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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스물 셋 가을에서 스물여섯 여름까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0. 22. 23:27

스물 셋 가을에서 스물여섯 여름까지

일 학기 윤리학 강의가 끝나고

옷에 몸을 맞추고 구두에 발을 맞추며 사는

세상으로 절룩이며 갔다

처음으로 총 쏘는 법을 배우며

사선에 오르기 전에 연병장을

스무 바퀴 돌고 승자 없는 선착순의 끝머리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는 표적을 바라보며

무엇이 나의 적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늠자에 들어오는 무표정의 저 원거리 표적

총을 드니 세상사는 일이 두려워졌다

총은 살의이고

총을 둔 우리는 모두 살인 예비자이기 때문에

만일, 내가 쏘아야 할 적의 이름과 나이와 고향과

그런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면

나는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총알이 빠져나간 총구는 비정한 웃음처럼

화약연기를 피워 올리고

엠식스틴에이원 자동소총은 거총바로의 자세로

월남의 치부를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로버트 미첨이었던가 잘 생긴 그 사나이

총도 들지 않는 종군기자

죽음과 주검의 사이에서 그는 말했지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전쟁을 즐기고 있는 중이오

왜?

심심하니까

스무 발의 적의를 배우기 위하여 하루가 지나고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단 오 분간의 전투를 위하여

삼 년을 먹고 입어야하는 사육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오분 간은 언제 올까

영영 오지 않을까

스무 세 살의 가을에 처음으로 나는

나에게로 띄우는 편지를 썼다

내 몸은 점점 나 아닌 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명령과 복종의 습관적 반복 속에 나는 북으로 북으로

서울을 지나

춥고 어두운 빈 영혼의 땅으로 북상하였다

말없는 호송트럭의 엔진소리처럼 무엇인가 멀어져 가고 있다는

눈물이 쿨럭거렸으나

이내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에 뒤덮힌 채

다시 잠에 빠지고 있었다

고지에서는 모든 것이 잘 보였다

저 아래 능선과 강물과 끝없이 펼쳐진 철조망까지도

모조리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포대경은 그리움의 저 너머까지도 샅샅이 포착하였고

그럴수록 내 몸에서는 감정의 윤기가 사그러 들었다

우리의 존재는 오로지 좌표로서만이 확인될 뿐

너비 사 킬로미터의 남북간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매복지뢰처럼

참호와 벙커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야간 교신 시간이면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쇳소리

명령과 점검의 무감각한 목소리들이

서로의 가슴을 엇갈리며 지나가고

가끔씩 목표물을 향해 달려드는 포사격의 굉음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

필름이 되감길 때처럼 계절을 재빨리 뒤바뀌지고

어떤 때는 필름에 찍히지 않은 광목천 같은 허연 풍경이

어색하게 펼쳐지곤 했다

아무도 자신의 나이를 셈하지 않았으며

묵묵히 새로 교통호를 팔 때 함께 발굴되는

인골, 개머리판, 인식표, 불발탄을 내려다보며

아직도 완강하게 흙이 되기를 거부한

인식의 뼈를 가슴에 주워 담을 뿐

바라보면 펄럭이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보이지 않는

손을 뻗쳐 이 산하를 묶고 있었다

눈이 내린다

잊어벼려 나지막한 바람의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눈이 내린다 스물 셋의 편지가 이제

도착하고 있다

삭아내린 감정과 그리움같이

뼈같이, 실어증같이

녹슨 열쇠 같이

스물 셋 가을부터 스물여섯 여름까지

무서운 오 분 간은 오지 않았고

티눈 박힌 걸음으로 돌아 왔을 때

윤리학 강의를 같이 듣던 학생들은

하나도 없고

나는 길을 잃고 있었다

모든 길이 내 앞에서 뚝뚝 절벽으로

끊겨져 있었다

그리곤 아무에게도 다시는 편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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