 거꾸로 쓸쓸하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모(38)씨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소셜미디어와 약속을 줄이고 있다”며 “디지털 디톡스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디톡스도 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파이어족

쇼펜하우어는 부(富)의 가치를 잘 알았다. 많은 철학자가 돈을 벌기 위해 강의한 반면, 그는 상속 재산으로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지금 MZ세대가 원한다는 ‘파이어족(경제적 독립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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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진짜 부자는 부를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가짜 부자는 남에게 과시하거나 방탕하게 돈을 쓴다. 여기서 그가 뜬 두 번째 이유, ‘과시적 삶’에 지친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린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만큼 재산이 있고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자다. 남을 신경 쓰지 말고, 호감 가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고 그는 말한다. 출세 등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사는 삶, 자존감 높은 삶을 살라는 것이다.

◇진짜 행복이란?

평소 쇼펜하우어는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만약 태어났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차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염세적이었다. 그러나 1831년 독일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하자 살기 위해 베를린을 탈출한다. 이런 모습은 마지막까지 학생들 곁에서 철학을 강론하다 콜레라에 전염돼 세상을 떠난 헤겔과 비교돼 조롱받기도 했다.

그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성공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30대에 독일 베를린대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은 그는 일부러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개설한다. 그러나 빈 강의실에서 강의해야만 했다.

쇼펜하우어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45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재구성한 수필집 ‘소품과 부록’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60대에는 세계 여러 대학에서 그의 철학을 주제로 강의가 열렸다. 70세 생일엔 세계의 축하 편지를 받았다. 당시 그는 말했다.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 철학자는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성공을 갈망했기에, 고독을 찬양하고, 예의를 중시하고, 권태를 증오했다. 그는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하면서도 “삶의 지혜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쇼펜하우어의 인기가 많다는 건 ‘진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신호다.

이혜운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