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혼자 중얼거리다 185

젊어 황혼이라니

먼데서 자꾸 슬픈 소식이 들려온다. 백세시대라지만 목숨은 그리 녹녹치 않다. 김점용 시인 또한 그렇다. 쾌유를 빈다 황혼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힌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하루는 멀쩡한 우리 집을 숨겼다가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과 옷을 가위 속에 가스렌지 속에 숨겼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서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

한 우물을 파라!

우리나라 다이아토닉 하모니카의 정상급 연주자 ㅂ 씨께서 말씀하시길 '이 것 저 것 욕심내지 말고 한 우물을 파야한다'고 일러 주셨다. 마음 속엔 이 것도 잘 하고 싶고 저 것도 잘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가 없어 눈독을 들인 고가의 하모니카가 눈에 아른거린다. 잘하지 못하면서 연장 탓을 하는 어리석음도 아직 버리지 못했다. 글은 마음을 속일 수 있지만 악기는 소리를 숨기지 않는다. 마침 국산 하모니카 신제품을 스승님께서 하사해 주시니 안되는 시공부는 때려치고 열심히 입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불어볼 생각이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뒷면

십이월이구나

십이월이구나 오늘의 운세는 늙어감을 슬퍼마라 수묵화 한 점 치고 고고한 척 폼 한 번 잡고 십이월 뉘엿뉘엿 저물어가면서 느리게 닿았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 여린 풀과 꽃과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자고 곧 땅거미가 지면 이 세상의 모든 집을 향하여 돌아가는 때 혹 길을 잃으면 구슬처럼 돋아나는 별들 오래 머무르지 않는 구름들 기울어진 달이 나뭇가지에 힘겹게 걸려있을 때 아직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는 눈이 내게 있다고 그 눈에 아직도 남아있는 한방울의 눈물이 모여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고 그렇게 뉘엿뉘엿 목화이불 한 채 내려주시는 하늘을 우러르는 달 시집 [안녕, 베이비박스]

당신에게 말걸기

어제 아침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어느 분이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데 어쩌시겠냐고~ 전화를 주신 분은 강성위 선생, 내가 알고 있는 그 선생님은 외대 철학과에서 봉직하신 분인데 이미 작고하셨기에 동명이인 서울대 중문과에서 수학하시고 지금은 한국경제신문 컬럼이스트로 활동하시는 분 나의 졸시를 한역해도 괜찮겠냐는 말씀, 감사히 글을 받고 기쁘게 여기에 올려본다, 당신에게 말 걸기 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속에 마음을 묻은 다, 예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태헌의 한역] 攀談於君(반담어군) 世上無花不好看(세상무화불호간) 亦無噴吐怒氣花(역무분토노기화) 花有香則有香..

2020년 추석

추석의 아침이다. 지난 밤 목이 부어 식구들은 가까운 큰 아들네로 가고 혼자 집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아침에 봉오리를 연 난 한 촉과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과 한 화분에서 이 십년 동안 꽃을 피우는 사랑초와 함께 있다. 어머니 가신 지 육년째 인데 생전에 쓰신 액자가 오랫만에 눈에 들어온다 유지경성 有志竟成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후한서 後漢書 유지자사경성야有志者事竟成也에서 따온 말씀이다. 신사년 辛巳年이니 2001년 여름이다. 어머니의 서예 액자가 그러고보니 또 하나 있는데 그동안 참 무심했다.

나는 연애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

나는 연애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 내 마음을 훔치는 것들, 음악,그림, 좋은 글들과 나는 연애한다.그것들은 나를 모르는데 혼자서 울고 웃고 감탄하고 희열에 휩싸인다. 늘 절벽 앞에 서서 떨어질 찰라에 새가 되어야겠다는 치사한 변명과 새가 되지 못하므로 떨어질 수 없다는 비겁한 타협의 시간들을 지나면서 인생의 스승은 결국 나 자신일 수 밖에 없다는 거룩한 깨달음에 이르른다. 정병근 시인이 소개한 우대식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잠깐 생의 오르가즘에 빠진 소회이다. 띠 동갑 시인인데 나보다 훨씬 저 앞에 걸어간다. 정병근,우대식 훠에버! 오늘의 할 일은 우리 아파트에 딱 한 그루 밖에 없는 앵두나무 열매가 얼만큼 익었나 염탐하는 것 이 세상의 모든 앵두는 내 것이다!

경로석에 대한 다양한 견해

경로석에 대한 다양한 견해 지하철을 타면 경로석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아직 노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때는 일반 좌석에 앉는 것이 죄송스럽기도 하다. 공짜로 타는 주제에 돈 내고 타는 분들이 앉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제는 다리가 하도 아파 그만 경로석에 앉았다. 아무도 뭐라 하는 놈이 없는데 옆자리에 앉은 나보다 약간 맛이 간 분이 궁시렁 거리기에 눈한번 깔았더니 몸을 움추린다. 요새 젊은 놈 무서운걸 알고 있는 것이다. 지나 나나 지공이면서 뭘 말이 많아! 그 영감이 내리고 이번엔 정말 어린 꼬마가 앉기에 점잖게 한 마디"얘~ 여기 경로석이야" 했더니 이 꼬마가 말씀 하시길 " 알아요 노인을 공경하는 사람이 앉는 자리에요" 이러다가 한 정거장 더 갔다

단순한 삶

고백하건대, 나는 참으로 단순한 사람이다. 남들이 시인이냐고 물으면 시인은 하지만 내가 왜 시인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때 그때의 느낌을 받아적는 것.화장실에서 일보는 경건함 정도. 아주 간만에 청탁이 들어와서 눈물나게 썼는데 쓰고 나니까 또 눈물난다 구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피어나기는 하나 지지는않는 꽃이다 하늘에 피는 꽃은 구름 그저 푸른 하늘만 있으면 사계절 가리지 않고 핀다 향기도 없고 벌 나비도 찾아오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그네 긴 발걸음 끌고가는 구름이다 계간 [인간과 문학] 봄호

세설 世說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서로서로 호감을 가질 수는 없다. 아마도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란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완벽한 격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 악평 惡評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그 뜻을 수용할 수 있는 공력을 키우는 것이 나이 먹는 일일 것이다. 오늘 반나절을 도봉과 마주했다. 늘 그 자리. 늘 의연하게 우뚝 선!

걸레

자다 깨다 아침이다 어느 시인께서 스스로 삼류라 하시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고명하신 시인 겸 평론가께서 나를 일러 B급 시인이라 평하셨는데 참으로 그 말이 내게 맞는 고마운 말. C급이 아니라서 다행이고 앞으로A급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즐거운 일 예전에 끄적거렸던 글이 있어 추가로 올린다 걸레 나는 너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지만 기꺼이 너를 위해 버려질 수는 있다 걸레 같은 놈이라 욕하지 마라 나는 걸레다

의자에 대하여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허물을 벗는 일에 다름 없다.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알게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은 없을까? 지난 밤 늦게 오래 전 영화 를 보면서 왜 울었을까? 대전 국악방송에서 이현옥 시인이 시 한 편을 낭독해 주셨다. 일신우일신의 각오를 다져 본다 의자 4 나호열 사람은 의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려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줄 때 일 것이다 의자는 오랜 시간 홀로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에게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잠시 고단한 발걸음을 멈춘 이들이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하여 하인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미련없이 떠나는 그 때까지 묵묵하게 무게를 견딜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의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허물어 쓰레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