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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 크리스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8. 11. 15:43

패닉 크리스털
이대연

 

 


 1.
어항은 바닥이 좁고 통이 넓다. 밑이 조금 잘려나간 타원형이다. 어항 입에 물결 모양 장식이 있다. 열대어 상점 주인의 말대로라면 어항은 특수 코팅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안에 열대어 다섯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남국의 어느 사파이어빛 바닷물 속에서 세상을 온통 푸른빛으로 알고 지냈을 녀석들. 여자는 그네들의 원산지도 학명도 알지 못한다. 여자가 알고 있는 거라곤 다만 상점 주인이 일러준 몇 가지 사실들뿐이다.
열대어 상점 주인은 말했다.

물고기들의 이름은 패닉 크리스털이다. 패닉 크리스털은 특이한 놈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어항에 넣어주어야 한다. 왜? 녀석들은 어항 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그 순간 죽고 말기 때문이다. 일반 어항에 넣는 순간 녀석들은 어쩌면 일제히 뒤집어져 만세를 부르며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른다.

다소 시큰둥한 말투였다. 그는 바빴다. 새로 주문받은 수조를 세팅해야 했고 하다만 부분 물갈이도 마저 끝내야 했다. 그는 흑사에 비료를 섞어 바닥재를 만들고 여과박테리아제를 첨가한 사육수飼育水를 만드는 틈틈이 사이펀에서 흘러나온 물의 양도 살폈다. 그러니 여자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도매업자였으므로, 여자의 소매는 보잘것 없었고, 아마도 자동차로 도매품을 배달하는데 드는 기름값이나 할 정도일 것이었으므로, 그는 꼭 그만큼의 성의만을 보였다.
경제관념 투철한 주인은 또 말했다.

패닉 크리스털이란 놈들은 상당히 경제적인 생물이다. 녀석들에게 먹이는 하루에 한 번 좁쌀만한 사료 한 알로 충분하다. 혹시 배고프지 않을까 염려해서 먹이를 더 넣어줬다가는 낭패를 본다.

그는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패닉 크리스털의 생김새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녀석들에게 생김새란 게 있기나 한 것일까? 녀석들은 그저 투명하기만 할 뿐이므로.
패닉 크리스털의 또 다른 이름은 래핑이다. 살을 다 발라먹고 남은 가시 위에다 비닐 랩을 씌워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가락만한 투명 물고기. 그게 녀석들 생김 생김에 대한 설명의 전부다. 이에 덧붙여 주인의 마지막 경고.
과식을 하거나 자기 모습을 본 녀석들의 몸은 금세 검게 썩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여자는 그의 경고를 주의 깊게 들었다. 남자가 나타나기 이틀 전이었다.


2.
여자는 그가 분명히 취객일 거라고 생각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똑바르지 못한 걸음걸이, 애써 고개를 쳐드는 안쓰러운 노력……. 그는 누가 봐도 분명 취객이었다. 어항을 바라보던 여자는 쪽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정오가 막 지날 무렵에 취해 들어온 사내라니.
─쉬어 가시게요?
여자의 음성에는 짙은 의혹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쉬어 가시겠냐니! 그건, 그러니까 일종의 접대성 멘트가 아니던가. 아직 밝은 시간에 남녀가 함께 들어왔을 때, 두 분이서 열심히 한두 시간 사랑만 나누시고 곧바로 가시겠냐는 질문의 완곡하고도 간단명료한 표현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오가 간신히 지난 시간에 혼자 취해 들어온 사내에게 쉬어가시겠냐니. 여관이라는 곳을 좀 드나들어본 사람이라면 자기를 놀린다고 오해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뭐라고 물었어야 좋았을까? 묵으실 거예요? 이제 막 정오가 지났는데? 아니면 아예 모르는 척 잡아떼고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물었어야 옳았을까? 여자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열흘.
그는 여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거나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반쯤 잠긴 눈꺼풀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 잠겼다. 그리곤 취한 사람다운 어눌한 몸놀림으로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열흘이라고? 여자는 순간적으로 그가 취한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갔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달방을 얻는 거라면 그런가보다 싶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다. 술집들이 밀집해 있는 유흥가여서 새벽에 들고 아침이면 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 또 좀 애매했다. 정오 무렵에 취해 여관에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어느 막가는 인생이라 여길 만도 한데, 행색만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멀끔한 차림에 꽤 멋스러운 코트, 단정한 손가방까지, 그의 옷매무새는 그가 지금까지 성실히 살아왔으며 퍽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비교적 안정된 삶의 궤도에 올라와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였다. 그러니 더 이상했다. 여자는 께름칙한 기분으로 카드를 받아들었다.
객실 열쇠를 받아든 그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조금씩 밀며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손잡이가 덮개 부분에 달린 손가방은 똑바로 닫히지 않아 덮개와 몸체가 벌어져 덜렁거렸다.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느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혹시 저 사내, 자살하려는 건 아닐까? 여자는 근심스레 눈살을 찌푸리며 바탕화면에 늘어선 아이콘들 중 하나를 더블클릭하였다. 화면이 바둑판처럼 서른 두 개의 칸으로 분할되었다. 각각의 칸마다 각각의 방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스물아홉 번째 칸에 마우스를 끌어 다시 한 번 더블클릭했다. 스물아홉 번째 방이 다른 방들을 덮으며 확대되었다.

문이 열리자 문고리에 끌려오듯 그가 방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문은 자동으로 닫히게 되어 있어 그는 또 한 번 문고리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벽에 몸을 기대고서야 간신히 구두를 벗은 그는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침대를 향했다. 두어 발짝 지나기도 전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뚜껑이 열리며 두어 권의 책이 반쯤 미끄러져 나왔다. 곧 코트가 가방을 덮었다. 넥타이를 풀 때 그의 섬세하지 못한 손놀림 때문에 와이셔츠 단추가 하나 떨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방바닥을 굴러 침대 밑으로 사라졌던 단추는 긴 원을 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그의 발치를 지나 도로 침대 밑으로 사라졌다. 단추가 지나간 자리 위로 넥타이가 떨어졌다. 긴 팔자 모양이었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목을 옭죄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난 듯이. 양말을 벗기 위해 한쪽 발을 들다 그는 결국 중심을 잃고 침대 위로 넘어졌다. 양말은 길게 늘어지기만 할 뿐 벗겨지지 않았다. 그는 양말을 벗는 걸 단념하고 혁대의 버클을 풀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려 애를 썼지만 무딘 손끝은 엉뚱한 곳을 헤맬 뿐이었다. 손놀림이 느려졌다. 수명이 다한 기계처럼 손가락은 움직이다 말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완전히 멎었다. 손이 미끄러지며 시트 위로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뻑뻑했다. 여자는 모니터 옆에 놓인 작은 화장품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손으로는 손거울을 들고 한손으로는 눈꺼풀을 뒤집었다. 충혈된 안구가 커다랗게 드러났다. 붉은 피로 팽팽하게 팽창한 모세혈관들이 흰자위에 거미줄처럼, 아니 나무뿌리처럼 뻗어있었다. 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보세요? 의사는 물었다. 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 깜박임이 적어지거든요, 그래서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그는 말꼬리를 늘이며 자판을 두드렸다. 애써 친절한 말투였다. 여자는 약간 짜릿했다. 안구건조증.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여주인공은 그녀가 앉았던 것과 똑같은 둥근 회전의자에 앉아 똑같은 기계에 턱을 대고 똑같은 진단을 받았었다. 연신 인공눈물을 넣어주던 그녀의 대사.

전 눈물이 안나요.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끄떡없죠.

건조한 일상이 비로소 물기를 머금은 듯 했다. 의사는 식염수인지 안약인지 모를 어떤 액체를 눈에 흘려주었다. 여자는 그게 무슨 특별한 세례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척 강해졌다고 믿었다.
여자는 냉장고에서 안약과 인공눈물을 꺼내 한 방울씩 눈에 흘려 넣었다. 금세 안구 표면이 시원하고 부드러워졌다. 안약이 잘 퍼지도록 눈을 깜박거리자 자리를 잡지 못한 잉여의 액체가 눈가로 흘러내렸다. 액체는 입꼬리를 타고 입안까지 흘러들었다. 씁쓸했다. 여자는 크리넥스를 한 장 뽑아 눈가와 볼과 입술을 닦았다. 눈을 두어 번 더 깜박여주자 흐리고 일그러져 보이던 사물이 한결 선명해졌다. 어항 속의 패닉 크리스털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게 보였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인터폰이 울렸다. 여자의 시선이 인터폰을 향했다. 207호라고 적힌 견출지 위의 버튼이 벨소리에 맞춰 빨갛게 점멸했다.

3.
다섯 마리의 패닉 크리스털 중 한 마리가 죽었다. 남자가 입실한 다음날이었다. 남자의 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여자는 불안했다. 매일 정오경이면 객실 청소를 위해 오는 당번 여자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되려 여자에게 물었다. 그 방에 누가 묵고 있느냐고. 그리곤 성가신 듯 그가 퇴실을 한 뒤에나 자기를 부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잠자는 남자 따위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아직 청소할 방이 많이 남아 있었고 청소가 끝나는 대로 일수 놓은 돈의 이자도 받으러 가야 했다. 그녀는 바빴다. 여자는 약간 무안해져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컴퓨터를 켰다.
모든 객실에는 방안을 엿볼 수 있는 소형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거울 뒤에, 시계 속에, 혹은 형광등에. 일종의 범죄 예방 차원이라지만 명목뿐이다. 사장은 이 부업을 좋아한다. 감시용 카메라와 연결된 컴퓨터의 씨디 레코더에 공씨디를 걸고 남녀가 함께 투숙하는 방의 번호를 입력한 뒤 녹화버튼을 누르면 여자의 일은 끝난다. 간혹 방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감지할 수 있는 탐지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아직 그런 난처한 경우를 당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경찰들은, 경찰들은 월급이 너무 적다. 사장은 관할 파출소의 직원들에게 나라가 해야 할 일의 일부를 대신 해주고 있다. 공공의 치안을 담당하는 분들께 미약하나마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개자식들아! 가끔 그는 거울을 보며 혼자 히죽거리곤 한다.
여자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갔다. 모니터에 비치는 남자의 방안에서는 약병도, 목을 매달만한 밧줄도, 어떤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잠들어 있는 남자의 모습뿐이었다.  화면은 공허했다. 남자가 간혹 뒤척이기는 했지만 드물었기 때문에 거의 스틸 사진과 다를 바 없었다. 여자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침이 말라 입안이 껄끄러웠다. 물을 마시고 싶었다. 냉장고 쪽으로 빙그르르, 의자를 돌렸다.
여자는 끔찍한 광경에 경악했다. 죽은 물고기는 몸이 검게 변해 배를 뒤집고 수면에 떠 있었다. 한평생 투명하게 살다 죽어서야 몸을 갖게 된 물고기, 패닉 크리스털의 아이러니한 생애. 그러나 도대체 왜? 여자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여자가 정리한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① 전날 십이 시 십오 분 경 손거울을 꺼내 충혈된 눈을 확인.
② 손거울을 든 채 안약과 인공눈물을 양쪽 눈에 각 한 방울씩 투약.
③ 크리넥스 티슈를 뽑아 흘러내린 안약을 닦음. 이때쯤 인터폰 울림.
④ 서둘러 수화기를 들며 손거울을 탁자에 올려놓음.
⑤ 객실의 TV리모콘 교체 후 돌아와 손거울을 화장품 주머니에 집어넣음.

후―. 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 경위 ④와 ⑤ 사이에 녀석은 죽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녀석을 급습한 건 무엇이었을까? 비애나 공포? 혹은 자조나 절망? 아니면, 단순히 생리적 쇼크였을까? 여자는 양손으로 손우물을 만들어 죽은 물고기를 건져냈다. 손이 물에 잠기자 살아있는 물고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쏜살같이 어항의 가장자리로 흩어졌다. 화면은 여전히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죽은 패닉 크리스털은 여관 입구 오른쪽 화단에 묻어주었다.
땅을 파고 물고기를 묻는 내내 눈이 왔다. 맑은 하늘에 눈이라니. 눈은 쌓이지 못하고 바닥만 축축하게 적셨다. 햇살을 등지고 내리는 눈은 하얀 먼지 같았다. 젖은 땅을 파고 물고기를 묻은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가 여자의 얼굴에 닿자마자 녹았다. 양볼에 물기가 번졌다.
손을 씻고 프론트로 돌아온 여자는 머그컵 가득 커피를 따라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어항 속에서 남은 네 마리의 물고기가 헤엄을 쳤다. 저 물고기들…… 자기들의 친구가 몸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여자는 마음이 쓸쓸해졌다.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맥없이 한쪽 팔을 길게 뻗어 팔베개를 하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머그잔을 잡은 채.
여자의 눈앞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쳤고 어항 너머로 모니터가 보였다. 그 안에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죽은 물고기를 대신해 어항 속으로 들어간 듯이, 아니면 애초부터 그 속에 있었다는 듯이. 그는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일그러졌다. 어항과 물결과 헤엄치는 물고기 네 마리, 아니 다섯 마리……. 여자는 매우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만 하루가 넘도록 내내 잠들어 있는 남자. 그는 마치 몸을 버리고 영혼만으로 한 삶을 꾸리고 있는 듯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졸음이 밀려왔다.


4.
여자는 사료 네 알을 손바닥에서 세어 어항 안으로 떨어뜨렸다. 사료가 물에 닿자 네 마리의 패닉 크리스털이 반응했다. 그러나 서둘지 않았다. 천천히 어항 가운데로 모여들어 각자의 사료를 삼켰다. 녀석들의 움직임은 유연하고 여유로웠다. 그 무심함에 여자는 간밤에 꾼 꿈을 떠올렸다. 꿈결에 보이다 말다를 반복하던 다섯 마리의 투명물고기들은 허공을 헤엄치며 밤새 여자의 이마 위를 맴돌았었다. 여자는 손바닥에 남은 사료들을 봉지에 흘려 넣었다. 사료 알갱이들이 손바닥을 굴러 봉지 속으로 떨어졌다. 다 들어갔는가 싶어서 보니 한 알이 남았다. 여자의 손에 맺힌 땀 때문이거나 굵은 손금 때문이거나 미련 때문일 것이었다. 여관 입구 화단에 묻힌 한 마리의 패닉크리스털에 대한 미련. 녀석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마지막 한 알의 사료는 손바닥 위를 굴러 어항 속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사료봉지가 아니라 어항 속으로. 그리고 패닉 크리스털의 몸 속에 들어가 녀석의 투명한 꿈속으로 스몄을 것이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일이, 그러리라고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예전에도 물고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잉어였다. 팔뚝만한 잉어를 여자는 치마로 받았더랬다. 잉어 꿈은 장차 재주가 많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딸을 낳을 징조였다. 배운 것들은 원래 그러냐? 오빠는 빈정댔다. 온전치도 않은 애한테 그러지 마라. 어머니는 타이르셨다. 우울증 걸리면 그런답디까? 그리고 다 나은 지가 언젠데! 언니는 발끈했다. 애비가 누구냐? 아버지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물으셨다. 그리고 아이의 애비라는 작자는 말했다.

너 미쳤냐?

여자는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갔다. 아름답고 지혜롭게 태어났을 딸은 화단 한쪽에 묻히거나 바람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지 못했다. 아마 검은 봉투에 담겨 녹색의 차를 타고, 예전에는 난과 영지가 잘 자랐다는 어느 섬으로 갔을지 모른다.
병원에서 돌아온 날 밤 여자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미역국을 끓여먹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불빛이 천장을 긁고 지났다. 엔진음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 지나며 창문으로 흘리고 간 전조등 불빛이라는 걸. 흐리고 몽롱한 눈빛 위를 훑고 지나는 그 불빛은, 마치 복사기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영혼을 복사해 놓으려는 것은 아닐까 여자는 생각했다. 영혼의 사본. 하지만 복사할만한 게 있기나 한 것일까. 여자는 불편하게 돌아누웠다. 그리고 밤새 지느러미가 없는 잉어 꿈을 꿨었다.
여자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서둘러 냉장고 문을 열고 인공눈물을 넣었다. 급히 넣느라 인공눈물이 눈에서 넘쳐 귀로 흘러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크리넥스를 뽑으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여자는 부주의했다. 손끝에 걸린 컵이 넘어졌고 물이 쏟아졌고 옆으로 누운 컵은 탁자 위를 구르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피한다는 게 그만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말았다. 손으로 탁자를 짚고 외발로 서서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유리가 박힌 자리에서 몽글몽글 핏방울이 피어올랐다.
여자는 욕조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에 발을 씻어냈다. 혹시 더 묻어있을지 모를 유리가루가 염려스러웠다. 피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물과 섞여 투명에 가까운 주홍빛을 띠며 경사진 바닥을 따라 배수구로 흘러들었다. 소용돌이치며 배수구 속으로 빨려들던 주홍빛의 액체는 간혹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건 마치 정화조로 흘러들 피들이 쏟아내는 마지막 울음소리 같았다. 아니면 그네들이 꾸는 마지막 꿈이거나.
샤워기를 발에 댄 채 여자는 생각했다. 투명한 패닉 크리스털의 몸속을 흐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혹시 꿈은 아닐까? 아니, 그 삶이 그대로 꿈은 아닐까? 어쩌면, 진화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그네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꿈은 육체에, 영혼에 삼투되고 육체는 꿈속으로 스며 그네들의 몸은 서서히 꿈처럼 투명하게 되었으리라. 여자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샤워기에서 흐르던 물줄기가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상처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발을 한껏 오므려 바닥을 디뎠다. 거울 앞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리자 사각의 틀 안에 하얀 타일 벽을 배경으로 또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허리 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발에도…… 상처가 있을까. 여자는 절룩거리며 욕실 문을 나섰다.


5.
택배가 도착했다.
붉은 조끼를 걸친 택배회사 직원은 여자에게 골판지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저기, 사인 좀……. 그는 어눌했다. 아직 앳돼 보이는 그는  여관이라는 낯선 공간이 무척 불편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볼펜을 받아들어 상자 윗면에 붙은 수령증 한 귀퉁이에 서명했다. 빨간 조끼는 여자가 서명을 하자마자 스티커식 수령증을 떼어내 서둘러 사라졌다. 비닐 테이프는 제법 야무지게 박스를 감고 있었다. 여자는 통유리문이 바람소리를 내며 몇 번 더 흔들리는 걸 바라보다가 책상서랍에서 칼을 찾아 꺼냈다.
오십 장 들이 씨디 케익 두 개와 백네 장 들이 씨디 쟈켓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전단지 한 장.

△△전자의 기술로 자유롭고 안전한 레코딩을 즐기세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어디선가 본 포스터가 생각났다. 거기엔 콘돔 사용을 권장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유롭고 안전한 사랑을 즐기세요.

두 문구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레코딩은 자유롭고 안전할 수 있을까? 여자는 씨디 케익을 둘둘 만 에어캡을 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자 오십 장의 공씨디가 나왔다. 비어있는 씨디들을 채울 것은 아마 오십 개의 사랑이거나 오십 개의 욕망이거나 그냥 몸일 것이다. 맨 위에 투명한 플라스틱 씨디가 있었다. 제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테지만, 아무 것도 레코딩할 수 없는 투명한 씨디라니. 여자는 패닉 크리스털을 한 번 돌아보곤 도로 뚜껑을 덮었다.
─방 있어요?
여자가 밖을 내다봤다. 노랑머리 사내가 쪽창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쉬어 가시게요?
그의 동행은 비디오테이프 진열대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비디오를 골라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단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야구모자 아래로 길고 검은 머리칼이 등을 덮고 있었다. 밤색 가죽재킷의 라인이 가는 허리를 유난히 가늘어 보이게 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사는 여자들 중 절반 정도는 머리가 길고 또 절반 정도는 허리가 가늘다. 그녀는 이 음충한 사각의 건물 안에서 완벽한 익명으로 존재했다. 어쩌면 입구를 들어서기 전  그녀는 죽은 패닉 크리스털이 묻힌 화단 한쪽에 자신의 이름과 영혼을 살짝 놓아두고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노랑머리가 손톱으로 쪽창의 유리를 가볍게 톡톡, 쳤다. 그의 익명의 동행을 오래 세워두지 말라는 듯.
노랑머리 일행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며 여자는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냉각팬 도는 소리를 내며 컴퓨터가 빠르게 부팅됐다. 모니터가 금세 환해졌다. 새로 구입한 공씨디 중 한 장을 꺼내 레코더에 걸고 바탕화면의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화면이 다시 바둑판처럼 분할됐다. 노랑머리 일행은 담소 중이었다. 아마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여자는 무심히 에어캡을 집어 들었다. 작은 에어캡들이 마치 수조의 에어펌프에서 흘러나오는 기포들 같았다. 말캉말캉했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하나를 터뜨리자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뽁-. 다시 하나를 터뜨렸다, 뽁-.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양손을 번갈아가며 빠르게 에어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실내가 마치 어항 속처럼 청량해지는 듯하였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 노랑머리가 수화기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곧 인터폰이 울렸다.
노랑머리 일행은 아직 할 얘기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맥주와 마른안주를 갖다 주고 돌아오던 여자는 쟁반을 든 채 남자가 잠든 방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방안은 여전히 적막하고 여전히 정지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가 잠들면서 방안을 흐르던 시간도 멈춰버린 건 아닐까?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흘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 카드로 지불한 대로라면 아마 일주일은 더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여자는 문득 막막해졌다. 저 사내…… 정말 잠들어 있는 걸까? 여자는 사흘 동안 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혼수상태나 뇌사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사흘이 넘도록 잠을 잘 수 있을까. 죽음이란, 꼭 독약을 먹거나 목을 매야만 찾아오는 건 아니다. 갑자기 목뒤가 서늘해졌다.


6.
방안의 풍경은 그녀가 줄곧 모니터에서 봤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넥타이와 코트, 그리고 책 두어 권이 삐죽이 드러난 가방까지 하나 변함이 없었다. 반쯤 열린 커튼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마름모꼴로 돋을새김 되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한 손으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다른 한 손을 남자의 코앞에 댔다.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남자는 살아있었다. 여자는 다리에서 힘이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막상 확인을 하고 보니 지금까지의 행동들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여자는 일어섰다. 코웃음을 치며 일어서다가 조심성 없이 그만 발에 난 상처로 바닥을 딛고 말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여자는 숨을 짧게 끊어 들이쉬며 소리를 삼켰다. 그러나 중심을 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침대를 짚은 것까지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가 깊게 꺼졌다가 나오면서 매트리스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여자는 가슴을 졸이며 경계하는 눈초리로 남자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낮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여자는 이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을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남자가 깨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퇴실을 하면, 정오가 조금 못돼 올 당번 여자에게 일러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곧장 나가기를 주저했다. 방안의 풍경은 이미 친숙했고, 사내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이미 긴장은 풀렸다. 그리고…… 여자는 그의 꿈이 궁금했다.
그에 대한, 아니 그의 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목걸이였다. 언뜻 그의 목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발견한 여자는 고개를 빼고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깃 사이를 유심히 살폈다. 십자가였다. 금줄을 타고 목 뒤로 넘어가다 쇠골에 걸려 비스듬히 누운 채 노란 빛을 내고 있었다. 예수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담백하고 각이 진 십자가였다. 예수가 없는 십자가라니……. 대부분의 십자가 목걸이란 것들이 그런 모양일 텐데도 이상하게 묘한 연민이 여자를 자극했다. 그는…… 지금 구원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여자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다시 출렁거렸지만 여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여자는 살며시 손을 들어 그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가 해안의 너른 사구처럼 짠내를 풍기며 드러났다. 그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그가 꾸는 꿈의 심연으로 침윤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꿈은 얼마나 어둡고 깊은 것일까. 여자는 생각했다. 돌아보면 꿈은 또한 그녀 삶의 마스카라였다. 눈썹 길이만큼의 삶을 끊임없이 덧칠해가며 옹색한 꿈의 그림자를 깜박여왔다. 그러나 구원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삶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검게 어루러기진 눈물 자욱만이 선명할 뿐이었다.
여자는 머리가 길고 허리가 잘록한 익명의 투숙객을 떠올렸다. 전날 녹화가 끝난 씨디를 꺼낼 때 노랑머리와 그의 동행은 알몸으로 서로 뒤엉켜 모니터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인도 어디에 있다는 탄트라 사원의 조각상 같았다. 침대에 부조된 듯 고정된 자세로 잠들어 있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그녀가 꾸는 익명의 꿈속에서 물고기들은 어떤 모습으로 저 허리 위를 헤엄쳐 다닐까. 긴장이 풀린 여자의 허리가 잠결에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노랑머리 일행은 두 시간을 채우고서도 조금 더 있다가 퇴실했다.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는 문득 생각난 듯이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두꺼운 먼지가 손바닥에 쓸렸다. 당번 여자는 이곳까지는 청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개의치 않고 한껏 팔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마침내 조그만 와이셔츠 단추 하나가 손끝에 걸려 미끄러지며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자는 엄지와 검지로 단추의 모서리를 잡고 일어섰다. 치맛자락으로 먼지를 닦아주자 햇살을 받은 단추는 보석처럼 하얗게 빛났다. 네 개의 구멍이 도드라져 보였다. 여자는 단추를 침대맡의 문갑 위에 올려놓았다.
여자는 그러고도 또 바로 나가지를 못했다. 잠깐 망설이더니 창문을 조금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런 후에 벗다 말아 길게 늘어진 남자의 양말을 벗겨주었고 코트와 넥타이를 옷걸이에 걸었다. 가방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도로 집어넣으며 여자는 그것들이 두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과 한 장의 씨디라는 사실을 알았다. 책은 쟝 베르나르 뚜라띠에라는 사람의 <상상동물 이야기>였다. 그러나 씨디에는 유성펜으로 휘갈겨 쓴 알파벳들만 적혀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여자는 읽기를 단념했다. 책 표지의 제목 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인간은 영혼과 이미지로 이루어진 환상의 동물이다.

여자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차갑게 여자의 볼을 스쳤다.
남자의 방에서 나와 막 프론트로 들어서는 여자를 맞은 건 사장이었다. 여자가 만들어놓은 씨디를 수거하러 온 것이었다. 사장은 여자를 향해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다. 한 손에 사료 봉지를 든 채. 여자는 기가 막혀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네 마리의 패닉 크리스털들은 꼬리를 흔들며 유유히 어항 속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몸은 이미 검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은 표정과 주먹 쥔 손과 검게 변해가는 물고기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충분히 일러주고 있었다.
─내가 그런 거 아냐.
뒤늦게 눈치 챈 사장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껌벅이며 오해 말라는 듯, 나는 이 끔찍한 사건과 무관하다는 듯,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네 마리 중 한 마리가 뒤집어지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의 무지가 물고기들을 죽였다는 것도 모르고, 꿈을 깨는 순간 몸과 죽음이 동시에 찾아오는 패닉 크리스털의 아이러니한 삶에 대해서도 모른다. 여자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 대신 한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이유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가 주저앉아 서럽게 울자 당황한 사장은 어, 어, 하는 말만 되풀이하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머지 세 마리의 물고기가 차례로 검은 몸을 뒤집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7.
남자가 깨어난 건 이틀이 지난 뒤였다. 그간 네 장의 새로운 씨디가 만들어졌고 여자의 상처 난 발은 탈 없이 잘 아물어갔다.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정돈된 옷들과 가방에 대해 잠시 의아해하는 듯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곧 익숙하게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먼저 미음을 끓여달라고 부탁한 후에 어디론가 몇 통의 전화를 걸었다. 카메라에 등을 보인 채 죽을 먹는 그의 모습은 흡사 한 마리의 염소 같았다. 마른 등허리가 더욱 앙상해 보였다. 첫 끼니에는 속이 메스껍다며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다가 점점 양을 늘려갔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속옷과 양말을 사다줬고 휴대폰의 배터리를 충전해줬고 가판대에서 영화 잡지를 하나 사다줬다. 세탁소에 맡겼다 찾아온 옷들은 말끔해져 있었다. 닷새 동안의 주름은 깨끗이 지워져 있었고 와이셔츠에는 새 단추가 달려 있었다. 그는 사흘을 더 묵었고 머물지 못한 이틀 분의 숙박료에 대해서는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수고하란 말을 남긴 채 커다란 통유리 문을 밀치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난 방에는 하나의 단추와 한 권의 영화 잡지가 남아 있었다. 잡지는 서너 군데가 접혀 있었다. 여자는 그중 한 곳을 펼쳤다.

나는 리버피닉스를 좋아한다. 영화 속에서 그가 연기한 마이크란 인물은 긴장하면 아무데서나 잠이 드는 기면발작증 환자로 설정돼 있다. 그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고 길 위에서 꿈을 꾼다. 그에게 꿈은 기억이고 집이고 고향이다. 꿈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독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추천하는 코너였다. 둡스라는 아이디를 사용한 독자는 자신이 한가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화광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리버피닉스의 추모일을 맞아 뭔가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가 추천한 영화는 <아이다호>였다. 그는 덧붙였다.

인간은 평생 대략 127,500번 꿈을 꾼다.

여자는 잡지를 손에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두꺼운 통유리 문을 밀치고 나간 그 사내는 자신의 삶에 몇 번의 꿈을 더하고 싶었던 걸까. 여자는 문갑 위에 놓인 단추를 집어들었다.

침대의 부드러운 쿠션에 몸이 나른했다. 남자가 닷새 동안 잠들어 있던 침대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반듯하게 누워 그를 흉내 내었다. 그는 자신의 꿈속에서 서성이던 한 여자를 기억할까? 여자가 눈을 뜨며 주먹 쥔 손을 폈다. 진주처럼 환하고 작은 단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엄지와 검지로 단추를 잡아 코앞에 바싹 들이댔다. 단추는 손바닥에 남아있던 한 알의 사료 같기도 하고, 어쩌면 한 마리의 패닉 크리스털 같기도 하고, 남자가 흘리고 간 꿈의 조각 같기도 했다. 그는, 단추를 놓고 가듯 자신이 이곳에서 꾼 꿈들을 모두 버리고 갔는지 모른다. 한가한 영화광 둡스의 말은 틀렸다. 꿈은 쉽게 허물어진다. 여자는 단추를 입속에 넣었다. 받아먹으라. 이것이 나의 꿈이니라. 남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커다란 알사탕을 삼키듯 목젖이 열렸다. 여자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런데…… 남자의 가방 속에 들어있던 씨디에는 무엇이 레코딩되어 있었을까? 여자는 눈을 감았다. 꿈을 꾸고 싶어졌다. 투명하게 하늘을 나는, 푸른 지느러미를 단 물고기의 꿈을. 단추가 작은 밀떡처럼 식도를 타고 넘었다.

 

 


  이대연 / 단국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2009년 『예술세계』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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