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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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시 16

[83] 병

[최영미의 어떤 시] [83] 병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2.08.15. 00:00 태어난 제 나라를 부끄러워하는 것. 지나간 사랑을 한탄하는 것. 부정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술잔 들고 술 깬 후의 슬픔을 미리 생각하는 것. -사토 하루오(1892~1964) (유정 옮김) 그림=이철원 어떤 일본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정서가 비슷해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시인들과는 다른 마음의 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이 마음 바닥을 건드린다. 패배한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개인의 좌절감. 제 나라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부정하기를 좋아하나 현실을 바꿀 힘은 없고, 지나간 사랑을..

[149] 살얼음이 반짝인다

[최영미의 어떤 시] [149] 살얼음이 반짝인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2.11. 03:00 일러스트=양진경 살얼음이 반짝인다 -첫추위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장석남 (1965~ )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은커녕 ‘논’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

[18]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최영미의 어떤 시] [18]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5.02. 15:00업데이트 2021.08.11. 14:49 한낮에 잠들어, 으스스한 밤에 쓸쓸하고 차가운 달빛 아래 깨어난 나는 바보였네. 내 장미를 너무 일찍 꺾어버린, 내 백합을 덥석 부러뜨린 바보. 내 작은 정원을 지키지 못했네 시들어 완전히 버려지고서야,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듯 우네 오 잠들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겨울이네. 미래의 봄과 햇살 따사로운 즐거운 내일을 얘기한들 뭣하리- 희망이며 이것저것 다 사라져, 웃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나 홀로 앉아있네.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이보다 슬픈 시를 본 적이 없다. ‘이브의 딸’ 제..

[3] 거울(Mirror)

[최영미의 어떤 시] [3] 거울(Mirro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1.18.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거울(Mirror)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과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중략)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중략) 이제 나는 호수다. 한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 그리고 저 거짓말들, 촛불이나 달빛을 향해 간다 (중략) 내 속에 그녀는 여자아이를 빠뜨렸고, 내 속에서 늙은 여인이 날마다 그녀를 향해 솟아오른다, 끔찍한 물고기처럼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1932~1963) 1인칭 화자인..

[74] 시계추를 쳐다보며

[최영미의 어떤 시] [74] 시계추를 쳐다보며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2.06.13. 00:00업데이트 2022.06.13. 02:13 밤이나 낮이나 한결같이 왔다 갔다 (…)언제나 그것만 되풀이하는 시계추의 생활은 얼마나 심심할꼬 가는가 하면 오고 오는가 하면 가서 언제나 그 자리언만 긴장한 표정으로 평생을 쉬지 않고 하닥하닥 걸음만 걷고있는 시계추의 생활을 나는 나는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나 역시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그저 그 세월 안에서 세월이 간다고 간다고 감각되어 과거니 현재니 구별을 해가면서 날마다 날마다 늙어가는 인생이 아닌가 늙고는 죽고, 죽고는 나고, 나고는 또 늙는 영원한 길손여객이 아니런가 -김일엽(金一葉·1896~1971) 그림=이철원 벽시계를 보며 이런 상념을..

[85] 가난(歎貧)

[최영미의 어떤 시] [85] 가난(歎貧)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2.08.29. 00:40업데이트 2022.08.29. 00:41 안빈낙도(安貧樂道)하리라 작정했지만 막상에 가난하니 그게 안 되네 마누라 한숨 소리에 낯빛을 잃고 굶주리는 자식에게 엄한 교육 못하겠네 꽃과 나무 모두 다 생기를 잃고 책 읽어도 글을 써도 시들하기만 부잣집 담 밑에 쌓인 곡식은 들 사람들 보기에 좋을 뿐이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송재소 옮김) /일러스트=박상훈 7행의 “부잣집 담 밑에 쌓인” 곡식은 한시 원문에 의하면 ‘보리(麥)’다. 쌀이라면 모를까 보리를 부러워했다니. 다산의 어려운 처지와 당시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난(歎貧)’을 쓰기 1년 전인 1794년에 다산은 경기 암행어..

[150] 눈보라

오피니언전문가칼럼 [최영미의 어떤 시] [150] 눈보라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2.18. 03:00 일러스트=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문태준 (1970~) ‘눈보라’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

[148] 인연

[최영미의 어떤 시] [148] 인연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2.04. 03:00 일러스트=이철원 인연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황인숙(1958~)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

[146] 감

[최영미의 어떤 시] [146] 감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1.20. 03:00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허영자(許英子 1938~) 일러스트=박상훈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

[143]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att)

[최영미의 어떤 시] [143]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att)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30. 03:00업데이트 2023.11.02. 14:57 일러스트=이철원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att)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송영택 옮김) 내 나이 또래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독일 작가, 한국에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소설로 더 알려졌지만 시도 곧잘 쓴 헤세. 중학생 시절에 그의 ‘..

[141] 감사

[최영미의 어떤 시] [141] 감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16. 03:00 일러스트=양진경 감사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노천명 (盧天命 1912~1957)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이가 들수록 포기가 빨라지고 욕망도 흐지부지, 내가 뭘 원했는지도 잊고 살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젊어서는 노천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시선집을 읽고 그 투명한 언어에 실린 쓸쓸한 마음의 풍경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

[140] 너에게

[최영미의 어떤 시] [140] 너에게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09. 03:00 일러스트=백형선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생뚱맞아 한참 노려보았다. 푸른 아침도 푸른 저녁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희뿌연 도시의 아침과 저녁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마포의 어느 도서관에서 ‘너에게’를 읽었다. ‘좋은 이웃’에 공감하며 나의 행운을 저울질해 보았다. 살아갈수록 이웃이 얼마나 소중..

[139] 향수(鄕愁)

[최영미의 어떤 시] [139] 향수(鄕愁)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9.25. 03:00업데이트 2023.09.25. 09:02 일러스트=이철원 향수(鄕愁) 나의 고향은 저 산 너머 또 저 구름 밖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김기림 (金起林 1908~?)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제목 ‘향수(鄕愁)’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고 아련하다. 어떤 요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편안한 시어들. 3행이 1연을 이루는데, 아래 행으로 갈수록 행이 길어지고 넓게 퍼진 모양이 마치 산자락이 펴지듯 시각적인 재미를 준다. 김기림은 1930년대 조선 문단에서 가장 앞서가는 모더니스..

[2] 원주 가는 길(原州途中)

[최영미의 어떤 시] [2] 원주 가는 길(原州途中) 최영미시인 입력 2021.01.11.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원주 가는 길(原州途中) 봄바람에 지팡이 짚고 관동 가는 길 원주로 들어서니 안개 낀 수풀 인적 드문 객사에 마차 또한 드물고 드높은 누각 비 온 뒤 붉은 해당화 십 년 길 누비며 다 닳아버린 신발 드넓은 세상에 텅 빈 주머니 하나 시 짓는 나그네 마음 어지러운데 산새 노래하듯 기생소리 들려오네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최명자 옮김) 김시습이 26세에 이런 시를 썼다. 그도 남자니까 기생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겠지. 마지막 줄에 ‘기생’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한시에선 ‘어화’(語花·말하는 꽃, 기생을 일컫던 말). 해당화와 대구를 이뤄 심심한 시에 생기를..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최영미의 어떤 시] [132]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8.07. 03:00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매실을 따고 있네요 일곱 개만 남았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날 좀 데려가세요 매실을 따고 있네요 세 개만 남았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지금 빨리 오세요 매실을 다 땄네요 광주리에 담고 있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말만이라도 해주세요 -작자 미상, 출전 (이기동 옮김) 일러스트=이진영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에 실린 노래다. 매실이 익을 무렵 그녀의 청춘도 무르익어 날 좀 데려가 달라고 임을 부른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매실을 따며 부르던 민요일 텐데, 초여름에 매실을 따는 고된 노동이 사랑 노래를 부르며 좀 가벼워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