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의 꿈 플라스틱의 꿈 유대영 카키색 군복을 입은 병사의 왼쪽 눈엔 송곳 구멍이 뚫려 있다.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다. 허리를 구부린 그는 진열장 구석에 놓인 나무판 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쓰러진 병사의 새끼손톱만한 얼굴은 눈에서 흘러내린 핏물로 온통 뻘겋다. 움푹 팬 눈매와 두꺼운 입술. 흙바람에 .. 산문 읽기 2009.02.06
꼬리 꼬리 박세연 * 말린 자둣빛 유두가 그대로 비친다. 가슴은 수유기 때처럼 풍만해져 있다. 나는 거울 가까이 다가간다. 최근 유럽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며 친구가 사다준 속옷이다. 어깨끈 말고는 모두가 망사소재로 돼있다. 가리거나 받쳐주는 기능대신 가슴을 신비롭게 만들어준다. 속옷을 입었음.. 산문 읽기 2009.01.11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 석 제 황만근이 없어졌다. 새벽에 혼자 경운기를 타고 집을 나간 황만근은 늘 들일을 나가면 돌아오는 시각인 저물녘에 돌아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취하더라도 열두시가 될락말락한 한밤이면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평생 단 하루 외박한 뒤 돌아왔던 그 시각, .. 산문 읽기 2009.01.03
매듭 매듭 박경숙 나는 마침내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 아니 그 여자의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쓰려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장례식은 바로 어제 부슬거리던 가을비 속에서 치러졌다. 퇴색한 잔디 위에서 젖은 발을 뭉그적거리고 있던 몇 되지 않던.. 산문 읽기 2009.01.01
무정한 세상 무정한 세상 권채운 보여 주시죠. 나는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서 심사위원들을 무구한 눈길로 바라본다. 내 눈길 저 편에는 궁금해서 몸살이 나는 청중이 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갑자기 청중 속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지른다. 나는 미동도 않는다. 이봐요 김성택 씨, 연기를 하라니.. 산문 읽기 2009.01.01
잼 잼 ․ 전 예 숙 ․ 소설가 지원은 의자에 앉자마자 컴퓨터부터 켠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판매 상담원 어플리케이션 화면이 물결무늬 춤을 추며 열린다. 지원은 화면 상단 우측에 자신의 이름과 내선번호가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깊은 숨을 내쉰다. 백여 명의 상담원들 중에서 가장 .. 산문 읽기 2009.01.01
청기와 암자 청기와 암자 김경 그믐날 밤이다. 어둠은 하늘만 분간하기 어려울 뿐, 경내는 그 어느 대낮보다 더 밝다. 요사채의 방문이 열리면서 황색 행자복 차림의 여행자(女行者)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소리 없이 배롱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줄줄이 대웅전을 향한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좁장한 계단은 금세 황.. 산문 읽기 200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