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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2. 23. 21:28

오동나무집

                                                박세연

 

 1.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공원묘지까지 따라갔던 상가 사람들과 헤어지고 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어있다. 저만치 불을 켜지 않은 집이 보인다. 문장紋章처럼 오동나무가 우뚝 솟아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아버지가 심은 나무다.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집을 오동나무집이라 불렀다. 별다른 특징 없이 그만그만한 집들이 이어진 골목에서 오동나무집은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곤 했다. 마을 이장집은 오동나무집서 세 번째 집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점집은 오동나무집서 첫 번째 골목을 돌아가면 나온다. 오늘도 슈퍼마켓 여자는 길을 묻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설명을 했을 것이다.

─우리 영주 시집갈 때 장롱 만들어 줄거야.

 

딸을 위해 마당을 파고 나무를 심었던 아버지는 오늘 한 줌 흙으로 땅에 묻혔다. 이제 넌 혼자야. 세상에 너 혼자라구.

대문을 연다. 마당엔 나무들이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서는데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다. 뒤를 돌아보지만 어둠뿐이다. 다시 계단을 오르는데 이번엔 무엇인가 발목을 잡는 느낌이다. 나는 뒤돌아 나온다. 어둠을 건너 집 안으로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집이다. 갑자기 왜 집이 무섭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달라진 것이라면 오래 지병을 앓던 아버지가 빠진 것 밖에 없다.

 

밖으로 나왔으나 막상 갈 곳이 없다. 다른 곳을 찾아나설 기운도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나는 대문 앞에 주저앉는다. 저 만큼 슈퍼마켓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환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그 빛 속을 지나다닌다.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5월인데도 온 몸으로 소름이 돋는다.

나는 몇 번인가 망설이다 그에게 전화를 건다. 예전에 왔다면 지금도 올 수 있다. 장례식에 와 줘서 고마웠어요.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지금 집인데 와 줄 수 있어요?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다. 적당히 거절할 말을 고르는 것이 분명하다. 무턱대고 집으로 와 달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상대는 지금 막 퇴근해서 가족들과 저녁상을 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고,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중일 수도 있다. 그는 아버지와 나를 모르면서도 장례식장에 왔었던 사람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를 재촉한다.

 

─혼자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꼭 집 안에 누가 있는 것 같고…….

그가 오겠단다. 그날 병원으로 불쑥 찾아왔던 것처럼.

어린 아이가 강물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아이가 빠져나온 강물은 붉디붉은 핏빛이다. 아이는 언덕을 올라와 풀밭을 따라 걷는다. 눈부신 햇살이 아이를 내리비추고 있다. 아이는 시냇물에 들어가 더위를 씻고, 다시 풀밭을 걷는다. 그렇게 하염없이 걸어가는데 긴 그림자가 아이를 가로막는다. 아이는 고개를 들고 자신을 가로막는 그림자를 쳐다본다. 그 순간 그림자의 사내가 아이를 껴안고 사랑을 나누려한다. 아이는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워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사내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순간 누군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든다. 그가 왔다.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졸았던 모양이다.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저리다. 그가 비틀거리는 팔을 잡아준다. 회식자리에서 빠져나온 것일까 그에게선 술 냄새가 난다.

대문을 열고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집이 무서워졌어요.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걸까?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댄다.

 

─와줘서 고마워요.

그는 조용히 서 있다. 그러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계단을 올라간다. 마치 우리 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현관문을 연다. 그가 주인 같다.

─무섬증이 드는건 돌아가신 분과 정을 떼느라고 그런다더군요.

실내공기가 비릿하다. 불을 켜자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 먹어야죠?

그는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희준은 저렇게 스스럼없이 주방에 들어간 적이 없다. 집에 오더라도 희준은 잠깐 소파에 앉았다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날 희준이 사람을 보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장례식장에 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난 희준의 어깨에 기대어 약간 울었을까? 희준도 아버지도 모두가 꿈속처럼 아득하다. 귀 속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강물에 반사된 햇살이 자꾸 눈을 찌르는 느낌이다. 나는 소파에 엎드린 채 눕는다. 몸이 하염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저 남자와 나는 만난 적이 있을까? 잠깐이라도 사귀었던 것일까? 함께 밥 먹고 차를 마시고, 퇴근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까지 그를 마중나간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에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달렸던 것도 같다.

그가 돌아오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다.

─뭐 먹을래요? 이것 저것 샀는데 뭐가 좋겠어요?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 일어나 앉고 싶은데 몸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러나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가슴에 닿는 그의 손을 뿌리친다.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순간적이고 본능적인 몸놀림이다. 그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이불을 덮어주려고…….

나는 왜 그를 무안하게 했을까? 대문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면서 나는 희준과, 아니 누구라도 상관없이 서로 살을 부비며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남자한테 집으로 와달라고 했을 때는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다. 잠이 쏟아진다.

 

 

2.

─꼬박 하루를 잔 거 알아요. 자더라도 뭘 좀 먹어야죠.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내내 여기 있었던 것일까? 커튼을 열자 방안이 환해진다.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다. 눈매가 작은 물고기를 닮았다. 선이 분명한 두꺼운 입술은 그를 신중하고 진지한 타입처럼 보이게 한다. 말을 할 때조차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는 수줍은 사람이다.

─괜찮아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뿌리친 것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은 그 역시 외롭다는 의미다.

 

식탁에는 여러 개의 인스턴트 죽이 놓여 있다. 숟가락을 들다가 그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본다. 뱀을 감은 화살이 하트모양의 과녁을 향하는 푸른 문신이다. 시선을 의식한 듯 그가 팔뚝을 가린다.

휴대폰이 울린다. 그가 일어서서 거실로 나간다. 통화가 길어지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지금 가야 하는 걸까? 희준이 떠났을 때도 난 잘 견뎠어. 혼자라도 괜찮을 거야.

 

희준과는 5년 넘게 사귀었다. 당뇨에 합병증을 앓았던 아버지가 췌장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희준은 아버지의 병간호조차 다른 사람 손에 맡기려 했다. 그는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물론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혼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외로 나가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제발 부탁이다, 그렇게 내게 매달리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희준이 헤어짐을 통보해왔다. 짧은 인생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희준에게 다른 애인이 생겼을 것이라는 짐작 뿐, 나는 모든 게 갑작스러워 이유조차 묻지 못했다. 그런 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 순간에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희준이 말했던 가보지 못한 우리 둘만의 미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 남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절박했던 것은 그 순간 희준이 내 옆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또한 비록 헤어지긴 했지만 희준이라면 밤중이라도 뛰어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희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은 탓이라 여기며,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겼다. 병원에 도착해 몇 가지 검사를 마친 의사가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했을 때 희준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새벽녘에 숨을 거두고, 병원직원이 장례절차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휴대폰에 매달려 울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하지만 희준은 내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 내가 걸었던 희준의 휴대폰 번호는 다른 사람이 사용 중이었고, 세 번의 메시지를 받았던 사람도 희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그가 왔다. 희준이 아닌 김상두 그가. 병원에 도착했다고 전화로 알려왔을 때 나는 그에게 장례식장을 알려주었다. 물론 단번에 그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점퍼차림으로 그가 문상을 하는 중에도 아버지 소유의 건물 입주자거나 시장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이틀 연이어 찾아오는 그를 보면서 누구냐고 물었고 그가 희준의 휴대폰번호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참 뒤, 다시 돌아온 그는 친구들이 술 마시러 나오라고 하는데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는 형님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도와달라는데 그냥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했어요.

희준은 이 사람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에도 희준은 전화를 걸어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희준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대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김상두 그가 사다준 죽 그릇을 비운다.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지만 어서 기운을 차리고 싶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그의 방문을, 관심을 계속 이어가고 싶기도 하다.

 

 

3.

며칠 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도 어느 순간엔 거짓말처럼 정신이 맑아지면서 잠을 깨게 된다. 마치 파도가 심한 날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자꾸 몸이 한 쪽으로 기울거나 흔들리는 것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한낮에 거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조는 것이 전부다.

그에게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나는 침대에 기대앉아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거실로 나선다. 스위치를 올리자 아버지의 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거실을 중심으로 당신의 방과 내 방은 좌우대칭을 이루는 구조다. 간헐적인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안도감을 느끼고, 잠결에 거실을 오가는 발자국 소리에 곧 날이 밝을 것임을 알고는 했었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도 같다. 주변을 돌아보지만 거실은 텅 비어있다. 모처럼 커피를 내려 마당으로 나선다. 한껏 졸음을 머금은 오후의 햇살이 머리 위에 와 있다. 산만한 아이처럼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바람이 꽃향기를 흩뿌리고 다닌다. 초인종 소리에 잠을 깬다. 그가 왔다.

─상두 씬 어떤 사람이에요?

─많이 모자라죠. 영주 씨 옆에 있기에는…. 7년 간 리비아의 건설현장에서 일했어요. 남자들끼리 먹고, 자고, 일하고. 하루 일과가 끝나도 마찬가지였죠. 숙소가 사막 한가운데에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살기 힘들어서 떠난 나란데 왜 그렇게 그리웠는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것들은 왜 그렇게 많았는지 몰라요. 자동차 소리만 들려도 나가보고 비행기가 날면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죠. 그러면서도 돈에 욕심이 생겨서 1년 만 더, 1년 만 더 하다가 그렇게 오래 있게 되었죠. 그러는 사이 여자가 떠났어요. 어려서 부모님 돌아가시고 친척집에서 눈칫밥 먹을 때부터 좋아했던 여자였는데 늘 사고치고 학교도 잘 가지 않는 나를 믿어준 유일한 친구였죠. 여러 번 약속하고 또 실망시키고……. 그 친구랑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싶었는데 막상 나와보니 그 친구가 사라졌어요. 예전에 살던 집에도 가봤는데 찾을 수가 없더군요. 나중에 결혼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나 같은 놈 잊고 잘 살고 있겠죠.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다. 그에게 나는 떠나버린 여자가 되고, 내게 그는 떠나버린 남자 대신이다. 나쁠 것은 없다. 매일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고, 필요할 때 내 옆에 있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잘 그리진 못했지만……. 이거 받아줄래요.

그가 건넨 스케치북에는 긴 웨이브 머리의 여자가 만화의 주인공처럼 웃고 있다.

─직접 그린 거예요?

흑백의 초상화. 미술시간 친구들이 그린 크레파스 그림이 떠오른다. 검정색 크레파스로 내 얼굴의 주근깨를 그리며 재미있어 하던 친구와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멈추지 않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속성을 가진다. 그림 속에도 시간이 지나간다. 얼굴에 주름을 더하고 머리 색깔을 변화시킨다. 주근깨의 아이에서 서른 살의 여자로, 다시 환갑을 훌쩍 넘긴 여인이 된다. 내 어머니의 모습이 이랬을까?

─행복하니?

 

그림 속의 여자, 예순 살의 내가 대답한다. 외롭긴 마찬가지야. 늙은이가 되면 할 일이 많지 않아. 자주 뒤를 돌아보지. 그런데 말야, 정말 이상한건 늘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 때 그랬으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삶의 매 순간을 갈등한다는 거지.

─상두 씨! 여기서 나랑 같이 살래요? 저기 건넌방이 비었어요.

 

 

 

4.

건너 방에서 소리가 난다. 책 읽는 소리다. 빛의 일렁거림처럼 흔들의자의 움직임에 따라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아버지가 읽는 책의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간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처음 들어와 보는 방이다. 여전히 이불이 펴져있다. 아버지는 잠시 화장실에라도 간 것 같다. 문갑 아래 쌓여있는 아버지의 책들, 동화책 전집이다.

─동화책은 왜요?

─손주가 생기면 이야기 해주려고. 기억이 흐릿해져서 말야.

 

나는 아버지가 읽던 책들을 펼쳐든다.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져서 글씨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에 봤던 그림들이 얼핏얼핏 눈에 들어온다. 푸른 숲이 펼쳐지고 강물이 흐르고 있다. 책의 아래쪽에 아이가 강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다음 장에서도 그 다음 장에서도 그렇게 계속 걷고 있다. 배가 고프면 열매를 따먹고, 강물을 마시며 하염없이 초원을 걸어간다. 어두워지면 바위틈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이면 또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원이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다. 사나운 육식동물들이 아이를 쫓아다닌다. 그러나 아이는 무사하다. 이번에는 초원에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면서 불이 난다. 나무와 초원이 불에 타고 동물들이 타죽는다. 아이는 잿더미가 된 초원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다. 추운 겨울이 닥쳐 굶주림을 겪고, 다시 봄이 되면서 아이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만난다. 이제 아이는 혼자가 아니라서 안전하다. 그들과 같이 사냥을 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 남자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아이는 어느새 여자가 되었다.

 

창문을 연다. 투명한 햇살이 창문을 넘어온다. 평소 검소했던 분이라 남겨진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서랍장의 옷들과 책들을 꺼내놓는다. 그가 머물게 될 방이다.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그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는 처음 그와 나를 연결해준 끈이었다. 전화가 고맙다. 무엇인가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지금 아버지 방을 정리했는데 유품들을 나눠드릴 곳이 있을까 해서요.

─그럼요. 내일 영주 씨도 같이 가요.

 

차는 복지관을 지나 재래시장을 끼고 돈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있다. 혹여 반대편에서 차가 오기라도 하면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길도 여러 갈래여서 예기치 않는 순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차들이 서로 엉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음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뜬다. 전날 복지관에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독거노인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러 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 와보겠느냐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건어물 장사를 하셨던 시장이라면 몰라도 직업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직장은 낯선 세계였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일터를 찾아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버스를 타고 내려서 올라간 언덕 위에 복지관이 있었다. 꼭 가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복지관은 너무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노인들의 춤추는 모습이 보이고, 다른 교실에서는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날마다 그 곳에서 노인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춤추는 것을 보며, 도시락을 배달할 것이었다.

 

─매일 배달 나가요?

─이틀에 한번씩요. 배달을 안 나가는 날엔 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할 게 많아요.

길이 더 좁아진다. 낡은 집들을 허물어내고 여기저기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공사 때문에 운전이 곡예를 하는 것 같다. 그가 날마다 이렇게 위태로운 길을 올라 도시락을 배달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다 왔어요.

그가 새로 지은 다세대 주택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들어가자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대문이 보인다.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하면 한순간에 문짝이 내게로 무너져내릴 것 같다. 햇빛이 들지 않은 실내에는 축축한 냉기가 감돈다. 어르신을 부르며 그가 방문을 연다. 방안도 햇빛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노인의 두 손이 도시락을 내려놓는 그의 손을 움켜잡는다. 치아가 없는 잇몸을 드러내며 반가워한다.

 

노인은 계절에 맞지 않는 내복 차림이다. 방바닥에 의지해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상태여서 노인의 체격을 짐작할 수가 없다. 나는 아버지의 생신날 선물했던 붉은색 카디건을 꺼내놓는다. 병석에 계셔서 한번도 입지 않은 새옷이다. 그가 노인에게 입혀드린다. 특별한 느낌은 없다. 노인의 어깨가 조금은 덜 시릴 것 같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는 그의 손을 잡는다.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랐지만 도시락을 배달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정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는 남자, 그의 눈가에 물기가 돈다. 그가 병원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부모가 임종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것처럼 내 전화메시지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영주 씨 고마워요. 태어나서 요즘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5.

나는 백화점으로 가서 그가 당장 필요로 할 물건들을 산다. 가까운 시장을 두고 굳이 백화점까지 나간 것은 시장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서다. 속옷과 양말은 새로 세탁을 해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서랍장에 구분해 넣는다. 아버지와 살면서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라 낯설지는 않다.

전화벨이 울린다. 학교다. 대학원 수강신청 때문이란다. 두 번씩이나 휴학을 했던 상황이라 이번에 등록하지 않으면 자퇴처리 된다고 한다. 다음 달부터 요리를 배우러 다닐까? 내게 공부는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고, 가게를 열고, 혹은 아이를 키우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딱히 공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 할 일이 필요해서였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렇게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혼자 외롭지도 너무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지도 않는 지점이 내게는 학교였다. 이제 난 요리를 배우거나 춤을 배울 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풀~풀~. 꽃잎이 날리고 있다. 대문 앞의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을 활짝 피웠다. 10미터가 족히 되는 나무 전체가 온통 보랏빛 광채를 발산한다. 이 맘 때가 되면 멀리서도 우리 집을 알아볼 수가 있다. 오동나무집. 오동나무집 딸. 내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말이다.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꽃잎이 아니라 물고기들이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고기 떼는 수백 개의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아버지 저기, 저기 많아요. 한꺼번에 몰려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느 순간 물고기들이 내게로 몰려들고 있다. 수천 수만의 은빛무리가 내 다리를 휘감고 돈다. 그러다 점점이 내 안으로 밀려든다. 그 때문에 주변은 수백 개의 가로등을 켜놓은 거리처럼 환하다. 나는 새삼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어느 새 내 몸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되어 있다. 입술은 충만감에 사로잡혀 만개한 꽃처럼 자꾸 벙글어진다.

 

무슨 꿈이 이럴까? 투망이라면 어려서 몇 번 아버지를 따라간 적이 있다. 그것도 메기와 붕어 몇 마리를 잡았을 뿐이다. 그는 언제 일어났는지 옆에 없다. 현관문을 열자 햇살이 마루까지 올라온다. 오동나무의 보랏빛 꽃망울들이 탐스럽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사춘기 때도 그리워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왜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낳았을까? 그렇게 떠나버린 어머니는 내게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고,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지금도 미안하다거나 그립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잡초를 뽑던 그가 대문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담장 밖으로 뻗은 오동나무 가지를 어떻게 해보려는 모양이다.

─우리 영주 시집갈 때쯤이면 장롱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난 시집 안 가. 아버지랑 여기서 살 거야.

 

마당에 비해 오동나무가 너무 크다. 그 동안 내 키보다 네다섯 배는 더 자라 버렸다.

─이 나무 너무 커죠?

─꽃이 피어서 예쁘긴 한데.

─어떻게 자르죠?

─자르는 건 쉬워요. 자른 나무론 그네를 만들면 좋겠어요.

초인종이 울린다. 부동산 아저씨다.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나를 돌아본다.

─손님이 있었네. 누구신가?

아버지와 오랜 지기로 집안 사정을 훤히 아는 아저씨다. 나는 아저씨의 시선을 외면한 채 찾아온 이유를 묻는다.

─형님이 자기 죽거든 이 집을 팔아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들은 말 없어? 마침 적당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어떤가 하고.

─…….

─혼자 살기엔 아파트가 낫지 않겠어.

아저씨가 계단에 주저앉는다. 확답을 듣지 않고는 가지 않을 태세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형님 생각해서 그러는 데…….

─팔 생각 없어요. 그냥 여기서 계속 살 거예요.

─얌전한 강아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탈상도 하기 전에…

나는 잠시 집을 팔고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곳으로 가면 훨씬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또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쭉 이곳에서 늙어갈 것이다. 내게 이곳보다 더 편안하고 익숙한 세상은 없을테니까.

 

 

6.

마당은 텅 비어 보인다. 오동나무가 없어서다. 어린 묘목을 구해다 다시 심어야겠다. 그는 아침 일찍 오동나무를 베고, 목재소로 가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왔다. 나무냄새가 마당을 채운다. 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가는 만큼 나 역시 몸을 키우고 나이를 먹었으리라. 그러나 내 삶의 나이테는 단조롭기만 하다. 집안 살림 때문에 친구도 없이 학교와 집을 오갔고, 중학생이 되어 초경을 치루었으며 대학에서 희준을 만나 가끔씩 오래된 연애를 한 것이 전부다.

그는 숙련된 목수같이 나무를 자르고 못질을 한다. 나는 그의 곁에 앉는다. 그는 이틀 전에 복지관을 그만뒀다.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형을 돕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혼자일 때와는 다른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복지관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돈이면 더 많이 도울 수 있어요. 몇 사람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보다 몇 백배 더요.

 

그런 그가 조금은 낯설다. 조금은 허황된 것을 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내가 복지관에 갔다가 보았던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앉아있던 벤치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나타났을 때 그는 분명 반가워하지 않았었다.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그의 주변을 맴돌던 두 명의 남자, 그들이 풍기던 분위기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들 때문에 복지관을 그만둔 것은 아닐까?

등받이가 있는 2인용 의자가 만들어졌다. 양쪽에 기둥을 세워 만든 나무그네다.

─영주 씨! 여기 앉아 봐요.

손으로 만지는데 앞뒤로 잘 흔들린다. 의자는 생각보다 편하다. 나는 날마다 이곳에 앉아 책을 읽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가 꽃다발을 들고 나온다. 선물상자에는 하트 모양의 목걸이가 들어있다. 예기치 못한 선물이다. 그가 직접 목걸이를 내게 걸어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다. 나란히 그네에 앉아 발을 굴린다. 그네가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린다.

─상두 씨! 노래 불러 줄래요?

─노래를 불러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가사를 기억하는 것도 없고.

─…….

─영주 씨 우리 여행 가요. 안에 있으면서 기차여행 하는 상상을 자주하곤 했어요.

─안에요? 어디 안에…….

─예전에……. 어서 준비해요.

무엇을 챙겨야 하나? 집을 떠나본 것이 언제였던가? 희준과 헤어지고 나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다. 간단하게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는데 낯선 사람이 찾아온다. 막 대문을 나서려던 순간이다. 승용차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내리면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 가죽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쳐다보기만 한다. 복지관에서 봤던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누구세요?

─최영주 씬가요?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내게로 다가온다. 순간 그가 골목 안쪽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두 명의 남자가 그를 쫓는다. 세 명의 남자가 한순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시 대문 앞에 주저앉는다.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온 그 날, 그를 기다리던 그 자리다. 나는 다시 혼자다.

그는 누굴까? 왜 도망을 쳤을까?

 

 

7.

초인종이 울린다. 낮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이번에는 혼자 왔다.

─영주 씨! 부탁입니다. 상두, 제발 한번만 만나주세요.

─제가 왜요? 그 사람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라는 거예요.

─배신감 느끼는 거 이해해요. 나도 영주 씨만큼 상두한테 실망하고 뒤통수 맞은 기분이니까요. 그러나 영주 씨한테 했던 행동은 모두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 친구 청송감호소에서 서울까지 보름씩이나 맨 발로 걸어왔어요.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요. 나한테 찾아와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했을 때, 내가 아무 말 않고 복지관에 취직을 시켜줬던 것은 그 친구를 믿어서예요. 사무장이 상두 칭찬 많이 했어요. 성실하게 일을 잘 한다고요.

 

─어떻게 저를 알았어요?

─상두 휴대폰 통화기록을 조사했어요. 최근에 통화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영주 씨였죠.

─이 편지들 상두가 7년 간 감호소에 있으면서 나한테 보낸 편지들이에요. 자신을 잡아넣은 형사한테요.

─그는 리비아 건설현장에서 일했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믿을 수가 없어요.

─공범이 두 명 더 있어요. 둘 다 감호소 출신인데 그들을 잡으려면 상두 도움이 필요해요.

─할 말 없어요. 돌아가 주세요. 가지 않으면 내가 나갈 거예요.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다. 나는 미용실로 향한다. 다른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던 주인이 내게 인사를 한다. 속이 울렁거린다.

─조금만 다듬어주세요.

─오랜만에 오셨죠? 근데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어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시 구토가 치민다. 나는 다음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온다. 초여름의 거리는 나른하다. 쇼윈도의 마네킹들은 화려하고, 도로는 차들로 넘친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형사는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집으로 향한다.

 

골목 입구 슈퍼에는 주인여자 대신 사내가 나와있다. 그는 골방에서 각혈을 하며 글을 쓰던 30년대 작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에는 살점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주인여자한테서 아들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담는다. 과일을 종류별로 담고 우유도 큰 것으로 골라놓는다.

─배달해 주세요.

나는 사내가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가게를 나선다. 계산도 하지 않았다.

─거기 두고 잠깐 기다려주세요.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사내가 보는 앞에서 가방 속의 지갑을 꺼낼 수가 없어서다. 사내는 여전히 거실에 서 있다.

초인종이 울린다. 누가 온 모양이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낮에 왔던 그 형사가 분명하다. 나는 형사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사내를 껴안는다. 사내가 놀라 나를 밀치고 현관을 뛰쳐나간다.

─나를 연행할 건가요?

 

나는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다. 구역질이 치민다. 좀처럼 멎을 것 같지가 않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다. 그래도 자꾸 토악질이 치받친다. 나는 화장실로 간다. 형사 앞에서 구토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이 집에 머문걸 안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강력계 배테랑 형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영주 씨! 제발 상두를 한번만 만나줘요. 내일이면 검찰로 넘겨야 하는데 형량을 줄이려면 공범을 잡아야 해요. 상두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영주 씨나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고요. 자포자기하는 심정에서요. 이해 못 하겠지만 한번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혼자 아무리 잘 해보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아서죠. 이번 사건도 그랬을 거예요. 공범 중 하나가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았는데 그게 잘 되니까 공장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공장 차릴 돈을 마련하려고 ‘딱 한 탕만 하자’며 상두를 끌어들인 거예요. 물증도 확보했어요. 이제 두 사람만 잡으면 되는데 상두가 만나자고 그들한테 전화 한 통만 해주면 끝나는 일이에요.

 

─그건 그 사람이 결정할 일이에요. 저하고는 상관없어요.

─영주 씨 우리도 처자식이 있어요. 제발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줘요. 내일 다시 올게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형사가 돌아간 모양이다. 나는 밖으로 나온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린다.

테이블에는 형사가 두고 간 연필그림의 화집이 놓여있다. 서문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감호소로 봉사를 오는 화가한테서 그림을 배워 그룹전시회를 연 제소자들의 작품집이라고 적혀있다. 그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과 시계, 벽에 걸린 수의와 초상화, 목탁과 성경책……. 그림 속의 창문이 말한다. 난 새처럼 훨훨 자유롭고 싶어. 7년이면 시계가 몇 바퀴나 돌아야 하지? 시간아! 제발 빨리 좀 가라. 주름살이 자꾸 늘어서 가족들이 몰라보면 어쩌나? 세상은 우리를 받아줄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께 맹세하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형사가 두고 간 편지를 읽는다. 글씨체가 펜글씨 교본처럼 날렵하다. 나는 또 다시 그에게 배반감 같은 걸 느낀다. 빈 집을 털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그와, 내가 아는 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편지의 글씨는 너무 반듯하고, 내용은 잘 꾸며진 이야기 같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었다.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가출해서 소년원을 들락거렸고,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해 다시 죄를 짓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감호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내면서도, 그는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놓고 면회 오는 형사한테 편지를 썼고 정보원을 자처했다. 그는 언제나 이중플레이를 해온 것이다. 자신한테 잘 해주는 사람이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외로웠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쓸까 하다가 그만둔다.

 

 

8.

그는 어제 감호소로 이송되었다. 형사한테서 전해들은 소식이다. 그와 같이 보낸 지난 몇 달이 아득하기만 하다. 나는 마당으로 나선다. 아버지가 심고 가꾸었던 정원의 나무들. 모과와 대추나무에는 주렁주렁 열매가 달렸다. 나는 구덩이를 파고 오동나무 묘목을 땅에 묻는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로 나무를 심으며 정원을 가꾸셨던 아버지 옆에서 봐왔던 일이다. 나는 흙을 덮고 땅을 꾹꾹 눌러 밟는다.

 

아가야! 이 나무는 말야. 오동나무란다. 네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심었던 그 자리에 다시 너를 위해, 그리고 또 한 사람을 위해 심은 거란다. 나무가 자라서 담장 밖까지 고개를 내밀고 꽃을 피우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우리집을 오동나무집이라 부르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훗날 우리를 만나러 오는 사람도 쉽게 우리집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아무리 주변이 변하고 시간이 많이 흘러도 집을 찾지 못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테지. 아가야! 나무가 시들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빌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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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연 / 196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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