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베르만 도베르만 배성환 대부분의 애견가들은 파시스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모른다. 수술대에 마취되어 있는 개들을 대할 때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집도하는 나는 범죄의 공모자쯤 될 것이다. 마취되어 누워있는 검은 개의 주인은 수술실 블라인드 틈으로 .. 산문 읽기 2013.06.29
난초 난초 조경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20년 전, 난초가 내게 준 낡은 비단 지갑이었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수놓은 배꽃이 오래되어 보풀이 일었다. 그 보풀은 복숭아털처럼 반짝였다. 이제 지갑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나와 그녀와의 특별한 관계, 그것 때문에 그녀가 준 지갑을 버리.. 산문 읽기 2013.06.06
따뜻한 봄날 /이재백 따뜻한 봄날 이재백 적막강산이란 게 따로 없는 모양이다. 내가 사는 이 골짝을 두고 한 말이 분명한 모양이다. 예부터 골짝나라 사람들이라고 심심할 적마다 농담조로 조롱되기 일쑤인 이 곳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되면 곧장 의기소침해진다. 한 마디로 맥조차 풀려.. 산문 읽기 2013.02.24
우연론과 인과론 우연론과 인과론 김연경 1. 삼촌의 귀향에 대한 얘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집을 아주 예술적으로 지어 놨더라.” 이런 말로 아빠는 운을 뗐다. 그 예술적인 집을 짓느라 6천만 원의 거금이 들어갔단다. 아이러니는커녕 동경이 십분 배어나오는 어조였다. “사는 것도, 뭐라 카꼬, 억수.. 산문 읽기 2013.02.11
hello! stranger hello! stranger 백영옥 1 집은 삼중으로 잠겨 있었다. 그녀가 내게 준 집 열쇠는 모두 세 개였다. 첫 번째 열쇠를 돌려 흰색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문을 열면, 문고리가 망가진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130년이나 됐다는 집의 문고리를 열면 삭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누르듯 스쳤다. 3층까.. 산문 읽기 2013.02.09
藝 藝 NO 59 심상대 “마녀는 다섯이었습니다.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쓴 키 작고 오동통한 마녀가 초록색 페인트칠 한 나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잠깐 숨을 멈추고 말끔하게 면도한 인중과 턱을 매만지던 산딸기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황금색 머리칼을 가슴까지 드리운 채 구.. 산문 읽기 2013.01.20
인간 교육 인간 교육 윤보인 밤의 놀이터는 고요하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밤의 놀이터는 불온하다. 지나가는 개조차 보이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시소를 탄다. 그네를 탄다. 철봉에 매달린다. 거꾸로 매달려 세계를 바라본다. 멀리 교회의 불빛이 보인다. 놀이터 건너편에는 교회가 있다. 간.. 산문 읽기 2012.12.25
국가의 왼손 국가의 왼손 주원규 1 나의 하나뿐인 작은아버지, 그가 다시 돌아온 건 정확히 일주일 만이었다. 작은아버지, 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직접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요란법석한 소리에 못 이겨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문 밖의 그가 작은아버지일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 산문 읽기 2012.12.15
스물두 개의 침대 스물두 개의 침대 스물두 개의 침대 방현희 K의 연인이었던 그녀와 그렉안나가 만난 것은 K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누군가 죽기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더구나 두 여자가 들어서서는 안 되는 곳임을 알아채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이마에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걷기엔, 더욱 어울리지 .. 산문 읽기 2012.11.24
불법주차 불법주차 김숨 벌써 20분 가까이 상훈은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차를 세워 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서였다. 골목들이 원체 불길에 오그라든 먹장어처럼 좁고 구불거리는 데다,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곳에는 차가 대 있었다. 어쩌다 차가 대 있지 않은 곳에는 큰 화분이나 ‘주.. 산문 읽기 2012.10.28
하루의 축 하루의 축 김애란 * 새벽.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기옥 씨는 줄기차게 천장만 바라보다 부엌을 향해 모로 누웠다. 그러곤 다시 꼼짝 않고 어둠 속 한 점(点)을 응시했다. 동틀 무렵이라곤 하나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기옥 씨네 집은 여전히 깜깜했다. 이 시각 기옥 씨네 집에서 형체를 .. 산문 읽기 2012.10.21
민둥산 민둥산 김도연 그녀는 불쑥 나타났다. “약속을 지켜야지요?” “……무슨 약속?” “오 년 뒤에 애인이 없으면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우리가 헤어질 때.” “대체 무슨 소리야?” “나중에 발뺌할 거 같아서 녹음해 뒀어요. 들려 드릴게요.” 그는 녹음기에서 .. 산문 읽기 2012.10.14
비와 바람과 숲 비와 바람과 숲 이신조 비 도시의 광장에 비가 내리고 있다. 굉장한 기세의 폭우다. 언제쯤 시작되었는지 언제쯤 그칠지 가늠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비. 무섭기까지 해서 되려 묘한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비. 그런 비가 내리고 있다. 도시가 세찬 비를 맞는다. 구석구석 흠뻑 젖어든다.. 산문 읽기 2012.10.03
과부들 과부들 전건우 집에 돌아오니 장모님이 와 계셨다. 장모님이 사시는 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여섯 시간씩 고속버스를 탄 뒤 늙은이 해소기침처럼 콜록거리며 달리는 기차에 올라서는 또 한 시간 정도 가야 이제 절반쯤 왔구나, 하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멀다는 거고 두 마디로 하자면, .. 산문 읽기 2012.08.21
은각사 은각사 隱刻寺 김솔 마침내 그들은 모두 13살이 되었으므로 머지않아 흉악범이나 마약중독자가 되어 교도소 운동장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햇볕을 나누어 받으면서 13살 이전의 삶을 반추할 것이다. 4월의 벚꽃처럼 타락한 자신들에게는 조금의 연민도 허락하지 않고, 어둠을 빛의 원.. 산문 읽기 201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