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바람과 숲
이신조
비
도시의 광장에 비가 내리고 있다.
굉장한 기세의 폭우다. 언제쯤 시작되었는지 언제쯤 그칠지 가늠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비. 무섭기까지 해서 되려 묘한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비. 그런 비가 내리고 있다. 도시가 세찬 비를 맞는다. 구석구석 흠뻑 젖어든다.
광장의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주상복합건물 로비의 한 브랜드 커피숍. 폭우가 쏟아지는 토요일 오전 11시 7분, 테이블은 대부분 비어 있다.
유리벽 가까이 구석진 자리에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있다. F와 R, 그녀들은 사촌지간이고 오늘 4년 만에 만난 참이다.
“비가 참…….”
“그러게, 참.”
둘은 유리벽 너머 비가 퍼붓는 광장으로 시선을 준다.
“잘 지내지?”
R이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응, 나야 뭐.”
F도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2주 전 전화통화에서도 둘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때는 F가 먼저 묻고 R이 답을 했다.
F의 아버지와 R의 아버지는 형제다. 6남매 중 둘째와 다섯째다. F의 아버지는 R의 큰아버지고 R의 아버지는 F의 작은아버지다. F와 R은 서른두 살 동갑내기로, F에게는 오빠가 둘 있고 R은 외동이다. F의 아버지는 5년 전 폐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F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학위를 마치고 두 달 전 귀국했다. R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2년 전 이혼했다. 재혼을 한 R의 아버지는 3년 후 다시 이혼했다. 그 뒤로도 여자들이 있었지만 다시 결혼하지는 않았다. 줄곧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R은 작년에 이혼을 했고, 지금은 다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결혼생활은 10개월간이었고, 아이는 없었다.
옆자리 빈 의자에 불투명한 비닐커버를 씌운 R의 우산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뾰족한 우산꼭지에 비닐이 뜯겼는지 빗물이 새어 나와 바닥에 고인다. F는 군데군데 젖어 있는 R의 옷자락을 바라본다. R은 전철을 타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F는 전철역을 빠져나와 거센 빗줄기 아래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지르는 R의 모습을 그려 본다. 우연히 그 곁을 지나쳤다면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커피 잔을 들어올리는 R의 시선이 유리벽 너머를 향한다. F도 걷잡을 수 없이 비가 쏟아지는 광장을 바라본다.
F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F는 제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5분 뒤 이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올라와 약속장소인 커피숍에 도착했다. 비는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 유리벽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우산에 비닐커버를 씌우며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는 R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 내 명함.”
R이 자신의 명함을 F에게 건넨다. F는 그것을 받아든다.
얼마 전부터 보험회사에 다닌다더라. R과 4년 만에 전화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전하자 F의 어머니가 들려준 얘기였다.
아직까지도 F의 어머니를 변함없이 ‘형님’이라 부르는 R의 어머니는 1년에 몇 번쯤 F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했다. 명절이나 제사 즈음의 안부, 혹은 뜬금없이 이어지는 눈물바람의 긴 신세한탄. F는 어머니로부터 R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들었다. 남자가 좀 이상한 사람이었대, 뭐가, 몰라 아무튼 좀 이상한 사람이었대, 참 나 세상에 안 이상한 사람이 어딨어. 미국에 머물렀던 4년 동안 F는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뤄진 모녀간의 전화통화에서 R의 이름이 거론된 적은 없었다. F는 R이 한 전문대학의 행정 관련 과(科)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F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만난 R은 홈쇼핑업체의 전화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했다. 그때는 명함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넌 없어?”
“나? 명함?”
“그래, 한 장 줘라.”
“없는데, 명함.”
F의 말에 R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너 무슨 큰 미술관에 취직했다며? 아니, 박물관이던가.”
“아냐, 취직이라 하긴 좀 그래. 미술관 소속이 아니라, 작품 중개하는 에이전시 쪽인데, 지금은 전시 기획사 창업 준비하는 선배들 도와주고 있어. 아직 준비 단계라 특별히 이렇다 할 게 없어. 명함도 없고······.”
F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귀국 후 제 어머니에게도 두 오빠에게도 그랬다. 어쩌다 보니 F의 어머니는 그 애매한 정보를 안부전화를 걸어온 R의 어머니에게 전한 것이고, 다시 R의 어머니를 거쳐 R에게 건너간 F의 근황은 ‘큰 미술관 취직’으로 거창하게 부풀려진 것이다.
“대학에도 나간다면서? 교수님 된 거 아니야?”
“교수는 무슨, 그냥 시간강사야. 것도 다음 학기부터, 아직 시작도 안 했어.”
2주 전의 전화통화에서 R이 한 얘기는 그저 ‘너무 오랜만이다, 얼굴 한번 보자’였다. 결혼, 이혼, 보험, 미술전시나 대학 강의 같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F의 사정으로 약속은 한 차례 미뤄졌고, 둘은 각자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애매한 정보를 바탕으로 4년 만에 만나는 서로의 모습을 가늠하며 이 자리에 나왔다.
F는 R의 명함을 들여다본다.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이고자 노력한다. 그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Y생명 J영업소, R의 이름 앞에는 보험설계사의 영어식 표현인 ‘라이프플래너’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실망하지 않았다는 듯 R이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묻는다.
“미국 대학에선 무슨 공부한 거니? 설명해 줘도 난 잘 모르겠지만.”
“······아트 비즈니스라고.”
“아트 비즈니스? 야, 되게 있어 보인다. 그래, 아무튼 넌 옛날부터 공부를 잘했으니까.”
F는 하릴없이 마음이 상한다. 자격지심 같기도 하고 짜증 같기도 하다. 공부를 잘했다는 것에서 아트 비즈니스로의 비약. 보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R이 보험 가입을 권하리라 충분히 예상했고, 에둘러 거절할 마음으로 굳이 토요일 점심 전에 약속을 잡았다. 스스로가 분명 보험을 들 만한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리벽 너머의 비, 비, 비. 문득 미국에 있는 동안은 한 번도 이런 폭우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F는 깨닫는다.
세상의 많은 사촌들이 흔히 그렇듯, F와 R 역시 어린 시절에는 꽤나 가깝게 지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면 도합 열넷이나 되는 사촌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도 했다. 사내아이 여덟, 계집아이 여섯, 대학 신입생부터 돌잡이 아기까지. 모두 다 한복을 차려 입고 조부모 방에 걸릴 액자용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빗줄기는 좀처럼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거센 비를 맞고 있는 우산, 벤치, 자동차, 가로등, 빌딩의 유리창과 대형 간판들이 속수무책 녹아내리기라도 하는 것은 아닐지.
F는 커피 잔을 거의 다 비운 채다. R이 입을 연다.
“최근에 사촌들을 여럿 만났어.”
“그래?”
“너처럼 그동안 외국에 있던 것도 아닌데, 다들 왜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지 ······.”
“다들? 전부 만나려고?”
“아니, 어떻게 그래. 내 처지가······. 결국은 아쉬운 소리 하러 만나자는 건데. 나 특히 오빠들은 이상하게 다 어렵더라.”
“······.”
그래도 보험 계약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기혼자들이 낫지 않겠니, F는 말하지 않는다.
“참, 너 B언니, 쌍둥이 낳은 거 알아?”
R이 계속 말을 잇는다.
“Z는 해병대에 자원입대 했대. 어휴, 그 꼬맹이가 벌써 어른이 다 됐어.”
F는 R로부터 큰집의 막내딸인 B와 셋째고모의 아들 Z의 얘기를 듣는다. 성악을 전공한 B는 결혼 전 방송국의 합창단원으로 일했고, 유난히 병약했던 Z는 어려서 여러 차례 큰 수술을 받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F가 B와 Z를 떠올린 것도 R을 만난 것만큼이나 오랜만의 일이다. F는 휴대폰을 열어 시간과 수신메시지를 확인한다. N은 잠에서 깨었을까.
문득 나직해진 목소리로 R이 말한다.
“Q 얘기는 알고 있지?”
F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국 있을 때 들었어. 2년쯤 전인가.”
“그래, 벌써 2년이 다 됐다.”
Q, 큰고모의 딸, 사촌들 중 F와 R과 Q는 동갑이었고, 어린 소녀였던 셋은 곧잘 살갑게 어울렸다. 방학 때면 함께 유원지의 풀장에 가거나, 서른 개나 되는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거나, 핫케이크나 부침개 같은 간식을 해먹고, 종일 소녀잡지를 보고, 서로의 방학숙제를 베꼈다. 소곤소곤소곤, 절대 비밀이야 절대, 별것 아닌 것들을 숨겨 두었던 오르골상자, 비명소리 같은 웃음소리, 빨리 문 잠가 빨리, 웃음소리 같은 비명소리. 운동화, 단발머리, 라디오 리퀘스트, 브로마이드, 소곤소곤소곤. Q는 2년 전 자살했다.
“······어렸을 땐, 우리 셋이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R의 얼굴에 옷깃에 스민 빗물처럼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F는 Q의 얼굴을 떠올린다. 기울어진 커피 잔 바닥에 열세 살 Q의 얼굴이 고인다. 오래 전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트를 비즈니스 할 수 있다거나 라이프를 플랜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F의 휴대폰에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울린다.
Q는 죽기 전 몇 년간 학습지 방문교사로 일했다고 했다. 오래 전 그때, Q는 F와 R보다 반 뼘쯤 키가 컸고, 카레와 포도를 좋아했고, 셋 중에 종이인형의 옷을 가장 정교하게 잘 오렸다.
─ 좀전에깼어... 언제올거야... 배고프다...
F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어 든다. N은 F의 오피스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오늘 비, 정말 장난 아니게 온다.”
R이 다른 말을 하며 말한다. 그래 뭐 할 수 없지, 아무튼 오랜만에 반가웠어, 그만 일어나도 좋아.
문득 F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열세 살의 어느 여름밤이다. F와 R과 Q는 열대야를 핑계로 R의 집 옥상에 텐트를 치고 잤다. R의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R의 아버지가 흔쾌히 텐트를 쳐주었다. 텐트 속은 후텁지근했고, 모두 모기에 물렸고, 잠을 잘 생각이 없었다. Q가 손전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딸깍 불을 껐다 켰다. Q가 딸깔딸깍 소리보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있지 나 시작했어 생리. F와 R은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입을 막고 드디어라는 감탄사를 삼켰다. 비명소리도 웃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Q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엄중한 선언처럼 말했다. 지금 하고 있어 배가 아파. 셋은 오래 전부터 과연 셋 중 누가 먼저 시작하게 될 것인가를 진심으로 궁금해 했다. 보여줘, F가 말했다. 보여줘, R이 바로 거들었다. 목소리가 커졌다. 안 돼, Q가 손전등을 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여줘, 안 돼, F가 Q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으려 했다. 보여줘, 안 돼, Q가 몸을 틀었을 때 R이 손전등을 빼앗아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딸깍딸깍, 아 알았어 알았어 불 좀 잠깐 꺼봐.
딸깍딸깍, 손전등이 몇 차례 켜졌다 꺼졌다 했던 밤. 새벽에 폭우가 쏟아졌다. 걷잡을 수 없이 세찬 비였다. F와 R과 Q는 잠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다 텐트를 버려 둔 채 옥상에서 내려왔다. 셋은 R의 방에서 다시 함께 잠들었다.
F는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N이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답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R에게 말한다.
“비 진짜 너무 많이 온다. 어디 가서 뜨거운 국물, 먹지 않을래?”
F와 R은 서로의 열세 살 얼굴을 본다. F와 R은 Q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있다.
“근처에 아는 데 있어, 전골집. 근데 좀 매워.”
“너, 점심 약속 있다며······.”
“명함도 없는 주제에 보험은 아직 좀 그렇고, 오늘은 대신 밥 살게.”
“······.”
도시의 광장에 비가 내리고 있다.
굉장한 기세의 폭우다. 언제쯤 시작되었는지 언제쯤 그칠지 가늠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비. 무섭기까지 해서 되려 묘한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비. 그런 비가 내리고 있다. 도시가 세찬 비를 맞는다. 구석구석 흠뻑 젖어든다.
바람
소녀는 문고리를 동여매고 있는 가죽 끈의 매듭을 푼다. 매듭이 다 풀리기도 전에 거센 바람이 천막집의 허술한 문틈을 들썩이게 한다. 소녀는 짐짓 문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매듭을 푼다. 문을 연다. 소녀는 바람 속에 선다.
이른 아침, 벌판의 동쪽 지평선 끝에서 부릅뜬 눈동자 같은 해가 떠오르고 있다. 빠르게 어둠이 걷혀 가는 하늘에는 아직 별이 떠 있다. 해가 빛나고 별이 빛난다. 다르게 빛난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 어떤 재촉이나 추궁처럼, 바람이 분다. 건기(乾期)가 시작되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람이 불어온다. 벌판에 사는 사람들은 건기를 ‘바람의 계절’이라 부른다.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집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밤새 바람에 시달린 외딴 천막집은 가까스로 무사한 듯싶다. 비어 있는 목책, 비어 있는 벌판, 소녀의 눈에서 별이 사라진다. 해가 떠오른다.
소녀가 다시 천막집 안으로 들어서자, 문 옆에 매어 둔 염소가 발을 구르며 ‘매애’ 하고 운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염소에게 다가가 한동안 목덜미와 등줄기를 쓰다듬어 준다. 따뜻하고 보드랍다. 염소는 얌전히 체념한다. 소녀는 염소의 배설물을 치우고 먹이통에 마른 풀을 넣어 준다.
불을 피울 차례다. 소녀는 천막집 한가운데 땅을 파 만든 화덕에 불을 지핀다. 연료는 발효시켜 바싹 말린 염소 똥과 말똥이다. 소녀의 동작은 제법 능숙하고 노련하다. 환기구를 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소녀는 끝이 갈고리처럼 생긴 장대를 높이 쳐들어 천막 꼭대기의 환기구를 젖힌다. 키와 손이 작은 탓에 이 동작만은 그다지 능숙하지 못하다. 아무튼 소녀의 얼굴만 한 작은 환기구가 열리고 공기가 들고 난다. 소녀는 차를 끓이기 위해 온통 검은 그을음투성이인 주전자에 조심스레 물을 채운다. 물은 언제나 부족한 것이므로 언제나 아껴야 한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소녀는 다시 염소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염소젖을 짜기 시작한다. 염소는 되새김질을 하며 소녀에게 순순히 부푼 젖을 내준다.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들린다. 노파가 깨어난 것이다. 노파는 소녀의 할머니다. 소녀는 노파가 누워 있는 천막 안쪽의 침상으로 다가간다. 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
노파는 병들었다. 병세가 심상치 않고부터는 기침소리마저 기운이 없다. 노파는 종일 침상에 누워 있다. 잠을 자거나 기침을 하며 누워 있다. 노파가 말(言)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다른 가족들은 약을 구하기 위해 말(馬)을 타고 떠났다. 그동안 노파를 돌보는 것이 소녀의 임무다. 소녀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약과 맑은 물과 불룩한 식량주머니를 가지고 돌아오리라 믿고 있다. 굳게 믿고 있다. 가족들이 떠난 지 벌써 여러 날째다. 소녀가 노파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다. 노파가 가늘게 눈을 뜬다. 천천히 고갯짓도 한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의 차례다. 소녀는 다른 침상에서 쿠션들을 가져와 노파의 머리와 등을 받친다. 노파의 상체가 반쯤 일으켜 세워진다. 소녀는 신중하게 또 단호하게 움직인다. 제 일의 중요성을 분명히 알고 있는 움직임이다. 담요를 걷어내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겹겹 두꺼운 옷을 껴입은 노파의 옷섶을 하나하나 헤친다. 노파의 숨결이 불규칙해진다. 꽤나 느닷없다는 느낌으로, 숨겨져 있던 섬이나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듯, 노파의 맨살이 드러난다. 어쩌면 섬이나 동굴만큼이나 오래된 피부. 소녀가 침상 아래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린다. 가족 중 누군가 낡은 플라스틱 통을 납작하고 우묵하게 잘라 만든 노파의 변기다. 소녀는 그것을 노파의 둔부 아래로 밀어 넣는다. 노파의 마른 입술이 한참을 달싹거린다. 소녀는 고개를 돌리거나 미간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는다. 물큰물큰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난다.
병들기 전, 노파는 매일 아침 동물의 뼈로 만든 빗으로 소녀의 머리칼을 빗겨 주었다. 소녀는 단단한 빗살이 제 두피를 쓸고 검고 긴 머리칼 사이로 미끄러지던 감촉을 기억한다. 등 뒤와 머리 위 늙은 손가락들의 능숙한 움직임. 마치 지난밤의 시간을 한 올 한 올 빗어 내리는 듯, 오래도록 이어지는, 하루를 시작하는 짐짓 경건한 연주. 노파는 정성껏 소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소녀는 노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염소젖을 짜는 법, 화덕에 불을 지피는 법, 색실을 엮어 허리띠나 깔개를 만드는 법, 높낮이를 달리해 휘파람을 부는 법, 고기의 포를 뜰 때 손칼을 사용하는 법, 별을 보고 날씨를 가늠하는 법, 차 찌꺼기로 점을 치는 법 등. 소녀는 벌판에서의 삶을 위한 여러 가지를 노파에게서 배웠다.
노파는 또한 ‘큰 나무’에 대해 소녀에게 말해 주었다.
벌판의 천막집에서 태어나 벌판에서만 자란 소녀는 한 번도 큰 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우기(雨期)와 건기 사이, 벌판은 푸른 초원으로 변했다. 염소도 말도 사람도 하늘도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소녀는 풀밭에 누워 쉼 없이 부풀어 오르는 구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알싸한 풀 향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셨다. ‘큰 나무’는 초원의 풀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고 노파는 말했다. 초원에도 소녀의 허리춤까지 자라는 작달막한 덤불들이 있었다. 노파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나무가 많이 있는 큰 숲에 가면, 어찌나 나무들이 높이 솟았는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란다.”
“하늘이 보이지 않아?”
소녀는 눈이 휘둥그레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도 강도 집도 없는 벌판은 언제나 온통 하늘뿐이었다. 소녀가 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하늘이 이렇게 많은데!”
큰 나무가 얼마나 키가 큰지 얼마나 많은 잎을 달고 있는지 얼마나 굵고 단단한 가지를 가졌는지······. 노파의 얘기에 소녀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할머니, 큰 나무는 왜 있는 거야? 너무 높고 커서 염소나 말이 잎을 뜯어먹을 수도 없는데.”
“큰 나무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필요하지.”
“하늘로 올라가? 누가?”
“우리 모두가. 염소도 말도 사람도, 죽으면 모두가 하늘로 올라가는 거야. 큰 나무를 사다리처럼 타고서.”
소녀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말도 안 돼, 큰 나무가 있는 큰 숲은 여기서 아주아주 멀다며. 죽은 염소랑 말이 어떻게 거기까지 간단 말이야?”
노파는 손바닥을 둥글게 말아 귀에다 가져다대고 눈을 감았다. 미소를 짓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거야.”
“바람?”
“그래, 바람이 와서 죽은 염소와 말과 사람의 영혼을 큰 나무에게로 데려다주는 거야. 큰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라고······.”
소녀는 뜨거운 주전자를 화덕 옆에 내려놓는다. 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찻잎을 한 움큼 집어넣는다. 차가 우러나면 제일 먼저 따라낸 잔을 들고 천막집 밖으로 나간다. 소녀는 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노파의 침상을 바라본다. 벌판의 바람은 여전하다. 언제나 하루의 ‘첫 차’는 대지의 신(神)의 몫이다. 소녀는 뜨거운 차를 세 번에 나눠 세 방향으로 벌판에 뿌린다. 노파가 가르쳐준 경구(經句)를 읊는 것도 잊지 않는다. 완전히 날이 밝아 주위가 환하다. 소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족들이 말을 타고 떠난 방향을 바라본다.
천막집 안으로 돌아온 소녀는 뜨거운 차와 갓 짜낸 염소젖을 대접에 반반씩 섞는다. 벌판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하루에 대여섯 잔씩은 마시는 수프다. 소녀는 대접과 스푼을 들고 노파에게 다가간다. 소녀는 노파의 입안으로 수프를 흘려 넣는다. 말을 할 수 없게 되고부터 노파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이것뿐이다. 대접을 채 반도 비우지 않았지만 노파는 입을 다물고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화덕에 가까이 다가앉아 소녀가 식사를 시작한다. 소녀는 예의 수프에 육포와 마른 빵을 조금 곁들인다. 소녀는 수프에 마른 빵을 적시며 빵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 문득 작은 환기구의 구멍을 악기처럼 울리며 바람소리가 천막집 안을 가득 채운다. 염소가 소녀를 보고 ‘매애’ 하고 운다. 길고 긴 바람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돌처럼 딱딱한 육포를 오래도록 씹는다.
작은 나무의자와 엮다 만 깔개를 들고 소녀가 천막집 밖으로 나온다. 염소도 데리고 나온다. 목줄을 놓아 주자 염소는 이리저리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소녀는 벌판에 나무의자를 놓고 앉아 색실로 깔개를 엮기 시작한다. 바람이 세차지만, 그래도 하루의 얼마쯤은 벌판에서 지내야만 마음이 놓이는 소녀다. 소녀가 엮은 깔개에는 염소와 말이 몇 마리 수 놓여 있다. 소녀는 간간이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다. 아직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다. 세찬 바람에 쉴 새 없이 머리칼이 흩날리고 금세 손가락이 곱아든다. 물을 아껴야 하는 벌판에서는 매일같이 씻을 수 없다. 소녀는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볼과 손등에 꼼꼼히 말기름을 발랐다. 아무래도 초원을 수놓을 녹색 실이 부족할 것 같다. 바람이 소녀의 반들거리는 볼과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다시 염소를 천막집 안으로 들여놓고, 다시 젖을 짜고, 다시 차를 끓여 수프를 만들고, 다시 노파를 먹이고, 다시 육포를 먹고, 다시 노파의 변을 받아내고, 다시 깔개를 엮고, 다시 바람 속에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어느덧 땅거미가 진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소녀는 다시 한 번 밖으로 나가 밤새 바람에 시달릴 천막집을 이곳저곳 살핀다. 천막집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무심히 고개를 돌렸을 때, 소녀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저 멀리 지평선에 무언가가 있다. 어스름 속에 그 실루엣만이 선명하다. 저토록 멀리 있는데, 저토록 크고 높고 곧다. 소녀는 바람 속에서 작게 소리를 지른다.
“큰 나무다!”
소녀는 한 번도 큰 나무를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이 바로 큰 나무임을 알아본다. 틀림없이 그것은 노파가 일러준 큰 나무다. 다른 무엇일 수 없다.
소녀는 다급히 천막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문고리의 가죽 끈을 단단히 동여맨다. 여러 번 매듭을 짓는다. 소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며 염소젖을 짜고, 차를 끓이고, 노파를 먹이고, 변을 보게 한다. 다시 노파의 담요를 덮어 줄 때, 노파가 소녀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손바닥을 둥글게 말아 귀에다 가져다대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미소를 짓는 것도 같다.
소녀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한다. 잔뜩 웅크린 온몸이 귀가 되어 바람소리를 듣는다. 길고 긴 바람소리를 오래도록 듣는다. 지평선 끝의 큰 나무,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어서 가족들이 돌아왔으면. 소녀는 쉽게 잠들지 못하지만 결국 잠이 든다. 바람 부는 벌판의 밤이 지나간다.
큰 숲, 정말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큰 나무의 높은 가지 위에 노파가 앉아 있다. 소녀는 ‘할머니!’ 하고 소리쳐 부른다. 노파가 꿈속에서 가볍게 발을 흔든다.
소녀가 잠에서 깨어난다. 바람 속에 몸을 일으킨다. 날이 밝아 모든 것이 속속들이 환하다. 천막집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숲
여자가 걷는다, 걷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나 기억해 내려는 듯 걷고 있다. 발바닥이 땅을 딛는 느낌을 좀 더 분명히 느껴 보려 여자는 부러 밑창이 얇은 신을 신고 집을 나섰다.
여자가 걷는다, 걷는다는 것이 수영이나 자전거타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할 줄 알았다 해도,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몰 수 있었다 해도, 그 모두가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이라면, 너무나 오랜만에 물속으로 뛰어든다면, 너무나 오랜만에 자전거 핸들을 잡는다면. 가라앉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몸으로 배운 것은 잊히지 않는다는데, 과연 감각이 돌아올까, 기억이 날까, 여자는 걷는다는 것에 그런 의구심을 품은 채 걷고 있다.
여자가 걷는다. 수영이나 자전거타기와는 달리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여자는 허우적대며 가라앉을 것만 같은, 휘청대며 넘어질 것만 같은 불안을 느낀다. 여자가 걷는다, 걷는다.
무리일 수 있다. 여자는 환자다. 암환자다. 여자는 한 달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고, 닷새 전 방사성동위원소 치료를 위해 2박 3일간 격리실에 입원했다. 정상적인 몸 상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꼼짝없이 자리보전을 해야 할 정도라고도 할 수 없다. 제법 알려진 대로 갑상선암은 발생률도 생존율도 완치율도 가장 높은 암에 속한다. 지난여름, 정기건강검진을 받은 여자에게 갑상선 이상소견이 통보되었다. 조직검사 결과 갑상선암 1기였고, 수술로 제거한 종양의 크기는 8밀리미터였다.
여자는 아파트단지를 빠져나와 뒷산의 산책로로 들어선다. 9월의 어느 화요일 오후, 햇살이 가득한 맑은 날이지만 공기 중에는 더 이상 더위라 할 만한 기운이 남아 있지 않다. 나뭇잎 대부분은 아직 푸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정점을 넘겨 쇠어버린 푸름이다. 어둡고 무거운 푸름이다. 잎사귀는 이내 누렇게 말라 들어갈 것이다. 가을이다.
아스팔트 포장은 산책로 입구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지점에서 끝난다. 한 노인이 윗몸일으키기 기구를 의자 삼아 앉아 공책 크기로 접은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자는 노인 곁을 지나쳐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완만한 오르막, 아스팔트가 아닌 흙바닥.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얇은 신발 밑창 아래 땅의 질감을 느껴 보려 애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손이 발바닥으로 모여든다.
여자가 걷는다, 걷는다, 걷는다.
발이 땅을 구를 때의 감각이란 어떤 것인지. 발바닥이 어떻게 움직이고 꺾이고 눌리고 울리는지. 발목과 발등과 발뒤꿈치와 발가락과 발톱은 어떤지, 팔과 다리의 관절이 굽는 각도, 근육의 수축과 이완, 호흡과 심박, 체온, 시선, 소리, 냄새, 걸을 때 정수리는 어떤지, 어금니는 어떤지, 배꼽은 어떤지, 음모는 어떤지, 빗장뼈는 어떤지, 췌장은 어떤지, 혈소판은 어떤지, 걸을 때 어떤지, 어떤지 걸을 때, 여자는 걸을 때의 제 모든 것을 낱낱이 되새겨 보려 한다. 빠르게도 걸어 보고 느리게도 걸어 본다. 눈을 감고도 걸어 보고 입을 벌리고도 걸어 본다. 가장 작은 보폭으로도 가장 큰 보폭으로도 걸어 본다.
여자가 걷는다. 그러나 까마득히 오래된 수영이나 자전거타기 같은 걷기. 허우적대며 가라앉을 것 같은 걷기, 휘청대며 넘어질 것 같은 걷기. 여자는 걷고 있으면서도 제 걸음이 더없이 낯설고 의심스럽다. 전에는 이렇게 걷지 않았다. 분명히 다르게 걸었다. 그런데 그 걸음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지금 걷고 있는 걸음은 자신이 열흘 전 한 달 전 일 년 전 십 년 전에 걸었던 그 걸음이 아니다. 그게 어색하고 불안해서, 여자는 가라앉을 것만 같고 넘어질 것만 같다.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걸어도 걷는 게 아닌 걷기.
그저 기분 탓일지 모른다. 겪어 보지 못한 병과 그에 따른 치료를 겪으며, 몸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암환자들이 치료과정에서 겪는 이상 증세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걷는 일에 문제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여자가 걷는다. 가라앉을 듯, 넘어질 듯, 자신의 걸음이 아닌 걸음으로 걷는다.
격리실 때문일까. 여자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갑상선암 환자들은 수술 후 일반적인 항암치료 대신 방사성동위원소치료를 받는다. 고용량의 방사성 요오드가 함유된 알약을 복용하고, 피폭을 방지하기 위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병실에 2박 3일간 입원한다. 치료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평생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하지만, 악명 높은 항암치료 과정에서 그야말로 초주검이 되는 다른 암환자들에 비하면 호사를 누리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는 격리실에 입원했던 갑상선암 환자들의 경험담이 올라와 있었다. 여자도 그들처럼 ‘그나마 다행’식의 긍정 최면을 위안 삼으며 입원 수속을 마쳤다.
여자가 2박 3일간 머문 격리 병실은 7층이었다. 병실에 딸린 욕실과 환자용 침대와 소형 냉장고와 채널이 여럿인 티브이. 여자는 사물함에 소지품을 정리해 넣고, 창가 의자에 앉았다. 창문 밖으로 6차선 도로와 대형 상가와 주유소 등이 내다보였다. 벽면에 부착된 비상호출기와 병원의 로고가 프린트된 베갯잇이 아니었다면, 어느 여행지의 작은 호텔방에 와 있다 해도 좋을 법했다.
여자는 입원 전 교육받은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랐다. 지시사항이 적힌 인쇄물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지시시항대로 좁은 병실 안에서 요령껏 몸을 움직여 운동도 했다. 천장의 스피커에서는 시간에 맞춰 지시사항을 일러주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걷는다, 걷는다, 걷다가 여자는 산책로를 벗어나 보기로 한다. 무릎 높이 목책을 넘어 얼마간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내 땅은 울퉁불퉁해지고 나무뿌리와 돌덩이가 발끝에 걸린다.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돌의 표면은 모두 제각각으로 기울어져 있다. 여자의 걸음도 기울어진다. 어둡고 무거운 푸름이 가을로 향하는 숲, 쇠어버린 숲 그늘 속으로 여자가 걷는다, 걷는다, 걷는다.
격리실에서의 첫날밤, 여자는 잠든 지 두어 시간 만에 깨어났다. 낯선 공간에서 보내는 낯선 밤, 겨우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머릿속은 멍했지만 잠기운은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하릴없이 티브이를 켰다. 국제유가 전망, 맛집 탐방, 걸그룹의 뮤직비디오, 골프 중계, 초특가 구매 찬스 전신안마의자, 뮤지컬배우의 인터뷰, 세계의 오지 탐사, 바둑 대국의 복기, 그리고 2차 함수 풀이, 여자는 나비넥타이를 매고 헤드셋을 착용한 교육채널의 수학강사가 칠판에 2차 함수 그래프를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중학교 수학 교사였다. 수술과 치료를 위해 한 학기 병가를 냈다. 여자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에게는 2학기 시작과 함께 새 담임교사가 배정되었다. 지금쯤 3학년의 수학 진도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의 제곱은 나머지 변을 각각 제곱한 것의 합과 같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자는 그 점이 좋았다. 여자는 티브이를 껐다. 불도 껐다. 한동안 어둠 속에 있다 다시 불을 켰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 세면대 거울에 목의 아래쪽 수술자국을 비춰 보았다. 약 5센티미터의 가로주름, 도드라지게 이어진 피부 절개선이 제 방의 거울로 볼 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다시 티브이를 켰지만 2차 함수 문제를 풀이하던 채널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골을 넣은 흑인 축구선수가 텀블링 세리모니를 선보였다,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공직자를 향해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유선형 선체를 반짝이며 흰 요트가 푸른 물살을 갈랐다, 금발의 여자가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향해 총알을 난사했다, 냄비 속에서 감자와 양파와 당근과 닭고기가 끓었다. 여자는 티브이를 껐다. 침대 옆 선반 위에는 여자의 것인 휴대폰과 노트북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병실에 들어온 직후 남동생 부부와 차례로 통화를 했다. 몇 시간 뒤에는 동료 여교사로부터 쾌유를 바란다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여자는 전화번호부에 입력된 62명의 이름을 차례로 되새겨 보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름은 그중 7명이었다. 여자는 얼굴이 기억나는 3명의 이름을 삭제했다. 노트북컴퓨터를 켰다. 포털사이트를 둘러보는 일은 채널이 많은 티브이를 향해 리모컨을 누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이메일함을 열었다. 몇 달치 신용카드 온라인청구서의 사용내역서를 살폈다. 석 달 전 ‘가인, 2만 8천 원, 일시불’이란 항목이 어떤 내용의 결제였는지 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여자는 컴퓨터를 껐다. 한동안 어둠 속에 있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를 걷고 도로 건너편 주유소를 내려다보았다. 꽤 긴 간격을 두고 넉 대의 차량이 급유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결코 열려서는 안 되는 격리 병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과 무관했다. 여자는 격리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과 무관했다. 지금껏 살아온 43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시간이 자신을 통과하고 있음을 여자는 알게 되었다.
여자는 숲에 있다. 계절이 변해 가는 숲은 헐겁고 뒤숭숭하다. 무력한 듯 소란스럽고, 의욕을 보이지만 체념에 차 있다. 오후의 햇살이 숲의 그늘과 무언가를 긴밀히 주고받는다. 긴 협상이나 공모 같은 수런거림. 손깍지를 풀듯 나뭇잎들이 조밀했던 틈을 벌린다. 흙과 씨앗은 이미 겨울에 골몰하고 있다. 무언가를 가장 먼저 아는 것은 언제나 새와 벌레다. 여자는 숲에 있다. 밑창이 얇은 신을 신은 채 천천히 발걸음을 떼고 있지만, 이제 걷는다고 할 수 없다. 여자는 숲에 있다. 짐짓 숲에 속해 있다. 숲에서 여자는, 격리실에서 보낸 2박 3일을 생각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수식(數式)들을 생각한다.
격리실에서의 둘째 날. 눕는다는 것이 그때까지 누운 것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티브이를 본다는 것이 그때까지 본 것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세수를 하는 것도, 하품을 하는 것도, 양말을 신고 벗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물병의 뚜껑을 돌리는 것도 그때까지 그랬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먹는다는 것이 가장 그랬다. 병실 문 밖 이중문 사이 공간으로 시간에 맞춰 식사가 배달되었다. 여자는 지시사항에 따라 준비된 비닐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음식이 담긴 식판을 병실 안으로 들여왔다. 안간힘을 쓰다시피 했지만, 여자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맛이라곤 감지할 수 없는 저요오드 처방의 환자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먹는다는 것이 그때까지 먹는다는 것과 다르게 느껴졌다. 맛보고 씹고 삼키는 일이 더없이 낯설고 의심스러웠다. 허우적대며 가라앉을 것 같은 먹기, 휘청대며 넘어질 것 같은 먹기.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먹는 일을 해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어색하고 불안해서, 여자는 식사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숲 속의 빈터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숲 속의 빈터, 키가 큰 나무들의 가지와 잎이 차양을 드리운 것처럼 머리 위를 덮고 있다. 시간은 어느덧 저물녘에 가깝다. 빛과 그늘이 물감처럼 번져 간다. 여자는 머리 위의 잎들이 모두 떨어져 내릴 다음 계절을 생각한다. 맞은편 나무 아래 돌무더기가 있다. 주먹만 한 모난 돌들이 누군가 함부로 부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쌓여 있다. 오래되어 무너져 내린 돌담의 일부 같기도 하고, 소원을 비는 서낭당이 되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이 숲의 모든 나무와 새가 그렇듯, 저 돌무더기의 돌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알지 못한다. 여자는 숲 속의 빈터에 있다. 어쩌면 숲이 결정한 일이다.
격리실에서 보낸 마지막 새벽, 여자는 비상호출기를 눌렀다. 격리실에서 비상호출기를 누른 경험이 없었기에, 그것만은 그 전과 다르다 할 수 없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스피커의 목소리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재차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여자는 답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왜 전과 같지 않냐고, 무슨 일이냐고,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격리되어 있었다.
돌무더기의 어느 틈새에서, 불쑥, 들이밀어진 뱀의 머리. 까만 비늘과 까만 눈이 까맣게 빛난다. 여자는 21년 전 여름과 가을, 자신이 임신했던 4개월간의 시간을 기억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을 받은 것은 그때였다. 여자는 뱀을 본다. 뱀은 여자를 보지 않는다. 어둡고 무거운 푸른 잎 사이, 늦은 오후의 햇빛이 돌무더기를 비춘다. 돌무더기 틈새에서 머리를 쳐들고, 뱀이 빛을 쬔다. 식은 피를 데운다. 뱀은 이제 이 숲 속에 더위가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가장 차갑게 알고 있다. 전과 같을 수 없다. 여자는 자신이 예전의 발걸음을 결코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21년 전 여름과 가을, 그 뒤로 무엇도 같지 않았다. 수영처럼, 자전거타기처럼, 가라앉을 듯, 넘어질 듯, 여자는 걷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한다. 걸음의 모든 것을 새로 알아내야 한다. 뱀이 저물녘의 햇빛 한 자락을 휘감는다. 여자도 뱀도 숲에 속해 있다. 뱀의 작고 까만 눈 속에서 쇠어버린 숲이 다음 계절로 향한다.
《문장웹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