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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전철 속의 봄날 /성백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3. 13:19

전철 속의 봄날

 

성백원

 

 

개나리 꽃망울이 실하게 여무는 어느 봄날

비실비실한 눈길은 하염없이 눈길을 헤집는데

눈망울이 똘망한 대여섯 살 사내아이의

심상찮은 눈길을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

 

“아저씨, 아저씬 뭘 믿고 그렇게 못생겼어요?”

 

일시에 전철 안으로 함박눈이 쏟아졌고

숨소리가 사라진 허공엔 엄마의 박꽃 같은 얼굴만

낮달보다 더 하얗게 떠 있었다

 

“고뤠, 너는 참 씩씩하고 멋지게 생겼구나.”

 

여기저기서 새색시처럼 입을 가린 채

깨드득 거리는 소리만 손가락 사이로 기어 나오고

한숨을 돌린 엄마의 발그레한 볼 사이로

삼월의 봄이 수줍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적 여유가 나를 부끄러움에서 구원해 주었으니

 

“어느 봄날 오랜 친구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가는 전철을 탔다. 봄기운이 달리는 전철의 창문을 기웃거리는 풍경에 취해서 멍청하게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어린아이가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얼굴을 빤히 처다 보면서 나에게 말을 던졌다. 그 순간 사색이 된 엄마와 어이가 없어하는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커다란 위기의식을 갖게 된 봄의 굴욕에 그 아이에게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쓴다는 사람이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없으면 시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현대인들은 민감하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으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겉은 비록 못났으니 속이라도 바다가 되어야 했다. 시적 여유가 나를 부끄러움에서 구원해 주었으니 시야말로 내 삶의 이정표가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싶어 시인의 말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속에 바다 하나쯤 품고 살아야 하는 이 척박한 세상, 온통 바다 같은 사람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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