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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일회용 시대 / 김승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7. 14:40

일회용 시대

 

김승희

 

 

사발면을 후루룩 마시고

일회용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면

일회용 반창고를 딱 떼어서 던져 넣은 것처럼

 

이 시대에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누구에게서 내가

버림받는다 해도

 

한번 입고 태워버리는 종이옷처럼,

한번 사용하고 팽개쳐야 하는

콘돔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안에서

눈을 감고 주루룩 쏟아져 내리는

희게 질린 종이컵처럼

껌종이처럼 설탕포장지처럼

그렇게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잠깐 쓰고 버려지는

슬픈 향내의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나는 누구에게 일회용 이상의 가치는 있는지

 

대한민국은 이미 일회용의 천국이 된지 오래 입니다. 소비문화의 다양화를 넘어 다소비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회용으로 사용되어지는 형태와 종류도 더 세분화 되고, 소비를 부추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하지요. 심지어 일회용 사랑도 이젠 사랑의 한 트랜드로 자리 잡았을 정도이니 무엇을 더 말 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에 /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 누구에게서 내가 / 버림받는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 되었기에 도리어 ‘상처’ 또는 ‘그리움’ ‘후회’ 라는 단어쯤은 남녀관계에서 불필요한 의미 없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버림받는다 해도” 슬픔은 그야말로 개나 줘버려야 할 불필요한 감정으로 전락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 잠깐 쓰고 버려지는 / 슬픈 향내의 /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그렇게 /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라는 시인의 자조적인 낮은 절규에 대하여는 무어라 답해야 하는지요.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은 나에게 일회용이겠지만 나는 누구에게 일회용 이상의 가치는 있는지. 답은 하나뿐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일회용 소비재가 아니려면 내가 우선 누군가를 일회용이 아닌 진정한 마음을 담는 질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자판기처럼 쏟아내는 감정이 아닌 사골국물 같은 진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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