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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6. 23:23

 

난초

조경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20년 전, 난초가 내게 준 낡은 비단 지갑이었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수놓은 배꽃이 오래되어 보풀이 일었다. 그 보풀은 복숭아털처럼 반짝였다. 이제 지갑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나와 그녀와의 특별한 관계, 그것 때문에 그녀가 준 지갑을 버리지 못 했었다. 나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 믿었던 난초였다. 내 미국 갈 제반경비를 그녀가 넣어줬던 바로 그 지갑이었다. 버리기 위해서 지갑 속을 봤다.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접힌 종이를 펼치자 낙엽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내가 쓴 일기부스러기였다. ‘핵처럼’ ‘난초’, ‘할머니’, 이런 단어가 보였다.

 

“길이 열렸군. 길이 열렸어.”

 

할머니의 그 말이 곧 내 운명이 되었다. 나는 비단지갑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에 버린 지갑을 다시 봤다. 낡았지만 늘 내게 감사의 마음을 안겨줬던 물건이었다. ‘소중했던 물건이여 안녕~’

 

우리는 언제나 맑고 투명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가끔 오해가 생긴다. 난초가 내게 하는 양이 불쾌하지만 그것이 나를 더욱 몸 달게 했다. 아무튼 난초를 봐야 한다.

 

어머니 산소를 돌아본 후, 나는 배꽃 피는 난초네 고향으로 향했다. 고속버스 좌석에 앉자 호텔 방에서 가방에 넣고 나왔던 맥주 캔 하나를 꺼내 마셨다. 그것은 그녀의 불확실한 거취를 더 이상의 확인 없이 찾아나서는 내 불안을 함께 넘기는데 필요했다.

 

서울을 빠져나온 버스가 경기도 방향으로 접어들자 첩첩산중의 시작이었다. 버스가 산 하나를 끼고 돌 적마다 아랫도리를 숨긴 뒷산이 다시 앞산처럼 내 앞에 다가섰다.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정표를 바꾼 도로는 우리네 인생길처럼 심하게 구불댔다. 난초네 집에서는 산길의 가로등 불빛이 하늘로 가는 안내 길 같았다.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도 어둠이 내리고 풀벌레 소리가 뚜렷해지면 경건하기까지 한 그곳이었다. 산속에서 보는 밤하늘은 청춘의 막연하고 초조한 불안감을 아름다운 생각으로 바꿔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많이도 빙글거렸다. 두 시간 동안 고속버스가 빙글거린 뒤에 휴게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비빔밥을 먹고 난 뒤, 자판기에서 습관대로 커피 한 잔을 뽑았다. 그리고 앞산을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마주 보이는 산 밑의 산사태 방지용 구조물도 반듯했다. 비스듬히 올라간 철책 난간도 정갈했다. 누군가가 매단 손수건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내가 타고 온 고속버스에 오를 시간이 됐다. 나는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출발할 때의 불안은 사라졌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렸다. 산을 비켜 앉은 작은 다랑이 논에서는 벼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버스에서 도중에 그녀에게 전화를 여러 번 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그렇다면? 다시 불안이 밀려왔다.

 

 

나는 오늘 아침 호텔 방에서 난초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나, 석주야.”

 

“누구라구요?”

 

“나, 김석주라니까.”

 

“어머! 석주 오빠.”

 

“어제 밤늦게 서울에 도착했어.”

 

“……, 그래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우리 전화통화는 가끔 했었지. 허나 내가 한국에 나와 난초를 만나는 것은 20년 만이지. 헌데 목소리가 왜 그래? 어데 아프기라도?”

 

“예, 좀…….”

 

“이번에는 난초 만나려고 일부러 나왔어.”

 

“많이 바쁘시다더니, 이제야 시간이 났군요.”

 

“그랬어. 암튼 시골 형님네 집에 갔다 와서 만나자구. 시간을 아주 정하지. 내일 강남 터미널 옆 호텔 커피숍에서 오후 3시에 만나지. 꼭 나오기야.”

 

“저, 서울에 없어요.”

 

“딸 공부 때문에 서울에 있다더니, 그럼 어디에 있어?”

 

“전 지금 오빠를 만나고 싶지 않은 데 어쩌죠? 오빠네 고향에 들렸다가 그냥 미국으로 가셔야겠어요. 오빠, 다음에 뵈요. 정말 미안해, 오빠. 그럼…!”

 

갑자기 끊어진 전화 앞에서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멍해 있다가 난초의 고향에 가기로 맘먹었다. 미국에서 들고 온 그녀의 선물보따리가 갑자기 바위처럼 무거웠다. 선물 꾸러미를 버리고 싶었다. 난초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먼 데서 온 나를 반기지 않는 데에는 반드시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난초네 집으로 가는 산말랑은 온통 푸른빛이었다. 감자 걷고 메밀 심는 다른 곳과는 달랐다. 온통 배추밭이던 그곳은 마치 저만 혼자 살 궁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배 한 척 옮겨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부를 만큼 짙푸르렀다. 산 밑의 너른 땅에는 붉은 팥알이 달린 듯, 별처럼 옹기종기 모여 피는 꽃술 독특한 개별꽃, 당신한테만 온 마음 빼앗겨 당신 발소리에 초롱초롱 달려간다는 듯 초롱꽃, 나는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친다는 꽃말의 냉이꽃이 지천이었다. 앵초, 민청가시덩쿨, 연복초들이 땅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 풀꽃들이 바람 불 때마다 한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난초 할머니는 너들 이렇게 내 마음 다 뺏을래? 했다나? 난초 할머니, 안터댁은 그곳에다 당장 천막을 치고 이사를 했다. 당신의 아들을 살릴 곳은 복수초 초롱꽃들이 만발한 이곳이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안터댁은 아침이면 새소리와 천막 안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면서 눈을 떴다.

 

“난초 애비 청년 시절에는 눈만 남아 수숫대에 눈박아놓은 것 맹키로 퀭했어. 하나밖에 없는 자식,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자나 깨나 걱정이었지. 지금은 스키장이 들어와서 없어졌지만 스키장을 담벼락처럼 둘러싼 산이 있었지. 그곳에 벼락 바위라고 손처럼 휘어진 검은 바위 하나가 있었지. 나는 늘 그 절벽 밑에 가서 우리 아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 했었지. 산을 내려오면서는 풀뿌리째 채취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 효소를 만들었어. 봄이면 풀을 뿌리째로 30~50여 종을 캤으니까. 품팔이로 돈을 벌면 대부분 항아리를 샀어. 30개, 50개, 주욱 늘어선 항아리만 봐도 배불렀지. 효소는 한 해 이상 묵혀야 했으니까 그동안이 문제잖아. 효소가 발효되기 전에는 약초를 캐다 절구통에 찧어 즙을 냈지. 아무튼 효소가 1년 되면 어느 정도 발효되는데 3년 지나야 완전 알칼리로 변하지. 우리 몸은 효소의 조화가 깨져서 병이 나거든. 육식에 시달리고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지는 사이 몸이 산성화되어 버리는 거야. 나는 그런 것을 진즉에 알았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자연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말았어. 아들이 효소를 먹은 지 2, 3년 되면서 혈색이 살아나고 차차 약을 줄였어. 언젠가도 말 했지만 난초 애비가 훤한 모습으로 돌아올 날을 기도하는 동안 나는 그 모습을 환영으로 보았지.”

 

나도 그 집에서 자주 효소를 얻어 마셨다. 아니 할머니를 도와 풀뿌리를 캐고는 했었다.

 

효소가 안터댁에게 며느리도 데려다 줬다. 어느 날 그 집에 서울에서 전화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그 댁에서 효소를 판다기에 전화 했어요.”

 

“예, 효소 팝니다만 아무 한테나 팔지 않는데요.”

 

“아무 한테라뇨. 효소가 필요한 사람한테 파는 집 아닌가요? 아니면 누구한테 파나요?”

 

“저흰 그저 아는 사람들과 조금 나눠 먹을 정돕니다. 대량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서요.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 여보세요? 거기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며칠 후, 일요일 한 여자가 그 집을 방문했다. 야무져 보이나 얼굴이 파리한 젊은 여자였다. 안터댁은 산야채로 밥을 지어 그녀를 대접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여자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었다. 여교사 역시 위궤양으로 시달렸으며 만성 피로증후군에 시달렸다. 몇 달이 지났다. 그녀가 안터댁을 찾아왔다. 다소 침울하고 기운 없어 보였다.

 

“병이란 효소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우리 아들 좀 보라고. 우리 아들도 도시에서 돈 몇 푼 번다고 밤이면 술 마시고 낮에는 매연 마시고, 나중에는 뭔 병인지도 모르게 시름시름 말라비틀어지더라고. 저러다 죽겠다 싶어서 아들 데리고 이리 들어와 번졌어. 설마 죽기야 하겠어? 돈 한 푼 없이 배포 좋게 이리로 들어와 버린 거여. 어때 선상님도 선상이고 나발이고 다 치우고 이리 들어와 버려요. 우리 셋이 삽시다.”

 

“아이고 죽겠네.”

 

여교사는 안터댁의 말이 하도 어이없어 하품을 했다. 그런데 또 안터댁이 말을 받았다.

 

“병만 없고 꿈만 있으면 멋지게 살 수 있어. 그깟 선상질 관두고 여기 들어와 버려. 나랑 셋이서 인간 연구를 혀. 나는 효소 담그고 자네들은 학문적인 일을 연구하라 이 말이여. 모두 곁에 있어도 내 몸 아프면 모두 망상일 뿐이여. 것도 안 되면 여기서 일자리를 구하면 되는 것 아니여?”

 

이번에도 뱃장 좋게 받아쳤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상하게도 여교사의 무기력 했던 몸이 차차 생기를 찾아갔다. 그런데다가 어찌된 셈인지 아들은 여교사가 오면 곁눈질이 잦았다. 남녀 간 사랑은 곁눈질로부터 시작된다던가?

 

큰 소리는 쳤지만 정말 설마 했던 일이 벌어져 번졌다.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여교사가 이 산골이 좋단다. 정말 안터댁의 효소가 여교사를 살맛나게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산골짝에 뛰어들다니! 오겠다면 환영은 하지만. 이 산골에 오려면 바르고 단단한 의지와 인내심이 있어야 했다. 도중에 욕심이 앞서버리면 헛일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흔들려 버리고 사물에 곧잘 현혹당한다. 아들과 여교사가 주고받은 편지가 수십 통이라지만, 퇴직을 너무 일찍 결정한 것 아닌가 싶어서 안터댁은 내심 찜찜했다. 효소를 만드는 일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효소가 충분히 발효되기까지 참을 줄 알아야 했다.

 

“어머니, 어머니!”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 봤으나 안터댁은 소리의 임자를 찾지 못했다. 주위는 온통 하앴다. 오냐. 하마터면 눈 궁에 함에 넣을 한복 상자를 잃어버릴 뻔 했네. 눈 덮인 먼 산, 숲이 우우 소리쳤다. 깊은 수렁을 벗어나 집에 온 안터댁의 발에는 나갈 때 희게 닦아 신었던 고무 신발 두 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의지가 단단하고 현실에 충실하다 할지라도 마음 저변에는 허무가 흐르고 곁에 마음 맞는 사람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랬는데 정말로 안터댁의 바램대로 여교사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안터댁은 며느리와는 18년을, 둔내에서는 45년을 사시고 88, 미수를 끝으로 세상을 뜨셨다. 내가 둔내에 온 지 1년 후였다.

 

나와 난초는 노감주 나무 밑을 지나는 중이었다.

 

“오빠, 내가 미국 갈 돈을 빌려줄게”

 

“네게 그럴 돈이 어딨어? 괜히 사람 마음 설레게 장난치지 마.”

 

“장난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잖아.”

 

“흥, 도라지 팔아 돈 좀 만졌다고 사람 놀리기야?”

 

나는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난초네 형편이 내게 그런 인심을 쓸 정도가 못 됐다. 미국에 가려면 비행기 티켓을 사야 하고 약간의 여윳 돈도 있어야 했다. 내가 미국에 오겠다면 내게 초청장을 보내겠다는 첨단 칩 회사에 다니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어서 들어오라 했다. 큰 노간주나무에서는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났다. 다시 난초가 내 손을 잡았다.

 

“왜 믿기지 않아?‘

 

“느네 형편에 어림없는 얘기잖아? 그리고 왜 내게 돈을 주냐 말이야?”

 

“미국에 가면 분명히 출세할 수 있다며?”

 

“난초 네가 날 출세시키겠다 이거야?”

 

“그렇다니깐 그러네. 못 믿겠으면 말고.”

 

“아냐. 난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야. 하지만 네가 내 마누라도 아닌데 왜 그래? 어떻게 날 믿어?”

 

“할머니가 늘 오빠 얘기를 하셨어. 머리도 좋지만 운을 타고난 사람이래. 내가 오빠한테 10년 후에 받을 요량으로 노감주 나무 1000 그루 값을 줄께. 어때? 이자는 오빠가 알아서 주고 말이야.”

 

물론 인생에서는 행운이 찾아와 미소 짓는 그런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이 있다지만 난초처럼 산속에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노동으로 살아가는데 그녀에게 돈을 받는 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행운을 안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어렵게 먼저 미국에 들어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장차 우리나라도 첨단 산업으로 승부를 봐야한다고 했다. 그는 내게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미국으로 오라고 했다.

 

난초네 집은 산속에 있었다. 산속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100년 된 굴참나무가 서 있는 언덕을 내려오면 풀이 사람의 키만큼 자란 빈 땅 사이로 좁은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갑자기 풀냄새 사이사이 지천으로 자라는 허브나무에서 흐르는 허브 향으로 아! 이곳이 낙원이구나. 감탄하던 곳이었다. 난초네 집은 드문드문 떨어진 집 두엇을 지나 산 밑에 있었다. 난초네 집 앞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동산 아래 밭이 있고 밭 밑에 난초네 논이 있었다. 내 젊은 시절에 운명적인 파문이 일어났었다. 그때 친구한테 내 이름을 빌려줬다가 빚쟁이한테 쫓겨서 찾아든 곳이 난초네 집이었다.

 

고속버스가 횡성 읍내에 섰다. 차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는 내가 말한 장소를 네비게이션에 찍었다.

 

“그 근처에 교회가 있군요. 걱정 마세요.”

 

전에는 숲을 헤치고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던 오지였다. 지금은 오지에 아스팔트길을 냈단다. 워낙 구불거리는 길에다 또 낭떠러지가 심한 곳이었다. 옛날에는 서낭당이 있었는데 그 자리 그 언덕 위에 교회가 들어섰다고 했다.

 

“20년 만이라. 우정 꼭 가셔야할 길이면 질 빠른 길로 질러간다 쳐도 올 때는 빈차로 와야 하기 땜시 왕복 차비는 주셔야 함다.”

 

“알았어요. 갑시다. 데려다만 주신다면 그게 문제겠어요? 대신 내가 이 차를 그대로 타고 오면 어떻게 되죠?”

 

“그냥 메타 값만 내면 됨다.“

 

“알았습니다. 그리 합시다.”

 

택시가 군소재지를 벗어나 둔내 고랭지로 달렸다. 열린 차창으로 스미는 바람에 시골 특유의 퇴비냄새가 코를 스쳤다. 연어가 모천으로 와 알을 낳는다더니 사람도 어릴 때 옛 동산을 그리기에 명절 때면 고속도로가 미여터지는 것이다. 난초가 고향산천의 미를 포착하여 그림으로 남기듯이, 난 이곳과 그녀를 잊지 못했다. 다시 횡성 읍내 삼거리를 지나서 산을 끼고 돌자 전에 주막을 했던 빈집이 나왔다. 그 집을 끼고 돌자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법한 좁은 산길이 나왔다. 다시 메밀밭이 보였다. 반가웠다. 굽은 허리로 메밀밭에서 일하던 난초 할머니를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그 분이 아이구 허리야! 하실 것 같았다. 메밀밭이 희게 물결쳤다. 난초 할머니는 세상을 떴으나 내 추억 속에 계셨다.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슴다.

 

경사진 길 옆에 협동조합 팻말이 붙은 작은 창고가 나타났다. 그 옆으로 휘어져 뻗은 길이 속도를 내지 못하게 했다. 차가 10여 분 달리자 듬성듬성 집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빈 집이 많이 눈에 띄었다. 내가 변해버린 이곳에 실망하는 눈치이자 운전사가 말했다.

 

“많은 문화시설이 들어옴서부터 더 이상 과거의 고랭지가 아님다. 온난화로 이곳도 변화 많았지요. 저기 저 언덕 너머로 우뚝 솟은 건물 보이죠? 청정지역에 공장 굴뚝이 뭡니까? 물론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된다고 좋아라 하지만 강원도는 누가 뭐래도 청정지역이래요. 우리는 저거 탐탁지 않게 봄다. 오히려 오염 때문에 일부에서는 강원도 특유의 특성을 잃었다고 야단이래요. 분명히 낸 중에는 지역 경제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 올 거라구 단정적으로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슴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산중의 이미지는 더 이상 강원도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여기도 더 이상 청정 지역이 아님다. 저 너머의 골프장이 생기면서 농약 살포로 고랭지 농작물에 피해가 많슴다. 주민들도 시름시름 앓는 사람 많슴다. 할 수 없이 이곳 주민들은 도시로 스며들고 도시에 가서는 도시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이 검다.”

 

“그렇다고 옛날 그대로 둘 수도 없고, 발전했다는 것이 결국 다아 파헤쳐 본래의 모습을 망가트리는 일이니, 우리같이 오랜만에 찾아드는 이방인에게는 더 이상 아름다운 산천이 아니군요. 산천이 이러니 사람인들 이곳에 남아 살겠어요? 내가 찾는 사람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이거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어서 가 봅시다.”

 

“아! 저기 저게 언덕 위의 교회래요. 저 너머 동네가 손님이 말씀하신 동네 맞슴까?”

 

“아! 맞슴다.”

 

나는 운전사말투로 대답했다.

 

20여 년 전에는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할 지 막막했었다. 낙후된 내 조국에 비해서 문명이 발달한 미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낙원을 향해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흘러가는 구름이 태양 아래 머물듯이 가끔 담배를 물거나 틈이 나면 조국과 난초 생각이 났다. 차가 조금 더 가자 앞이 툭 트인 곳이 나타났다. 산 설고 말이 선 나라에서 최첨단 기술을 익히고 학문을 익힐 때의 힘겹던 미국에서의 생활, 그나마 그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나타나는 한 여자, 난초. 그녀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차창을 활짝 열었다. 전보다 더 빈 집이 많아졌으나 산에는 하얀 풍력발전기가 돌고 먼 산 저쪽에서는 연기 오르는 굴뚝이 보였다. 뒷산에는 스키장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서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뻐꾸기 울고 금낭화 꽃향기 가득했다. 빈 땅이 키 큰 풀로 가득하더니 네모 반듯하게 터를 닦아 곧 운동회를 할 운동장처럼 말끔했다. 전처럼 배추바다를 이루지도 않았다. 난초네 집이 500미터도 안 남은 곳에서 나는 차를 세우고 운전사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아름드리로 변한 은행나무, 노감주 나무들 속에 파묻혀 있는 그녀의 집이 또렷이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약초 재배를 했었다.

 

“여보게 누가 맘대로 나무를 넣으라 했나? 그건 말이야. 내가 이 묘목의 어머니가 된 심정으로 애정을 듬뿍 실어서 심어야 한다네. 즉 나무를 똑 바로 세운 뒤, 뿌리를 쫘악 펴서 심어야 한다네. 이제 뭔 소린 지 알 것 능가? 그래야지 자네가 나무의 어민 줄 알고 말을 잘 듣는 다니까.”

 

“하하, 참 어르신도, 말을 잘 들었다는 표시가 뭔데요?”

 

“물을 듬뿍 주고 며칠 지나면 뿌리를 견고히 내린 놈은 말을 잘 들은 거네. 또 있어. 밤이면 마치 큰 구멍처럼 뻥 뚫린 느낌을 주는 두엄이 무엇 보다 나무의 어미 노릇을 단단히 하지. 보기에는 저래도 자연은 자연을 알아본다니까. 그래서 저게 꼭 필요해. 나무를 심을 때는 반드시 두엄을 흙과 함께 섞어 넣어야 하거든. 그런 뒤, 겉흙으로 마무리하고 밟아줘야 하는 거야.”

 

갑자기 통증이 내 가슴을 쑤셨다. 난초는 왜 나를 박대할까?

 

내가 횡성군청으로 전근 온 아버지 따라 횡성 중학교로 전학 온 후, 첫 등교 때였다. 다리 아프다고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난초를 내 자전거에 태워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와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난초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부도 잘 하고 재주가 있어서 교내 그림대회에는 매번 1등을 했고 노래자랑에도 나가 차상을 받고는 했다. 나는 친구가 없는 데다가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로 난초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그 뒤 온 가족이 다시 서울로 이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동안 주욱 소식을 끊고 살았었다.

 

“계세요? 계십니까?”

 

“……, 누구세요?”

 

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콧날이 상큼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와서 나를 살폈다. 난초를 닮았다.

 

“난초 씨를 찾아왔는데요.”

 

“……, 누구시죠?”

 

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많은 장독대도 보였다.

 

“난초 씨 친굽니다. 미국에서 20년 만에 나온 석주라면 압니다. 꼭 좀 만나고 미국에 들어가야 해서 그래요.”

 

“성함이 뭐라 하셨죠?”

 

“김석주요.”

 

“잠깐 기다리세요.”

 

양순해 뵈는 처녀가 쉐터 앞자락을 여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 저쪽에는 예의 마당 중심에 무성한 잎에 폭 싸인 등나무가 보였다. 그 뒤로는 옹기 독이 침묵 속에 늘어서 있었다. 문양을 넣어 예쁘고 미끈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푹 퍼진 아지매의 엉덩이같이 투박한 독, 그것들이 100여 개 늘어서 있었다. 헌데 지금은 그 반으로 보였다. 전에는 옹기그릇에다가 난초 할머니가 효소도 담그고 간장 된장도 담궜다.

 

내 검은 머리에 서리 내리 듯, 이 집도 낡아 기와지붕에 풀이 돋아 바람에 하늘거렸다. 20여 년 전 여름, 나와 난초 아버지가 앞뜰에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하늘을 찔렀다. 그의 정성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자란 나무만 남고 사람은 떠났다. 집 뒤로 돌아가 봤다. 홍단풍나무 몇 그루와 내 허리쯤 되는 키작은 은행나무가 2~300평의 뒤뜰 빈 땅 한쪽에 서 있었다. 내 땅인 듯싶은 땅은 선뜻 가름이 어려웠다. 아까 본 처녀가 뒤뜰까지 돌아와 나를 불렀다.

 

“손님, 어머니가 들어오시랍니다.”

 

내가 처녀를 봤다.

 

“아가씬 누구요?”

 

“아 예, 딸이에요.”

 

“그렇군. 엄마를 많이 닮았어. 헌데 엄마가 어데 아픈가?”

 

“예, 엄마가 많이 편찮으세요. 엄만 지금 폐암 환자에요. 그래서 누구와 만나는 것을 무척 싫어하세요.”

 

“그래? 그럼 저 아래 택시를 보내고 들어갈 거요. 먼저 들어가요.”

 

나는 택시를 보내고 되돌아 왔다. 집 앞에 서 있던 난초의 딸내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계량하지 않아 옴팍한 옛 나무 청을 지나 문지방 하나를 넘었다. 간이식 부엌에는 작은 싱크대 하나와 가스레인지가 보였다. 그곳을 지나 다시 나온 처녀를 따라 들어간 방에는 눈이 푹 꺼진 중년 여인이 기운 없이 웃고 있었다.

 

“이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네. 어서 와!”

 

난초가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나를 흔연히 대해 줬다.

 

“잘 지냈어? 난 또 못 보는 줄 알고 속 많이 태웠네.”

 

나도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그렇게 대했다. 난초네 방은 산 쪽에 붙은 창 때문인지 방에서는 풀냄새가 났다. 아! 이 풀냄새, 정말 좋다. 나는 난초를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 여기 공기 좋아. 환자한테는 그만이야.”

 

내가 왔다니까 난초도 생기가 나는지 몸을 꼿꼿이 세우려고 노력했다. 나는 다소 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난초!”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미리 내가 오는 것에 대비해서 집안 청소를 하고 몸단장을 한 듯 깔끔한 모습이었다. 나를 보고 그녀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입 주위의 주름이 칡넝쿨처럼 얽혔다 흩어졌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얼싸안고 서로의 등을 다둑인 다음 풀었다.

 

난초는 강원도에서 여고를 졸업 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 일을 거들었다. 난초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딸 하나를 두고 혼자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충청도로 바다낚시를 갔다가 장마로 차오르는 바닷물에 그만 세상을 놓고 말았다.

 

벽에 걸린 난초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사진이 보였다. 나는 일어나 사진을 향해 묵염했다. 난초 아버지 이영하 씨 말씀이 떠올랐다.

 

“땅이란 전정한 생명의 근원지야. 밟혀 굳어가면서 쓰레기도 받아들여 제 것으로 녹인단 말이야.”

 

하고 웃던 난초 아버지, 타국에 살면서 화나고 쓸쓸할 때면 교훈처럼 그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딸을 데리고 혼자 살면서도 무척 밝았다. 그런 그녀의 아버지도 보고 싶었다.

 

“오빠도 많이 변했네. 오빤 이제 미국에서도 엘리트니까 사는 덴 걱정 없지 뭐. 콜록.”

 

난초가 기침을 했다. 다시 심하게 콜록거렸다.

 

“보시다시피 내가 많이 아파……. 그렇게 되는 데에는 다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몇 년 전에 이곳에 지독한 흉년이 들었었어. 왜냐하면 저 윗마을에 한국에서 제일 큰 골프장이 들어섰고 스키장이 들어섰거든. 그러면서 샘물이 마르고 이 주변 일대의 생태계가 무너지면서 하나둘 사람들마저 떠나기 시작했어. 나는 돈도 궁하지만 무엇 보다 사람이 없으니까 무서웠어. 골프장 인부로 다니면서 취미로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마음이 허전한 건 마찬가지였어. 그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렸어. 거기다가 아버지가 노환으로 앓기 시작했어. 농사일과 약초 재배는 자연히 내 차례였어. 한시도 쉴틈이 없으니까 잠은 잘 잤어. 저애가 내 딸인데 그 때쯤은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병원에 취직이 됐지. 주말이면 저것이 서울과 이곳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야. 콜록콜록. 지금은 아예 직장에 휴직 계를 내고 여기 내려와서 내 시중을 들어.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렸어.”

 

“딸하고 서울로 가지 그랬어?”

 

“그것도 쉽지 않은 게 저 약초들 때문에도 꼼짝도 못해. 가끔 약초 사러오는 사람이 있거든. 거기다가 난 서울이 싫어.”

 

나는 담배 생각이 났지만 참았다. 창 밖을 봤다. 좁은 산길이 너른 도로로 변하였고 고불탕한 산길 역시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숲을 이룬 모감주나무 수백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노감주 나무 1000그루 값 외에 꽤 많은 돈을 보내면서 내 나무도 사서 심어달라고 했었다. 난초는 자신의 집 옆에다가 땅을 사서 은행나무 묘목 수백 그루를 심었노라 했었다.

 

미국 갈 자금을 대겠다는 난초의 말은 나를 들뜨게 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과 산에 걸린 구름, 낮게 뜬 산안개는 나를 태워 항해할 기구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세상의 달콤한 맛을 보기도 전에 군사정부의 구조화된 모순에 대들다가 과외공부선생으로 번 돈마저 다람쥐 도토리 까먹듯 다 까먹고 내 수중에는 땡전 한푼 없었다. 이조의 대원군 시대 경복궁 건립 목적으로 당백전을 걷던 그 시절처럼, 이 땅에 태어난 나는 고달플 대로 고달픈 꿈만 꾸는 청춘이었다. 그때 친구가 용돈 몇 푼을 주면서 아파트 추첨만 하면 필요 없으니 내게 이름 석 자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빚쟁이들이 몰려 왔다. 그때 덫에 걸려 난초 집에 왔었다. 나는 난초가 건넨 돈을 보고 다짐했다. ‘난초야 알았어. 새 세상 새 천지에 가면 새 학문, 새 기술로 너를 구하고 나라를 구할게.’ 했었다. 하늘을 봤다. 내 유년의 별자리, 카시오페아를 찾았다. 쏟아질 듯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 나를 위압하던 산들이 난초가 준 지갑을 받아 쥔 뒤부터는 내가 껴안을 세상의 허리로 다가왔었다. ‘고맙다 난초야! 난초 할머니 고맙습니다.’ 나는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난초, 그녀는 내 인생의 약초고 효소였다. 그랬던 난초였다.

 

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을 개발 수단으로 프로젝트화한 서울이 전국의 은행나무를 모두 사들인다는 소문이었다. 런던이나 중국처럼 기화방초나 기암괴석을 들여놓은 정원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삭막하다거나 음산한 느낌은 주지 않아야겠다는 통치자의 생각이 아마도 길거리에 은행나무라도 심자고 한 모양이었다. 가을이면 노오란 은행잎이 구르는 도심의 정취라니! 하기는 도심에다가 소나무를 심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난초네 집에서도 16그루의 키 큰 은행나무가 팔렸다.

 

“산용이는 이 도라지 좀 절로 옮겨줘.”

 

나는 그들 모자가 달아놓은 도라지 뭉치들을 구석으로 옮겼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포장해서 출하할 물건들이었다. 난초 아버지는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난 뒤부터 체중이 많이 불었다. 코가 잘생긴 난초 아버지 이영하 씨는 양 귀 끝이 희끗하고 구레나룻자국 역시 희끗거렸다. 이영하 씨는 다리도 길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인상은 미남이었다. 하늘 향해 잘 자라주는 나무를 바라보는 이영하 씨의 눈빛은 날아오르는 학을 연상할 정도로 신선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난초 아버지도 좋았다 난초 어머니는 결국 난초 어려서 세상을 떴다.

 

다음 날, 남은 도라지를 캐기 위해 난초와 함께 다랑이 논 옆의 너른 밭으로 갔다. 바람이 시원했다. 맑은 바람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나의 흥분을 자극했다. 나는 도라지꽃이 보이는 밭에다 소쿠리를 내려놓는 난초를 보듬었다. 고랭지의 청정한 도라지 덤불의 쌉싸롬한 향내가 난초에게서 났다. 나는 도라지와 난초에게 취해 있었다.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달콤한 이 입술! 난초가 몸을 움츠렸다. 난초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겠다며 몸을 굳게 닫아 걸었다. 하지만 나는 난초를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 앞날에 대한 답답한 벽을 단번에 헐어준 난초! 우리 난초. 나는 난초를 안고 놓지 않았다.

 

난초는 어제 예초기로 도라지 우듬지를 잘라놓은 것을 들면서 내게 눈을 흘겼다. 나는 호구라는 삼지창 농기구로 도라지 밭을 뒤집었다. 아직 송낙 깊이 눌러써 스님처럼 보이는 순정한 백도라지 꽃을 보면서 도라지 덤불을 예초기로 잘라나갔다. 노동이 좋은 것은 애달픈감정을 바람과 땀으로 씻을 수 있기에 좋았다. 나물이며 약초인 도라지는 값이 쌨다. 내가 미국 가는 데 도라지도 힘을 보탰을 것이다. 난초를 만나 내 인생의 비전을 세웠다. 내 앞날은 선명했고 투자자는 현명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밭 저쪽 지척에 있는 난초를 봤다. 난초는 도라지 캐는 데 정신을 쏟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행운을 자랑하고 싶고 그것이 메아리 되도록 소리치고 싶었다. 산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땅에는 잘린 도라지꽃 무더기가 퇴비로 쌓이고, 밭두렁 저쪽에는 쑥들과 초롱꽃들이 수북했다. 나는 일하던 손을 멈췄다.

 

“저 산 위의 구름 좀 봐!”

 

“금세 구름이 갈라지면서 묘하게도 그 자리에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의 상징인 존 F 케네디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일본 작가 하나는 케네디의 암살에 모건과 록펠러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했었다. 철강 값에 얽힌 자본가가 대통령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대통령을 제거했다. 즉 모건과 록펠러가 암살자 오스월드를 고용했다고 했다. 놀라운 주장이었다. 자본이 세계를 쥐고 흔드는 대통령도 삼키다니!

 

“구름이 존 F 케네디의 모습을 그리는데.”

 

“일이 풀리니까 돌았나? 오빠, 정신 차려!”

 

그때 산꿩이 울었다. 여기는 산 중턱이라 산에 있는 나무들이 낮게 빛났다. 때로는 골짜기에 햇살이 반짝 빛날 때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찰나적인 만남이며 신의 축복이 현실로 반사되는 순간이었다. 도라지꽃과 은난초꽃이 피어나는 산중턱의 호젓한 전경이 미국에 가면 많이 그립겠지. 저 아래 탯줄처럼 비포장 길 하나가 들 가운데 누워있었다. 그 길은 양평으로 가는 길이었다. 논 가운데서 깝짝도요새가 울었다. 새 울음소리에 답하느라 삑삑 도요새가 삑삑삑삑 하고 울었다. 오늘은 도라지 두 두럭을 캐야 했다. 도라지 덤불을 잘라내고 나는 난초가 뒤집어놓은 도라지들을 갈퀴로 긁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내가 캔 도라지들을 무더기 지워 놓았다.

 

“미국에는 언제 가?”

 

“미국에 있는 친구한테서 편지가 와야 해. 내가 들어갈 학교와 내가 그 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친구한테서 편지가 와 봐야 해.”

 

나는 일을 하다 일어나서 하얀 꽃을 뽑아 하늘에 대고 비쳐보며 두 손으로 빙빙 돌렸다. 난초가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다시 뻐꾸기가 울었다. 뒤따라 산꿩이 울었다.

 

“오빠, 미국 어데로 간댔어?‘”

 

“뉴욕, 친구가 거기로 오래.”

 

“오빠, 도라지가 미국 가서 산삼 되어 오는 거야. 알았지?”

 

“그럼 난초와 조국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미국 가면 그곳 첨단 기술을 배워와야 해.”

 

“오빠, 영화에서 보면 미국여자들은 되게 잘났더라. 키도 크고 얼굴이 하얀 게 정말 근사하대, 오빠.”

 

“응.”

 

“오빠 미국 가면 나 되게 심심할텐데……, 어떻게 살지?”

 

청순한 난초가 나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미국 가자니까.”

 

“아버지 홀로 두고 가긴 어딜가.”

 

“사실, 그게 문제야.”

 

“오빠, 만약에 미국 가서 좋은 여자 만나면 나 같은 건 깨끗히 잊고 말겠지?”

 

“미국에 간다 해도 내 인생의 항로를 잡아준 사람인데 어떻게 너를 잊겠니? 그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지.”

 

“그래? 하하. 왠지 기분 좋아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난초에게로 뛰어가 그녀의 어깨에 내 팔을 두르고 볼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충동에 못이겨 그만 내 혀를 그녀 입안에 밀어 넣었다. 도라지꽃 같은 난초가 놀랐다. 상기된 자기 볼을 만지며 내 가슴을 밀쳤다.

 

“오빠! 이제는 이런 짓 안 하기로 했잖아.“

 

“난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는데, 고마워 죽겠고.”

 

나는 도라지 캐다 만 그녀의 손을 가져다 내 볼에 댔다. 유난히 광대뼈가 도두라진 난초의 볼이 다시 빨개졌다. 그리고 그녀는 맥없이 두 팔을 늘어트렸다. 나는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난초야!”

 

 

내 몫으로 사두라는 은행나무는 없는 듯 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걸었다. 우리가 전에 마시던 산 밑 약수터로 향했다. 뒷산에는 산을 깎아 만든 꽤 넓은 배나무밭이 있었다. 이곳은 한 때 우리들의 밀어들이 무르익던 곳이었다. 달빛 아래 배꽃들의 청초하고 새하얀 성찬,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빨아들이는 밤에 내려온 은밀한 눈빛, 신선하고 가냘픈 그 작은 꽃잎들을 보면서 그만 나도 모르게 난초의 손을 잡고 말았던 기억이 났다. 배꽃 가운데 서 있던 난초 역시 배꽃이었다. 약수터는 배나무밭을 가로 질러서 내려가면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를 건너뛰면 다시 산이었으며 그 산 중턱에 약수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옹달샘이 폐쇄되어 거미줄만 어지러웠다. 달 귀신이 산다는 주목나무 아래 있던 무덤은 작아지고 납작해져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었다. 여름이면 산나리가 아름답던 이 산. 아, 이 냄새, 풀냄새 향긋한 산은 짙푸른 초록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후각의 기억은 청각의 그것보다 훨씬 오래 남았다. 산을 내려오자 땅에는 제비꽃이 널려있었다. 사람들은 제비꽃을 앙증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 우아함에 반했었다. 양지꽃 보랏빛 눈을 살짝 뜨고 베시시 웃고 있는 그 고요함이라니. 그리고 그 옆에 핀 보라색 난초꽃, 여기 오기 전에는 난초와 같이 산에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병색 가득한 얼굴을 보자 맥이 빠졌다.

 

내게 그녀는 구원이었다. 그림에 몰두하는 그녀의 어깨 위로 파랑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 모습이 어른댔다. 그녀에 대한 나의 환상은 하나의 바램이었다. 등나무에 오르는 다람쥐는 아직도 여전히 등나무를 오르내리는데 그녀가 내려앉고 있다. 뱅글뱅글 도는 저 다람쥐들은 단지 겨울 날 도토리 몇 알이 그들의 재산 전부였다. 사람처럼 과욕으로 죽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그로 인해 파괴당한 난초는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다. 자연은 사람을 정화시키고 회복시킨다. 헌데……, 나도 지금부터 풀뿌리를 캐고 약초를 구해야겠다.

 

난초도 필경 효소의 밸런스가 깨진 거야. 할머니가 계셨다면 저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텐데……, 나는 아랫채 빈방을 치우고 그 방에 내 짐을 풀기로 했다. 이제 남은 내 인생은 난초 것이다. 나는 마음이 바빴다. 풀뿌리와 약초를 캘 연장을 준비했다.

 

나는 난초의 딸내미를 불렀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는구만.”

 

“선생님이 뭘 아세요?”

 

“내가 뭘 아냐고? 다른 건 다 몰라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만은 안다.”

 

“어머니는 병과 꽤 오래 싸우고 계시지만 엄마는 안대요. 그 병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요.”

 

나는 난초를 붙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우리의 아지트였던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동산은 그동안 많이 자란 칡넝쿨로 덮여 있었다. 난초는 아마 수도 없이 이곳을 오가면서 그때 그 당시를 떠올렸겠지. 내가 미국에 가서도 이 곳을 잊지 못 하듯이. 미국의 집에도 은행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나는 잠시 은행나무 앞에서 멈췄다. 한 손으로는 난초의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나무의 거칠한 부분을 문질렀다. 다른 나무들은 온화한 느낌으로 변해가는 데 은행나무만은 죽은 듯 딱딱하고 강철처럼 차가왔다. 앞산에는 너도밤나무숲이 있었다. 지금쯤 밤꽃 필 준비를 하고 있을까? 밤나무에는 밤송이마다 굳은 결의처럼 밤가시가 다닥거렸다. 나무는 어떤가. 곧게 뻗은 너도밤나무는 가장 자신 있고 위엄 있는 낙엽송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난초네 도라지밭에 서게 되면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을 보듯, 너도밤나무 군락지인 그쪽을 쳐다보고는 했다. 밝은 햇살이 넘실대는 숲속 가득 우짖는 새소리는 늘어진 오후를 들어올렸다. 새소리도 내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다. 난초와 눈이 마주치자 난초가 병색이 가득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마악 지고 있는 배꽃밭으로 난초의 손을 끌었다. 파리한 손을 내게 맡긴 채 그녀는 한 마디 했다.

 

“오빠가 때맞춰 왔네. 배꽃밭에서 맥주 마시던 그 때 말이야.”

 

“미국에 있어도 그때 우리의 모습이 언제나 생생했었어. 그래 배꽃 필 무렵에 오려고 얼마나 애썼다고.”

 

눈처럼 떨어져 내린 배꽃 잎을 둘이 서서 멀거니 바라보았다. 나는 난초 앞으로 나가 내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배꽃 사이를 걸으실까요?”

 

난초가 웃었다. 바람에 베이는 것 같던 그 고운 웃음, 하르르 하르르 하얀 꽃잎이 떨어졌던 그때, 해가 뉘엿거렸다. 붉은 기운이 산 뒤로 번졌다. 그 기운은 서서히 확장해갔다. 낮달이 떴다. 바람이 불었다. 그녀와 내 주위로 꽃잎이 쏟아졌다. 배꽃이파리들이 난초의 홈드레스 위로 떨어졌다. 어디선가 들장미 향기가 날아들었다. 내가 의자에 앉아 무릎을 벌리고, 난초를 내 무릎에 눕게 했다. 배꽃은 바람에 눈처럼 떨어져 난초를 덮기 시작했다.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 쏟아지는군. 오빠가 왔다고 배꽃이파리들이 떼지어 내려오네.”

 

난초는 내가 미국에 가던 해에 떼지어 떨어지는 배꽃이파리를 무수히 그렸었다. 그녀는 이제 내 무릎 위에서 하얀 배꽃으로 누워있었다. 하르르르, 다음 날도 어서 서울로 올라 가자는 나를 막기 위함인지 난초는 내 손을 잡고 배밭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랬다.

 

“오빠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네. 이게 얼마만이야. 오빠가 보고 싶어서 병이 났었나? 이상하네. 그러나저러나 내 병원비로 오빠네 나무를 다 없앴으니 어쩌지?”

 

“그런 걱정마, 어서 낫기나 해. 내일부터는 풀뿌리를 캐기 시작할 거야. 어서 효소를 만들어야지.”

 

배꽃은 여전히 눈처럼 떨어졌다.

 

 

 

 

 

조경선 / 2004년 『월간문학21』 소설문학상 수상. 창작집 『글루미 선데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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