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뜬구름 그는 도피중이다 뜬구름이므로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은 그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완벽한 심증은 사교 邪敎처럼 번졌으나 머리와 꼬리가 분간되지 않는 이 시대의 정신은 그를 잡아넣을 감옥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범죄를 기각하였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6.10.24
스물 셋 가을에서 스물여섯 여름까지 스물 셋 가을에서 스물여섯 여름까지 일 학기 윤리학 강의가 끝나고 옷에 몸을 맞추고 구두에 발을 맞추며 사는 세상으로 절룩이며 갔다 처음으로 총 쏘는 법을 배우며 사선에 오르기 전에 연병장을 스무 바퀴 돌고 승자 없는 선착순의 끝머리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6.10.22
겨울우화 겨울우화 사정거리 밖에서 風景이 지워집니다. 괄호속에 묶인 채로 서서 잠든 흐린 연필자국의 겨울밤 단단한 외로움의 재봉선도 따라 지워집니다. 누구냐 누구냐 암호의 공허한 메아리가 시들어 버린 시간의 뇌관을 때리고 오만 파운드의 욕망이 바람 앞에 소집 되었습니다. 이름을 부..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6.10.16
깊은 산에서의 일박 깊은 산에서의 일박 / 나호열 다시 돌아 오겠는가 무거운 등짐 어디다 풀어놓고 이제 하룻밤 잠을 즐기려는가 호반새 울어 내일 큰 물지면 길도 끊겨 나도 산으로 가야 하는데 부끄러워라 어리석은 양초 몇 자루 되돌아 올 지도 버려야지 하면서 또 한 모금 삼키는 갈증의 텃밭 가까이 되돌아 먼 산을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1.08.07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 혼자 서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것은 치욕이었다 망원경으로 멀리 희망의 절벽을 내려가기엔 나의 몸은 너무 가늘고 지쳐 있었다 건너가야 할 하루는 건널 수 없는 강보다 더 넓었고 살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 것이나 잡았다 그래, 지금 이 높다란 붉은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2.01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 / 나호열 1. 사막을 건너가는 쌍봉낙타를 본 적이 있어 가도가도 끝없는 열기와 모래바람 이윽고 오아시스에 닿을 때까지 배고픔을 견디고 갈증도 아낄 줄 아는 영리한 짐승 이 도시가, 거대한 낙타가 되어 걸어가고 있어 육봉 속 감추어진 지방질 차곡차곡 술통처럼, 채워진 물과 같이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1.29
동란冬蘭 冬蘭 / 나호열 2009. 우리집 난 반쯤 흰 살을 드러낸 웃음의 뒷길을 그믐달이 가고 있다 음지로 뻗는 푸르름 치아가 이쁜 은장도 하늘을 물고 있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1.25
패배자를 위하여 패배자를 위하여 / 나호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1 누구나 알고 있다 패배의 종말이 어떤 것인지 일부는 죽고 일부는 치욕적으로 살아 남아 노예가 되거나 값싼 노리개가 되어 어떻게 천천히 죽어 갔는지 이기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며 언제나 굴종 아니면 죽음을 제비 뽑으며 변두..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1.24
뜬구름 뜬구름 / 나호열 그는 도피중이다 뜬구름이므로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은 그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완벽한 심증은 사교訝敎처럼 번졌으나 머리와 꼬리가 분간되지 않는 이 시대의 정신은 그를 잡아넣을 감옥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범죄를 기각하였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1.23
연기煙氣 연기煙氣 / 나호열 마지막 한순간이다 풀릴듯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아쉬움이 남는 생명의 심지 끝에서 새어나오는 짧은 한숨이다 연기는 멱살잡고 싸우다 피식 웃음으로 파장하는 하루의 뒷모습이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1.20
오징어를 씹으며 / 나호열 오징어를 씹으며 / 나호열 어쩌자는 것인가 심심풀이로 씹고 있는 오징어의 은근한 짠맛이 죽어서도 완강히 남아 있는 오기와 같아 나는 더 억센 입질로 씹고 씹는다 바다를 물어 뜯듯이 오징어는 알고 있는가 죽임을 당한 그의 죄를 단지 왕성한 식욕을 못이겨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그의 죄를,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1.08
카나리아 카나리아 / 나호열 -囚人을 위하여 물을 주세요. 양식을 주세요. 푸른 하늘을 보여 주세요 너는 지금 울고 있다 ㅡ 좀 더 자연스런 환경을, 외로움을 덜어 주세요 너는 지금 울고 있다 ㅡ 이 속박을, 자유롭게 죽을 수 있도록 풀어 주세요 너는 지금 울고 있다 네가 울면 울수록 상쾌하다 십자로 엇갈린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0.30
오늘의 뉴스 오늘의 뉴스 / 나호열 새벽 한 시가 천천히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잠들 시간이야 지하로 내려가는 문들을 잠그면서 새벽 한 시가 달콤하게 몸 속에서 녹는다 미리 읽은 내일 아침 신문 활자들이 토사물처럼 뇌수에 얼룩지고 아무 일 없을까 정말 내일은 무사할까 집행관 같은 초침의 발자국소리가 몸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0.29
통조림 통조림 / 나호열 인생의 반쯤이 지나가고 있다 반환점이 없는 오르막길을 내처 달리기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통조림 빈 깡통처럼 나는 울고 있었어 그도 그랬을까 제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나보다 어린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면서 눈을 감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돌팔매를 맞고서도 아프지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0.28
산사에서 산사에서 / 나호열 풍경소리에도 자그맣게 흔들리는 달빛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천 년을 내내 눈 떠 있는 석불의 입술은 앞산 나무들을 흔드는 바람이 되고 싸락거리는 소리 반야심경을 읊으며 냇물로 흘러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갈림길에서 흔들리는 그믐의 달빛 두드릴수록 허물어져 내리는 육신..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