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란 도시 무정란 도시 박화영 크고 작은 수상쩍은 소문들로 도시에는 언제나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것 같았다. 혹은 발작을 일으키는 섬망증 환자와도 같았다. 낮에는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밤이 되면 인적이 끊겼다. 봄이 찾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건물 옥상에.. 산문 읽기 2012.07.11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 표성흠 이 날도 우리는 낚시를 갔다. 모두 정년퇴직을 한 위인들이라 모이면 등산 아니면 낚시질이다. 이제 남은 인생 이런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이들에게, 그래도 건전한 모임이라고 마누라들이 도시락까지 싸서 챙겨준다.오랜 장마 뒤끝이라 .. 산문 읽기 2012.01.17
패닉 크리스털 패닉 크리스털 이대연 1. 어항은 바닥이 좁고 통이 넓다. 밑이 조금 잘려나간 타원형이다. 어항 입에 물결 모양 장식이 있다. 열대어 상점 주인의 말대로라면 어항은 특수 코팅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안에 열대어 다섯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남국의 어느 사파이어빛 바닷물 .. 산문 읽기 2011.08.11
혀 없는 이야기 혀 없는 이야기 - 박진규 1. 대한민국 시골마을 구석구석까지 새마을운동의 물결이 일던 시절이었다. 한 시골마을의 야산이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하룻밤 사이에 반토막 났다. 노인들과 아이들은 물론 동네 개들까지 해가 뜨자마자 큰길로 나와 붉은 흙이 흐르는 장관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담.. 산문 읽기 2011.08.03
쇼브라더스 베이비 쇼브라더스 베이비 이지민 차 안에서의 죽음은 상상해 본 적 없다. 그건 내가 정말 경멸하는 부류, 나약하고 간편하고 평범하고 정말 ‘뽀대’ 안 나는 죽음이니까. 핸들만 살짝 꺾어도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건 싱겁고 허무하다. 현장에서도 카 스턴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BMW끼리 처박아 .. 산문 읽기 2011.08.01
호박밭의 파수꾼 호박밭의 파수꾼 김나정 호박은 햇빛과 물, 흙으로 몸을 살찌운다. 며칠 째 비가 안 왔다. 깔쭉깔쭉한 호박잎 가장자리는 축 쳐졌다. 흙덩이는 푸슬푸슬 부셔졌다. 이규는 손바닥을 털고 1.5ℓ페트병 두 개를 들고 텃밭 옆에 마련된 인공 연못으로 향했다. 폭이 1미터쯤 되는 연못은 화강암으로 둘러쳐.. 산문 읽기 2011.07.14
아이들은 가라 아이들은 가라 임수현 “살인사건은 늘 그렇듯이 ‘죽은’ 사람보다 ‘죽인’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게다가 살인자는 거의가 사내다. ‘칼잡이 잭’도 마찬가지이다. 미궁 속 혹은 정신병원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잭 더 리퍼는 외과의사로, 유태인 군인으로, 폴란드 태생의 남색가 공작으로, 영.. 산문 읽기 2011.02.09
개 1967 □ 단편소설 개 1967 이충이 생물이라곤 한 마리의 새도 날지 않는 고보이 평야(平野) 동쪽 끝자락, 마산(山) 밑에 지붕이 없는 집 한 채가 있었다. 우리는 그 집의 오른쪽 벽면 밑에 <1961>이라는 초석의 기록이 뚜렷이 보이는 달빛 아래 앉아 씨레이션을 까먹고 있었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갈.. 산문 읽기 2010.11.12
스쿠온크의 눈물 스쿠온크의 눈물 허만욱 반나절을 달려 연홍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한 지 거의 아홉 시간 만이다. 그 가운데는 휴게소에 내려 점심과 커피 한 잔 사 먹은 시간이 포함되어 있긴 하다. 평택으로 가는 도중에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이 해미를 통과할 때쯤에는 이미 함박눈으로 변해 시야를 흐.. 산문 읽기 2010.08.24
눈물 눈물 박 경 숙 내가 나를 바라본다. 늘 거울에 비쳐보던 나와는 사뭇 다른 나를……. 내 눈은 절반쯤 떠져 있다. 그 눈은 아무 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채 초점이 없다. 언제 저런 포즈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은 적이 있던가. 카메라에 담아두기엔 전혀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일상적이지도 않은 저런 자.. 산문 읽기 2009.12.25
오동나무집 오동나무집 박세연 1.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공원묘지까지 따라갔던 상가 사람들과 헤어지고 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어있다. 저만치 불을 켜지 않은 집이 보인다. 문장紋章처럼 오동나무가 우뚝 솟아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아버지가 심은 나무다.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집을 오동나.. 산문 읽기 2009.12.23
추풍령 추풍령 서문경 1. 새벽에 아버지가 잠을 깨웠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직도 푸르스름한 여명이 휘장처럼 창을 가리고 있는 시간에 아버지가 잠을 깨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서울로 도망치려는 나의 계획을 아버지가 알아챈 것이나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산문 읽기 2009.10.07
그들만의 식탁 그들만의 식탁 뼛조각을 쥔 남자의 손가락에 양념이 엉겨붙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댔다. 엄마는 간혹, 맨밥만 끼적이고 있는 내 쪽으로 슬며시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밀어주었다. 그러나 꼬리찜의 기름이 둥둥 뜬 나박김치, 허연 밥풀이 앉은 겉절이, 되는대로 헤쳐 놓은 나물들까지, 어.. 산문 읽기 2009.09.27
저 언덕 너머 저 언덕 너머 권채운 쾅쾅 울리는 포탄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리는 더 크게 울렸다.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눈을 도로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추석연휴의 마지막 날 저녁인데 하필이면 전쟁영화를 할 건 뭐야. 다른 거 보자. 왜 이래? 한참 재미나게 보는 걸. 내.. 산문 읽기 2009.05.10
생활의 꽃 생활의 꽃 박 세 연 공짜 상품권 담배를 챙겨들고 나는 옥상으로 올라간다.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과 그 너머 도시의 야경이 내게 영감을 줄지도 모른다. 바람이 상쾌하다. 어쩐지 내가 지금까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발한 상상이 나를 찾아들 것 같다. 수 십 미터의 강폭을 이루며 흘러가는 한.. 산문 읽기 2009.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