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남당리 추억, 남당리/ 나호열 지금, 바다로 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벼랑 끝의 향기 그에게서는 잘 익은 사과술 내음이 난다 추억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 때도 있지만 끈질긴 추억의 힘은 더디게, 때로는 숨차도록 저 편, 멈추어 선 시간의 묘지로 이끈다 나는 추억을 경멸한다. 헝크러진 머리 속은 비워지지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8.14
어제 한 일 어제 한 일 창문을 활짝 열고 방안으로 빗소리를 들여 놓았어 할 말은 많았는데 무심히 지나가버린 청춘처럼 빈 노트 위에 유성이 되어 떨어지는 빗소리 오늘은 하루종일 그 소리를 지우고 있는데 음각으로 돋아오르는 새들의 이 무수한 발자국들은 또 뭐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7.14
경계/나호열 경계/나호열 선을 긋고 방벽을 쳐도 문을 걸어 잠궈도 경계는 허공일 뿐이다 허공을 나누는 경계 이리 보면 아득한 벼랑 저리 보면 외줄이지만 허공은 나누어지지도 합해지지도 않는다 아! 이렇게 눈부시게 허공을 바라보는 일 그대를 눈부셔 하는 일 단지 햇살의 장난 때문만은 아니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3.27
오늘의 할 일 오늘의 할 일 날개를 잘라주어야겠다 이 쪽 횃대에서 저쪽 횃대 사이 그 한 뼘을 오가는 조롱 속의 발자국 소리 간 밤 꿈속에서 마침표를 찍고 또 찍었다 물도 주고 모이도 주었으나 미안하다 오늘도 나는 강철같이 푸른 저 하늘을 데려다 줄 수 없구나 날개를 잘라주어야겠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3.09
만월(滿月) 2011.02.12 만월(滿月) /나호열 마음에 등을 달아 놓으려다 그만 바람결에 끈을 묶어 놓았다 헤진 솔깃 기울 수 있을 만큼만 불 밝혀 놓으면 길고 모진 밤도 서럽지 않아 너울대는 그림자도 친구가 되지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린 등은 저 혼자 차 올라서 고개 마루턱에 숨차게 걸려 있다 이 밤 먼 길 떠나려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3.01
음지식물 음지식물/나호열 태어날 때 어머니가 일러주신 길은 좁고 어두운 길이었다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송곳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울음은 그렇게 푸르지 않았을 것이다. 몸에 남아있는 푸른 얼룩은 고통의 살점 알 수 없는 적의는 죄와 길이 통하고 먼저 내 살점을 뚫고 나서야 허공을 겨눈다 이른 봄 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2.28
그 사람 그 사람/나호열 가까운 길을 놔두고 강은 멀리 멀리 돌아서 간다 누구와 마주친 이 짧은 순간도 직선의 목마름을 삼키며 토해내며 맨발 부르튼 저 저문 강 같았어라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2.20
보름달 Moon Indigo - by Blake Desaulniers 보름달 / 나호열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2.17
1999년 12월 23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1999년 12월 23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나호열 - 양희은 콘서트 가파른 계단. 내 목숨이 종루에 올라 바람소리 내던 날 한 세월 흘러온 歌人과 딱딱한 나무 긴 의자 같은, 냉기 가릴 데 없는 자들의 고해성사 같은 밤 한계령 고갯마루 올라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작은 연못 물고기 한 마리 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1.31
눈의 몸살 2011.01.23 눈의 몸살 /나호열 당신이 오셨네요 온 몸을 신열에 들뜨게 하시고 살갗을 뚫고 뼈에 그리움을 낙인 찍으려는지 발자국 소리가 숨길을 누르고 있네요 그러니 어찌 하겠어요 당신 스스로 오셨으니 스스로 떠나가시라 하면 야속한 말인가요 길들여지지 않은 고삐를 거부하는 야생마에게 큐피드..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1.23
면벽 면벽(面壁) / 나호열 돌아 왔습니다 침묵 앞으로 적막 속으로 나지막히 인사 합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얼굴 씻고 흐린 세상 바라 본 눈도 꺼내어 씻고 무심코 만졌던 탐욕 두 손을 마지막으로 씻었습니다 침묵 앞에 무릎 꿇습니다 적막 속의 길로 들어 섭니다 돌아 왔습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시집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1.22
밤에 쓰는 편지 밤에 쓰는 편지 /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1.21
공하고 놀다 공하고 놀다 /나호열 상상 임신 끝에 알을 낳았다 무정란의 공 부화되지 못한 채 주렁주렁 망태기에 담겨 있다가 태생의 탱탱함으로 이리저리 차이다가 별이 될 듯 하늘로 솟구치다가 울타리를 넘어 차에 치여 찌그러진다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공 끝내 가죽만 남아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1.19
백일 간의 눈꽃 백일 간의 눈꽃 - J에게 가부좌를 틀고 동안거에 들었다 이제 그는 예고 없이 와서 이유 없이 떠나간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작정이다 느닷없이 다가온 겨울과 함께 몇 편의 단편소설을 소리내어 읽어주었고 촛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얼굴을 마주보는 밤도 있었다 웃음은 작은 물의 입자들이 만들어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