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었다 꽃이 피었다 나호열 바라보면 기쁘고도 또 그만큼 슬퍼지는 꽃이 있다 아직 피어나지 않아 이름조차 없는 꽃 마음으로 읽고 눈으로 덮어버리는 한 잎의 향기와 빛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向日性 시간의 촛대 위에 담쟁이 넝쿨 같은 촛불을 당기는 일 내 앞에서 너울대는 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6.09
빈 둥지 빈 둥지 나호열 새가 죽었다 굶어서 죽었다 부화장에서 태어나 쓰레기 봉투 속에 버려졌다 저 어린 것이 짝 잃어버리고도 몇 년을 혼자 굳세게 버티더니 배고픔은 참지 못했다 좁쌀 몇 알 눈물 한 방울 만큼의 물 하루치의 밥을 스스로 거두지 못한 죄 스스로 둥지 속에 몸을 눕혔다 빈 둥..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5.28
가슴이 운다 가슴이 운다 나호열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예정되어 있으나 슬그머니 뒤로 밀쳐놓은 정답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한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달려드는 파도가 있다 못질 소리 똑닥거리는 시계의 분침 소리 바위가 모래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 이 나이에 사랑은 무슨 이 나이에 이별은 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5.25
적소 謫所의 그늘 적소 謫所의 그늘 -괴산 산막이길 들머리 왁자지껄 여럿이 가다보니 어느새 참나무 두 그루 수심 깊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봄이었는데 한 뼘씩 비껴 떨어지는 햇살마냥 행운은 내 것이 아니었나보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돌단풍 희게 웃고 있으나 목 빠진 소식 오지 않고 기다림의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3.04
풍문의 땅 풍문의 땅 나는 가슴보다 작고 터벅터벅 먼 사막보다 넓은 땅을 가지고 있다 하루 안에 해가 뜨고 지는 광경을 볼 수 없어 말들이 바람처럼 내달리는 곳 영화에 물들었던 나의 전생이 잠든 그곳은 페허이다 썩을 것은 썩고 무너질 것은 무너졌으나 완강히 묻힐 것을 거부한 말들은 죽창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3.02
이사 이사 나호열 강남 이 편한 세상에 그가 왔다 검은 제복 젊은 경비원이 수상한 출입자를 감시하는 정문을 지나 대리석 깔린 안마당에 좌정했다 몸이 반쪽으로 쪼개져도 죽지 않고 용케 당진 어느 마을 송두리째 뭉글어져 사라져도 용케 살아남았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2.29
어제 저녁 어제 저녁/나호열 은은한 양탄자 노을은 발자국 소리를 순하게 만들어 산자락을 휘감아 돌아오던 종소리를 기억하고 방금 갓 구운 빵이 적당히 식어가며 뿜어내는 밀밭의 가슴을 더듬게 한다 수런거리는 날숨의 고단함을 오랫동안 기다리다 떠난 사람의 체온이 여적 남은 나무 의자 그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2.25
성자와 청소부 성자와 청소부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어두운 생각 무거워 구름이 내려놓은 그림자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그 말씀들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로 같은 가슴에 모으기 위해 기꺼이 빗자루를 든다 누군가 물었다 성자가 된 청..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2.22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가장이란 떠돌이 말과 뒷면에 끈끈이풀을 감춘 아름다움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청중들 한 사람은 향기가 고운 백합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붉음에 취해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2.21
어떤 안부 어떤 안부 소식은 멀리서 들어야 향기가 난다 세상 떠난 지 오래인 어떤 이의 부고가 산다화 필 무렵 눈에 짚이고 야반도주한 모 씨가 부자가 되었다는 누더기 같은 이야기를 흘러가는 강물이 귀를 씻어 주듯이 그리운 소식은 길이 멀어야 가슴에 매인다 시와 산문 2012년 봄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2.19
신작시 5편 틀니 어제는 교회에 갔고 오늘은 법당에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하루치의 까닭모를 분노가 잡초처럼 돋아오르고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고요히 앉아 지난 신문을 거꾸로 들어 읽으시는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2.02.15
꽃 이라 부른다면/나호열 소요문학 축시 꽃 이라 부른다면/나호열 꽃으로 친다면 그대들은 여럿이 모여 한 스푼의 눈물과 단지 한 문장의 사랑을 노래하는 안개꽃이다 어느 꽃은 향기로 어느 꽃은 빛깔로 어느 꽃은 우아한 자태로 한 계절 피고 지지만 꽃으로 친다면 그대들은 먼 그리움의 편지 같은 지상..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12.25
지렁이 지렁이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 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11.05
이별의 노래 이별의 노래/나호열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수 억 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만난 날들은 별이 되었다 사랑하기에는 턱없이 짧았던 시간 미워하기에는 더더욱 모자랐던 시간 이별은 서로가 서로를 잊기로 약속하는 것 서로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는 것 그러하니 이별이라는 슬픈 말은 어울리지 않는 일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10.04
밤길 밤길 어머니 앞서 가시고 잰 걸음으로 나는 뒤좇아 가고 달빛이 앞서 가고 발자국 소리가 땀을 흘렸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무도 없는 대문 앞에서 어머니는 오래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11.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