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브라더스 베이비
이지민
차 안에서의 죽음은 상상해 본 적 없다. 그건 내가 정말 경멸하는 부류, 나약하고 간편하고 평범하고 정말 ‘뽀대’ 안 나는 죽음이니까. 핸들만 살짝 꺾어도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건 싱겁고 허무하다. 현장에서도 카 스턴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BMW끼리 처박아 떼굴떼굴 나뒹굴게 해도 그건 축제의 불꽃놀이 같은 것, 사연 없는 자들을 위한 구경거리일 뿐. 시속 150Km로 달려오는 차에 받히거나 보닛 위에 떨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도 고통에 비해 쾌감은 별로다. 차갑고 묵직한 쇠붙이와는 뭔가 주거니 받거니 짜르르 찌르르한 맛이 부족하다. 결투라는 건 결국 같은 종끼리 붙는 게 제 맛이다.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 선생의 그 유명한 소와의 대결을 기록한 동영상을 보고 솔직히 조금 실망했었다. 인간에게 뿔을 잡힌 채 당수 세례를 받는 소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혼돈스럽고 치욕적이고 구차하여 ‘이러느니 차라리 죽고야 말지’ 하는 거의 반 자살하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역시 인간은 인간과 싸워야 도리고 순리다. 종목과 체급과 단수도 필요 없다. 물론 다구발은 철저히 지양해야 한다. 파이프나 야구방망이 휘두르는 놈 치고 진정한 파이터를 보지 못했다. 무대 위의 발레리노는 엄격히 맨몸으로 비상해야 한다. 나는 최상위의 싸움꾼은 국립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와 결국 동급이라고 생각한다. 발레리노와 파이터는 몸뚱아리 하나로 세상과 맞서는 존재들이다. 비슷한 인간 유형으로 노숙자도 들 수 있겠다. 온몸으로 타인에게서 갈채를, 승리를, 동전을 쟁취해야 하는 진짜 남자들이다. 약간의 실수와 헛방과 비바람이 그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아마 무술감독이 아니라 발레리노나 노숙자가 됐어도 나는 성공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혼이 점화되는 그 순간의 긴장을 마다한 적이 없는 나니까. 특히, 상대가 날리는 격노한 날쎈 주먹을 나는 얼마나 사랑했는가. 4번 타자는 홈런을 칠 수 있을지 없을지 야구공이 투수의 글러브를 떠나는 순간 알 수 있다. 조그만 야구공이 수박만큼 커져서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날아오는 마법의 환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상대가 내 코뼈를 무너뜨리기 위해 주먹을 뻗는 순간 그 짧은 찰나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 나선형의 주름이 시나몬롤처럼 먹음직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 그 다음부터는 설령 죽도록 얻어터진다 해도 결코 죽는 일은 없으며 어떻게든 그 싸움은 이기게 되어 있다. 앞에 있는 자식이 제아무리 핵탄두 주먹을 휘둘러댄다 해도 나의 발랄한 영혼의 스텝을 따라오지는 못한다. 그건 내가 나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경이로운 유산이다. 나의 중남미적 열정은 어머니로부터 비정한 무사의 본능은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내 눈에는 태생적인 분노와 살기가 감돌았다. 그리하여 가장 많이 들었던 충고는, 너 이 자식, 그러다 맞아 죽을 줄 알아. 그렇다. 나도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장렬하게 피를 쏟으며 길 위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는 상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붙잡은 거대한 환상이었다. 장부로 태어나 한 번 죽는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되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외진 산기슭 낭떠러지가 보이는 공터 렌터카 안에서 추접스럽게 연탄불을 피워 놓고 정신줄 빠지기만 기다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아, 통곡이 절로 나온다만 그마저 아끼기로 한다. 수많은 액션 씬을 찍어 본 나지만 이런 무액션의 액션은 처음이므로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매번 촬영 전 느끼는 날선 흥분이 온몸을 감싼다. 과연 무사히 내 인생 최후의 미장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포기하거나 후회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조용히 깔끔히 흔적 없이 처리해야 한다. 이 차가 내 차라면 속이 좀 편했을 텐데. 어제 그 렌터카 직원, 인상이 좋았는데 미안하게 됐다. 그는 내 얼굴을 힐끗힐끗 살피더니 “탤런트죠? 영화배우 맞죠? 아아, 어디서 봤는데.” 꼬치꼬치 캐물으며 궁금해했다. 쩔뚝이는 내 다리를 보더니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리기도 했다. “어디 다치셨어요? 운전하실 수 있겠어요?” 그는 분명 내가 출연한 작품 속에서 나를 보았을 것이다. 이름과 얼굴은 모르더라도 나의 유연한 발놀림과 화려한 검술과 우아한 낙법은 기억할 것이다. 여자 관객들은 주로 내가 상대하는 남자 주연 배우의 허풍 섞인 할리우드 액션에 속아넘어가지만 남자 관객들 중에는 나의 치밀하고 유려한 폭력 미학을 즉각 이해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세상에는 그렇게 진짜를 알아보는 자들이 있는 법이다. 싸구려 조폭 영화에서 사시미칼에 맞는 진부한 씬이라도 내가 하면 다르니까. 정확히 칼침이 꽂히는 내장 기관의 위치에 따라 허리의 반동, 즉 튕기는 바운스의 고저가 달라진다. 심장을 뽑힌 것처럼 과장을 해서도 안 되고 대충 무릎을 꿇으며 물러나서도 안 된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감각을 세포 하나하나에 모내기하듯 정성들여 심어 표현해야 한다. 이런 나의 완벽주의로 인해 항상 감독들과 마찰을 빚은 것도 사실이다. 감독들은 내가 정확한 ‘합’을 짜주기만 바란다. 그럴싸하게 맞고 터지고 뻗는 동선을 경제적으로 구성해 필름의 낭비 없이 완수해 내기를 바란다. 일종의 완벽한 폭력의 매스 게임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 폭력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드라마다. 예상보다 덜 아플 수도 있으나 덜 모욕적인 경우는 없다. 순서대로 계산된 이단 옆차기를 주고받더라도 마치 태어나서 처음 맞는 것처럼 충격과 두려움 속에 복수를 다짐하며 분연히 비틀비틀 일어서야만 한다. 바로 앞에서 설쳐대고 있는 녀석이 나보다 개런티 천 배 높은 톱스타일지라도 감히 이 몸에 손톱만큼 상처를 냈다는 이유로 당장 모가지를 뽑을 듯이 덤벼야 하는 것이다. 컷! 컷! 야! 너 오버하지 말랬지! 저 자식 또 지가 주인공인 줄 안다니까!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감독들이 나만 보면 펄펄 뛰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나의 백 퍼센트 순정주의 리얼리티 액션관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거세된 고양이처럼 길들여졌으나 처음 이 바닥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살인병기, 액션의 탕아, 권법의 아이돌이었다. 어쩔 때는 솟구치는 피를 주체 못해 17대 1, 떼 씬에서 진짜 폭력을 행사해 조감독까지 때려눕히고 심지어 주인공까지 구급차에 실려 보낸 적도 있었다. 진정 똥 오줌 구별 못하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난 내가 당연히 불멸의 액션 배우가 될 줄 알았으니까. 마치 나의 아버지처럼.
애석하게도 나는 진짜 배우가 될 수 없었다. 오디션에서 대사만 치면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내 아름다운 신체에서 유일하게 안타까운 지점이 바로 혀였다. 유독 짧은 혀는 모든 대사를 코믹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감독님이 나를 유명 무술감독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 자식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예술이야. 돌려차기를 하는데 무슨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승무를 보는 줄 알았다니까. 훗날 나의 사부가 될 무술감독이 물었다. 너 임마, 이소룡, 성룡, 이연걸이 되고 싶으냐? 중국말도 못하는 새끼가. 나는 노려보며 반항심을 숨기지 않았다. 스턴트맨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너 임마, 우리는 강해. 강하기 때문에 더 찬란하게 부서질 수 있는 거야.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야. 사부는 나를 길들이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내가 현장에서 혼자 튀려고 ‘합’을 깨고 나올 때마다 사부는 감독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부님. 저한테는 이 모든 것이 가짜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아프지도 않은데 죽는 시늉을 해야 합니까. 아무리 조폭이라도 사시미칼을 저 따위로 쑤셔대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저건 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사부는 한숨을 쉬며 나를 타일렀다. 그래, 네가 마음만 먹으면 쟤들 죽이는 게 일이겠냐. 그러나 누군가를 죽이는 건 인간의 영원한 꿈. 영화는 그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거지. 우리는 그 핏빛 악몽을 현실로 느끼게 해줘야 해. 아주 실감나게 고통을, 폭력을, 죽음을 보여주는 게 우리의 임무야, 뭘 알고 말해, 새끼야. 사부님. 그런데 뭘 모르던 제가 그 영원한 꿈을 이루었다는 게 믿어지십니까. 사부님이 그러셨죠. 너의 주먹에는 꿈이 너무 많아. 꿈은 누군가를 다치게 해. 언젠가 일을 저지르게 돼 있어. 사부님이 저를 버리셨던 이유도 바로 언젠가 분명 헛되이 명멸할 저의 꿈 때문이었죠. 결국 제 꿈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걸까요, 사부님. 갑자기 사부님이 가장 존경했던 파이터, 무하마드 알리가 생각나는군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이 말은 그의 단짝 친구 분디니가 한 말이죠, 사부님은 알리가 위대한 이유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서가 아니라고, 그가 권투가 아니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권투를 하기 때문이라 하셨죠. 젠장,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저도 그랬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그것 때문에 오르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한 번뿐인 인생을 건 것이죠. 제 영혼을 뿌리째 거대하고 황량한 무예의 사막 속에 심어 놓은 것은 바로 운명이었습니다. 사부님은 늘 말씀하셨죠.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틀림없이 전생에 맞아죽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게 억울해 끊임없는 ‘도장깨기’를 통해 최고의 남자가 되려 하는 거라고. 아닙니다. 사부님은 끝까지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으셨지만, 전 태어날 때부터 강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저는 홍콩 무협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간판 배우, 불세출의 무협 스타,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광란의 떠돌이 검객, 불멸의 명작 〈외다리협객〉의 배우 왕추의 아들이란 말이라고요! 왕추? 네가 왕추 아들이면 울 아빠는 이소룡이다. 사부님의 부친은 이소룡이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는 왕추가 맞다니까요. 그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선혈이 낭자하는 폭력미학의 정수인 그의 검술과 냉정하고 잔혹한 표정 연기를 따라해 본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보다 위대한 배우는 많았으나 그보다 잔인한 배우는 없었다. 늘 흰옷을 입고 나왔으나 영화가 끝날 때 그의 옷은 늘 붉은 핏빛이었다. 강호를 떠나 산야에 은거하는 그를 찾아낸 악의 무리들이 창과 검과 채찍, 화살로 그의 신체를 절단 내고 그의 정신을 갈가리 찢어 놓으려 했으나 극한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왕추는 설령 스스로 검을 들어 자기 다리를 자를지언정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의 아버지, 왕추다. 한 손으로는 쏟아지는 창자를 부여잡고서 한 손으로는 마지막 일격을 가할 검을 놓지 않던, 지옥에서 온 피의 메시아, 내게 뼈와 살을 물려준 진정한 스승, 내 영혼 깊숙이 감추어 놓은 천하의 비급, 영원히 잃어버린 나만의 명검…….
사람들은 그에게서 피비린내를 맡지만 난 그에게서 코스모스 향기를 맡는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코스모스 들판 위로 창을 든 사람들이 날아다닌다. 잠자리들은 투명 날개를 달았고 사람들은 색이 바랜 옛날 옷을 입었다. 창을 든 사람들이 날아오르면 하얀 태양은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분홍 꽃잎들은 소리 없이 쓰러진다. 처녀는 성문 뒤에 숨어서 흰색의 옛날 옷을 입은 남자를 훔쳐본다. 상투를 튼 것처럼 머리를 올려 묶은 남자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 그의 눈썹은 독수리의 날개처럼 검고 세차고 눈빛은 차갑다. 처녀는 적의 무리에 포위된 그가 창에 찔릴 때마다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린다. 카메라맨이 중국말로 펄쩍뛰며 처녀한테 비키라고 소리친다. 처녀는 창피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망가고 검을 든 남자는 그녀가 흘리고 간 코스모스를 줍는다. 코스모스 향기를 맡는 그의 입가에 바람만 알 수 있는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수원성 앞 수원여관의 식모 처녀,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내 어머니가 뒷마당에서 이불 빨래를 하고 있다. 자주색 고무다라에 하얀 발을 담그고 뽁찍뽁찍 물거품 터지는 소리를 듣는다. 수원성에서 영화를 찍고 돌아온 홍콩 스태프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빨랫감을 내놓는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한국말 소리에 처녀는 고개를 든다. 흰옷을 입고 있던 남자의 배가 선연한 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 처녀가 놀라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걸 남자가 잡는다. 부끄러워 두 뺨이 달아오른 처녀를 보고 남자가 조용히 웃는다. 처녀는 밤에 만두를 빚는다. 몰래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고기와 부추를 잔뜩 넣은 포동포동한 만두를 삶는다. 처녀는 곰다방 미스 리한테 빌린 보라색 에나멜 뾰족구두를 신고 한 손에는 만두가 든 보자기를 들고 수원성으로 간다. 휘영청 보름달 아래 성곽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남자배우가 가죽잠바를 입고서 처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서걱서걱 모래가 흩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성곽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달빛에 젖어 한들대는 코스모스 들판이 펼쳐진다. 남자배우가 중국말로 웃으며 무어라 말한다. 처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날 밤 처녀는 코스모스를 짓이기고 누워 짙푸른 우주를 보며 그 많은 별 가운데에서 가장 작고 외로운 별, ‘나’를 가져온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나는 홀로 어둠 속에서 빛을 감춘 채 자란다.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잔뜩 흥분해 집에 들어와 나를 목욕 시키고 머리를 빗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화장을 하고 보라색 에나멜 뾰족구두를 신은 모습을 본다. 어머니는 택시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간다. 눈이 내린 남한산성은 하얀 동화 속의 나라다. 어머니는 새하얀 눈밭에 꼭꼭 도장을 찍으며 찬바람이 사나운 남한산성을 오른다. 세상은 눈이 아리도록 하얗다. 나는 점점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눈앞에 놀랍고 신기한 장면이 펼쳐진다. 옛날 옷을 입은 남자들이 은빛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날아다니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흰옷을 입은 남자를 에워싼 후 올가미를 던져 붙잡는다. 뾰족한 창으로 가슴을 찌르자 눈밭에 피가 튀긴다. 흰옷을 입은 남자의 다리가 뎅강 눈밭 위로 떨어진다. 그 순간 내 영혼은 내 육체를 찢으며 세상을 향하여 탈출을 감행한다. 날카로운 겨울 햇살 조각들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그는 다리를 잃었지만 울부짖지 않는다. 칼을 힘껏 쥐고 있는 그의 피투성이 주먹을 본다. 아름답다, 그 단어를 나는 처음으로 이해한다. 어머니의 두 손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어머니는 사람들을 헤치고서 나를 그 흰옷 입은 남자한테 끌고 간다.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칼만 바라볼 뿐 무서워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날 어머니는 울면서 나를 끌고 다시 산을 내려온다. 그러나 어머니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다. 어머니가 그토록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그날 이후 다시는 보지 못한다.
내가 아버지를 마음껏 보게 된 것은 80년대 비디오테이프가 도입된 이후다. 그의 모든 영화를 비디오로 보고 또 보면서 나는 뜨거운 피의 세례를 받았고, 드디어 그의 아들로 새로이 태어났다. 위대한 믿음이 내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 않는 진정한 남아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밀스런 혈통에 대한 과신은 언제나 내 마지막 화살이었다. 저, 저, 저 똘아이 새끼,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왔나, 대체 뭘 믿고 지랄이야. 단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얻어터진 녀석들은 겁에 질린 채 내 근원을 궁금해 했다. 그들은 나와 저들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존재의 증명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양아치 자식들이 양아치가 됐을까나. 내 무도의 길은 끊임없는 합의금을 수반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슴 벅찬 여정이었다. 언젠가는 〈외다리협객〉도 놀라서 무릎을 칠 나만의 무공을 펼치겠다는 꿈은 진정 허허롭고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아버지를 만나지는 못하였다. 비디오 시장이 소멸되던 즈음, 《스크린》 잡지의 해외소식란에서 60, 70년대 홍콩 무협영화계의 전성기를 이끈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간판 배우 왕추가 간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읽었다. 뚜두둑 내 안에서 영혼의 매듭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와 나를 이어 주는 끈이 내 순결하고 비밀스런 믿음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못 쓸쓸했다. 그때 마침 알고 지내던 CF 감독 형한테서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 홍보 광고를 맡아 설악산에서 극비리에 촬영을 할 예정인데 그 모델이 세계적인 중국 무협배우 L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우상인 L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도 기쁘지만 더 놀랄 일이 있었다. L이 촬영 현장에 꼭 데리고 다닌다는 사부의 존재였다. L의 사부가 내 아버지 왕추의 동료 배우이자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연결된 작은 단서라도 주워들을 수 있을까 싶어 설악산으로 갔다. 스태프들이 힘들게 HMI 조명기구들과 지미집을 들고 산을 올라 촬영 준비를 끝내 놓자 L과 그의 사부가 케이블카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L의 사부는 전직 무협 배우라기보다 구룡반도의 딤섬집 사장 같았다. 나는 그에게 영어로 정중히 내 소개를 했다. 69년도 수원성에서 로케이션 했던 <절대쌍검>의 촬영 현장에 밥을 나르던 여관 식모와 왕추의 관계, 그리고 그의 숨겨진 아들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L의 사부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왕추와 평생 친구로 지냈지만 한국에 아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며 화를 냈다. 그는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냉정하게 못을 박았다. 전혀 왕추를 닮지 않았구만. 촬영이 시작되었다. 영화 속에서 나의 아드레날린을 펌프질하던 L은 충격적일 정도로 성의 없고 무기력했다. 그늘에서 담배만 뻑뻑 피우고 놀다가 사인이 떨어지면 사부가 일러주는 고대로 무술 동작만 취하고 다시 쪼르르 그늘로 가 앉았다. 어떤 기백도, 의기도, 도약도 찾을 수 없는 엔터테이너 무사의 안일함은 내게 모욕을 줬다. 아마 그 순간 나는 ‘빡’이 나갔던 것 같다. 나는 L 앞으로 갔다. 그렇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설악산 프리 파이터의 난데없는 등장에 L은 당황했으나 역시 L이었다. 그는 마치 나와의 리허설을 사전에 마친 것처럼 내 주먹의 동선을 정확히 꿰고 절도 있는 방어를 했고,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는 대륙의 쿵푸 챔피언을 상대로 내가 지금 어떤 역사적 대전을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랄 발광을 했다. 나는 감히 내 우상을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저 자식 끌어내. 역시 미친놈 잡는 데는 매가 최고인가. 나는 L의 사부에게 제압당했다. 모두들 L에게 엎드려 사과를 했다. L은 장부의 여유 있는 웃음으로 나를 용서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든 L의 콧김이라도 맡고 싶은 무명의 열혈 액션 배우라고 설명했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나는 통곡하고 싶었다. L의 사부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딱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힘이란 그 사람 자체이지. 그대의 힘이 바로 그대인 거야. 그리고 넌지시 비밀을 알려주었다. 왕추는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었다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결정적 소품들을 정리해 본다. 라이터와, 수갑, 열쇠는 버리고, 유서는 없다. 유서를 쓴다면 지금이 기회일 것이다. 유서가 없더라도 신원만 파악된다면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 일쯤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최고 무술감독 차 안에서 연탄가스 자살하다. 영화감이다. 감독만 잘 만나면 칸 비경쟁부문 출품 정도는 가능하리라 본다. 아쉽다, 판권은 내가 가져야 하는데. 사람들은 결국 내 죽음을 배우 K와 연관 지을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든 말든, 진실을 감당하든 말든 이제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나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했음을 그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람이 버티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견딜 수 있지만 그 믿음이 사라졌을 때는 더 거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내 열정과 자긍심의 근원으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나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더 강한 모습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이 몸이 짱개집 배달부와 여관집 식모아이의 불장난으로 태어났을 리 없었다. 세상은 나에게 비천한 태생을 강요했으나 나는 거부했다. 나는 아버지를 선택한 최초의 아들이 되기로 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액션 전문 배우로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카메라 앞에서 나는 고통스럽게 넘어지고 찢기고 부서졌다. 때로는 아프지 않아도 죽는 척했고 척추가 어긋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벌떡벌떡 일어섰다. 힘이란 그 사람 자체인 것, 나의 힘이 바로 나인 것. 내게는 내 힘을 나눠 쓰는 또 다른 자아가 있었다. 또 다른 인생, 다분히 폭력적인 인생을 연기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내 인생은 살벌한 투쟁의 형식으로 영원의 시간 속에 기록되고 있었다. 죽어서 납골당에 안치되느니 필름수장고에 보관된 잊힌 3류 영화의 단역으로나마 영원히 살고 싶었다. 나는 완벽하게 장르의 일부가 되었다. 어차피 누군가의 인생이란 결국 어떤 한 장르로 설명될 수 있는 법이니. 평생 코미디만 찍다가 스릴러만 찍다가 포르노만 찍다가 쫑나는 게 인생이니까. 간혹 어떤 미친놈들은 UFO에 미쳐서 SF를 찍기도 하더만. 어쨌거나 나는 나의 장르에 충실했다. 얘들아, 제일 짜증나는 게 뭔지 아냐. 액션 찍다 갑자기 멜로로 훽 가는 거다. 저번에는 피디 새끼가 중간에 제작비를 슈킹까는 바람에 갑자기 카 스턴트 씬이 사라지더니 여배우가 아주 지 세상을 만나더군. 감독이 그 여자랑 사귀든가, 남자배우가 확 꽂혔든가 둘 중 하나지. 아, 짜증나. 액션을 모독하는 새끼들. 여배우는 액션의 적이었다. 여배우는 호박꽃이든 장미꽃이든 무조건 꽃으로 남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가장 경멸하는 장면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 때문에 조직을 배신해 추격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이었다. 남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약해진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원래 약하고 못난 놈인지라 여자로 인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무너지고야 만 내 믿음 중 하나다. 송이는 주인공의 소속사에서 억지로 박아 놓은 신인급 조연이었다. 어렵사리 영화에 한 번 얼굴을 내밀었으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봄날의 꽃 한 송이. 이름도 아예 한송이였다. 저, 칼 쓰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 그녀는 드라마에 캐스팅됐다며 검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한송이에게 손때 묻은 연습용 죽도를 주었다. 그래, 죽도로 한번 죽어 봐라. 머리! 손목! 허리! 발바닥이 시커메지고 성대가 너덜해질 때까지 한송이는 도장 마루를 구르고 또 굴렀다. 배우가 발성이 그 따위야, 배에서 소리를 내란 말이다! 한송이는 눈물을 머금고 이를 갈았다. 내가 스케줄이 없어서 이러지. 성공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가소롭구나. 그 따위로 하면서 뭘 노리겠다고. 일검일살. 단 한 번 검을 잡기 위해 백 번을 기다려야 한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까. 송이는 나의 첫 여제자였다. 귀여웠다. 아, 여제자는 귀엽구나. 그동안 여자 배우와 붙는 씬은 거의 찍은 적이 없었다. 나는 여배우란 존재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뛰어난 여배우는 펄 벅 같은 여류 대문호나 긴자의 최고급 마담과 동급이었다. 그녀들은 인간에 대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잘 알았다. 그러나 송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류 여배우가 될 자질은 없어 보였다. 나는 문득 이 피바람 부는 강호를 떠나 산야에 은거하며 사랑하는 여인네와 함께 유유자적 낚시나 하는 농군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이태원 옥탑방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사실 유명한 홍콩 무협 배우셨단다. 어머, 그런 뻥도 통하나? 나에게는 협객의 피와 광대의 피가 흐르고 있지. 한마디로, 나는 이 현실 세계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다. 이제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명예를 걸고, 목숨을 걸고 내게 싸움을 걸지 않으니까. 심심하고 나른한 세상이지. 그래서 내게는 카메라가 필요한 것이지. 어머, 그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잖아. 그리고 자기는 주로 남자 주연한테 맞아 죽잖아. 이래서 네가 어리석다는 거다. 나처럼 장렬하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이 흔한 듯싶으냐. 그건 그래. 자기 죽는 연기는 정말 짱이야. 그 순간만은 정말 자기가 주인공 같아. 송이야. 누구든 죽는 순간만은 자기가 주인공이란다. 미안하구나. 송이야. 너에게만은 눈물 한 방울 헛되이 낭비 않는 진정 영웅으로 남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 헛된 욕망이 결국 나를 여기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르지. 내가 지방 촬영 가 있는 사이, 송이는 소속사 사장한테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오빠. 나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전화기를 붙잡고 송이는 눈물을 흘렸다. 이런이런, 누구도 여배우를 집에 가둘 수는 없는 법. 여배우를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거울 없는 방에 가두고 문을 잠그는 것. 아름다움을 확인받지 못하는 여배우는 피가 마른다. 송이는 나를 떠나 비로소 자유롭게 날기 시작했다. 그녀는 멜로의 여왕이 되었다. 저런저런, 감히 내가 멜로의 여왕한테 검을 가르쳤구나. 송이는 점점 아름다워졌고 점점 고독해졌다. 그래서 아름답고 고독한 여배우가 저지르는 결정적 실수를 하게 되었다. 어느 따분한 멜로 영화에서 상대 배우인 K와 진짜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K는 작품마다 함께 하는 여배우를 건드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촉촉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배우의 가장 아름다운 한순간을 찬양한 후 부수어버렸다. 송이는 K에게 영혼을 바쳤다. 영혼을 잃은 그녀는 빛을 잃었다. 빛을 잃은 여배우는 배우로도 여자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송이는 K에게 버림받았다. K는 곧 다른 상대 배우와 공개 연인이 되었다. 송이는 거울마저 뺏긴 가련한 여배우가 되어 골방에 갇혀버렸다. 내가 다시 송이를 찾았을 때, 송이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극심한 우울증이 부른 몇 번의 과도한 성형수술은 송이를 과거의 찬란했던 흔적만 남은 폐허의 유적지로 만들어버렸다. 뭐냐,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건, 그 놈이냐? 남자들은 웃겨. 지들이 여자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놓을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더라. 여자는 한 놈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고. 미안하구나. 오빠가 왜 미안해. 그 순간 사랑이라고 믿은 내가 바보지. 결국 내 믿음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나쁜 놈. 지 새끼를 임신한 몸으로 촬영장까지 찾아간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아. 나는 송이를 책임지고 싶었다. 송이는 눈물까지 보이며 역정을 냈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고! 어느 날부터인가 송이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일 년 후, 관서지방 야쿠자 오야붕의 세컨드가 되었다는 풍문이 들려왔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동북아시아에 태풍이 관통하던 어느 날 밤,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오빠. 송이의 목소리는 태풍 한가운데 있었다. 그럼. 난 잘살아. 긴자 샤넬 매장 문 닫고 혼자 쇼핑해 본 여자 전 세계에 몇 명 없을 거야. 호호호. 송이의 목소리는 귀신 같았다. 오빠가 그랬지.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칼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오빠 말이 맞아. 결국 한 남자 때문이야. 죽이고 싶은 놈은 그 놈뿐인 거야. 송이야! 송이야! 나의 여제자는 그렇게 나의 가르침을 따랐다. 술에 취한 한국 마담이 자고 있는 야쿠자 오야붕의 등을 찌르고 수감된 사건은 재일교포 사회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가슴이 들짐승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정말 몇 번이고 야쿠자 아지트를 급습해 피의 도륙을 자행하는 계획을 세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떠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녀가 결국 견디지 못한 공포와 모독과 절망, 저주와 회한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여리고 착한 한 송이 꽃은 봄이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 봄이 그 꽃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기에.
어서, 여자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보다 나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는 연탄에 불을 붙이기로 한다. 옛 여자 때문에 우는 짓은 기운 남아도는 자식들이나 하는 짓이다. 일단 뒷좌석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연탄을 세운 후 돌돌 만 종이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연탄 구멍에 조심히 쑤셔 박는다. 금방 손이 시커메진다. 벌써부터 메케한 일산화탄소가 뇌 속으로 스멀스멀 퍼지는 것 같다. 아마 이쯤의 고통이지 않을까 싶다. 혓바닥을 빼서 정수리까지 잡아당긴 후 머리털을 모근까지 일일이 다 잡아 뺀 후 콧구멍을 핸드믹서로 갈아버리는 뭐 그쯤의 아픔이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 고통의 시간을 잘 견뎌야 하리라. 다시 앞자리의 운전석으로 넘어간다. 역시 운명을 가르는 것은 의지다. 중간에 포기하고 뛰쳐나가면 꼴만 우스워진다. 비극을 연기했는데 희극이 되는 건 배우의 책임이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수갑까지 준비했다. 일산화탄소가 완전히 내 혈관을 장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과연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 아직도 내 안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은 더 이상 이성과 감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을 떠안게 됐을 때 기도를 드리고 그 정성과 진심을 증명할 희생양을 찾는다. 내 죄의 희생양이 내가 된다니,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미 운명은 정해져있고 나는 한눈 팔지 않고 그 길을 착실히 따른 것인지 모른다. 다음 작품인 퓨전 SF 무협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K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송이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복수에 리얼리티란 존재하는가. 복수란 결국 안전을 추구하는 자들의 마스터베이션 판타지가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를 훈련시키고, 액션 씬마다 합을 짜고, 그의 상대가 되어 검술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이 다가 아닌가. 송이의 인생을 망친 것이 전적으로 K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나는 과연 떳떳한가. 어떤 불길한 예감 때문인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K를 더욱 이성적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진짜 칼을 들고도 살의의 눈빛을 갖지 않는 남자는 믿지 않는다. 이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에게는 마지막이 멀지 않다. K는 능숙하고 영리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재수 없는 새끼들, 예를 들면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랑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남자배우 K가 그러했다. 촬영장 주변에는 공항에서부터 택시를 대절해서 달려온 일본 아줌마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 감독님. 여기서 와이어 쓰면 올드하지 않나요. 감독님, 검도 5단이시라면서요. 요즘 무협은 CG가 배렸어요. 옛날 홍콩 쇼브라더스 시절의 왕추, 강대위, 적룡 뭐 그런 배우들의 하드보일드한 독기가 없잖아요. 짜식이 나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남자의 독기란 아름다운 것이지요, 눈부시고 처연하고 서늘한, 가령 자기 애를 밴 여자를 매정하게 버릴 수 있는 남자만 가질 수 있는. K가 눈을 찡긋거리며 묘하게 웃었다. 그의 손목 힘이 달라졌다. 우리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호통을 쳤다. 어허어허, 겨우 그 정도 포스로 상대의 영혼에 기스라도 낼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인이 유곽에 팔려가 시정잡배들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여 꽃 같은 육체가 걸레처럼 너덜해진 모습을 보게 된 사내의 심정으로 칼을 뽑으란 말이다! 촬영장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무술감독 돌았나 봐. 애제자인 석동이까지 나를 말렸다. 형, 요즘 왜 그러세요. 눈의 광기 좀 푸세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채석장 씬을 찍을 차례였다. 우주연합군의 간택으로 날 때부터 뇌 속에 최고 무사의 비급이 장착된 K가 자신을 처단하러 온 적군 행성의 터미네이터 자객들을 처치하는 장면으로 K는 나와 석동이를 상대해야 했다. K가 슛 들어가기 전에 내 귀에 대고 콧김을 쏘며 비웃었다. 감독님, 나한테 왜 이러는지는 알겠는데, 뭐 어쩌라고, 송이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야, 난 또 감독님이 그렇게 멜로에 목 매는 인간인 줄 몰랐네. 씬 넘버 백하나. 테이크 넘버 원. 촬영은 시작되었다. 팽팽한 긴장과 침묵 속에 죽창 부딪히는 소리가 쩡쩡하게 울려 퍼졌다. 컷. 감독이 흥분했다. 와, 실전 같아. 실전. 석동이가 나를 말렸다. 형, 왜 그러세요. 미끄러질 뻔했잖아요. 안 그래도 K네 소속사 실장까지 와서 자꾸 대역으로 가자는데. 나는 땀을 닦으며 K를 보았다. 그는 여유 넘치는 조소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드디어 그의 눈에도 살기가 퍼졌다. 과연, 이것은 액션인가 멜로인가. 그 순간 깨달았다. 남자의 모든 액션에는 실패한 멜로가 숨어 있음을. 앙각 샷을 찍기 위해 감독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날카로운 벼랑 끝에 우리 셋만 남았다. 석동이가 먼저 쓰러지고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나는 카메라 앞에서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내가 바로 고통과 두려움, 고독과 죽음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나만의 액션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액션! 저편에서 조감독이 신호를 줬다. 차앙, 차아앙, 취이익, 취익, 죽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청명했다. 이미 합은 깨졌다. 당황한 석동이가 내 앞을 막았다. 형, 제발. 나는 석동이를 밀어내려다가 미끄러지며 제압당했다. 조감독이 무전기를 들고서 허둥거렸다. K가 죽창 끝으로 내 배를 꾸욱 누르며 비웃었다. 황당한 새끼, 아주 영화를 찍고 있네. K가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에게 세상이 모르는 이 거룩한 비밀만은 알려야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영화이지 않은 적이 없다, 내가 바로 영화이니라, 이 개새끼야!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검에게도 기회는 한 번뿐, 그리하여 마지막 비상, 새들이 푸드득 세상을 버리고 날아오르고, 석동이도 덩달아 날아오르고, 계집애 같은 비명을 지르며 K는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고, 석동이는 하얀 뭉게구름을 양 어깨에 날개처럼 달고서 사라지고, 그의 손을 잡으려 달려간 나의 두 발은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K, 병신이 된 건 나, 그리고 석동이. 이래서 이래서 다스베이더가 오비완 캐노비를 죽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제자는 언젠가 스승을 찔러야 한다. 착한 스물두 살의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 석동이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미안하다, 석동아. 이 못난 스승을 용서하지 말거라. 누구도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버려짐이 마땅하다. 다리를 쩔뚝이는 무술감독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제자를 죽음으로 내몬 스승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 한때 내가 세상에 내놓았던 경이로운 쾌감의 순간은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내 주먹이 꾸었던 꿈은 죽음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기에 지금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가장 나약한 최후를 선택하는 것이다. 밀폐된 차 안의 대기가 무시무시하게 꿈틀거린다. 눈을 감는다. 현관을 질주하던 산소가 정체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저절로 기도하는 손이 된다. 나를 원망하는 인간들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해달라고 빌지는 않을 것이다. 아, 하늘하늘, 코스모스 향기가 바람에 날린다, 반짝반짝 눈송이가 흩어진다, 하얀 눈밭에 분홍 꽃잎들이 떨어진다, 옛날 옷을 입은 남자들이 쉭쉭 날아다닌다, 흰옷을 입은 남자를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무섭게 쫓아간다, 흰옷을 입은 남자의 가슴이 온통 붉은 피로 물든다, 그는 고통을 모르는 자, 저, 저 비정한 눈빛으로 날아오르는 그를 보아라, 어쩌면 그는 천사이거나 죽음의 사신이거나, 혹은, 렌터카 직원이거나……. 아아, 헛것이 보인다. 목구멍과 눈알이 타들어가고 머리는 산산조각 부서지는 가운데, 바로 앞에서 앞 유리를 두드리고 있는 것은 어제 그 렌터카 직원이 아닌가. 문을 열어달라고 펄쩍펄쩍 뛰며 어쭈 저 자식이 지금 울고 있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GPS로 추적했다 쳐도 참 부지런도 하지, 렌터카 직원은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며 질질 짜고 있다, 아, 성가신 자식. 그의 머리 위로 코스모스 꽃잎들이 날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가락 까딱할 기운도 없다. 나는 못 본 척 눈을 감는다. 순간, 차가 들썩인다. 아주 정성이 뻗쳤구나, 렌터카 직원이 돌덩이를 들어올려 차 유리를 깨고 있다. 야야, 내가 그 짓 많이 해봐서 아는데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렌터카 직원이 눈물 콧물을 닦으며 허둥지둥 주위를 살핀다. 저 자식이야말로 정신줄이 빠진 것 같다. 더 큰 돌덩이를 찾아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다. 어어, 저쪽으로 가면 안 되는데. 렌터카 직원이 절벽 쪽 수풀에서 뒷걸음질을 친다. 지 가슴팍보다 큰 돌덩이를 들어올린다. 번쩍 팔을 뻗는 동시에 휘청, 다리가 꺾인다, 허리가 넘어간다, 순간 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겨우 뒷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든다. 눈알을 굴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본다. 절벽 위로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오려는 가냘픈 두 손이 보인다. 씨발, 저 멍청한 새끼. 욕 한마디 하려는데 목이 부러질 것 같다. 아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 수갑이 천근만근이다. 앞도 보이지 않는다.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으로 차 문을 연다. 안 열린다. 내 인생의 모든 액션은 끝났다고 믿었건만, 저 바보 자식 때문에. 아아, 숨을 쉴 수가 없다. 떨꺽, 겨우 차 문을 연다. 바람이 들어온다. 온몸이 빠개질 것 같다. 살려 달라는 외침이 아득한 바람 소리에 섞여서 흩어진다. 겨우 눈을 떠보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기어서 기어서 그 소리 쪽으로 간다. 모래와 자갈과 풀들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채찍으로 얻어맞는 것 같다. 나는 그만 포기하고 눕는다. 내 한 몸도 가눌 수 없다. 이제 끝이다. 휘이익, 무언가 코를 스친다. 눈을 비빈다. 흰옷을 입은 남자가 내 앞에서 날고 있다. 그가 내게 몸을 숙이며 속삭인다. 일어나라, 네가 가진 힘이 바로 너다. 절뚝이는 무릎을 끌어모으며 나는 다시 기기 시작한다. 수갑이 철컹거린다. 손을 내민다. 렌터카 직원의 뜨거운 두 손이 내 손을 꿀꺽 삼킬 듯이 잡아당긴다. 순간 상체가 앞으로 홀라당 넘어가려 한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고 중심을 잡는다.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솟구친다. 내 흰 셔츠가 시뻘겋게 물든다.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온 산이 무너져라 기합을 주며 그 손을 끌어당긴다. 아아, 우두둑 팔이 끊어진다. 모른다. 모른다. 살 수 있을지, 살릴 수 있을지, 아, 세상의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나를 통과한다. 뼈가 부러진다. 살점이 떨어진다. 피가 두 손을 적신다. 그러나 이상하다. 어쩌면, 어쩌면, 처음으로 나는 아프지 않은지도 모른다.
《문장웹진 201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