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희망 더러운 희망 / 나호열 충분히 행복하였다면 누가 희망을 가지겠느냐 어제는 싸우고 오늘은 화해하며 누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세 번 뉘우치겠느냐 쳐다보기도 싫은 더러움 속에서 꾸역꾸역 쌍욕처럼 치밀어 오르는 파리떼들 더러운 생존 속에서 우리는 더러운 희망의 알을 낳는다 사납게 휘둘러..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10.24
조명기구 가게에서 ·7 조명기구 가게에서 ·7 / 나호열 눈을 뜨고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고되지 않은 단전 앞에서 모든 통로는 순식간에 봉쇄되어 버린다 일요일 밤 바이올렛이 어둠에 제 빛깔을 놓아버리듯이 더듬거리며 머리를 부딪히며 사는 것이라고 속으로 번지는 아름을 그대로 놓아버린다 새롭게 돌아오는,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9.13
조명기구 가게에서 ·4 조명기구 가게에서 ·4 / 나호열 말이 없네 해거름 안에는 도착할 수 없는 나는 너를 향하여 너는 나를 향하여 외면하다 먼 곳에 초점으로 맺히고 만 엇갈림이었네 거울의 파편이 되어 세월은 모여지지 않고 육신은 거울에 갇혀 꽃불을 피우네 허망한 어둠 속으로 씨를 뿌리는 것이라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9.13
조명기구 가게에서 ·10 조명기구 가게에서 ·10 / 나호열 하얗고 긴 피아니시모의 손이 내려온다 눈 뜨고 잠든 꿈의 자막을 지우고 빈 곳에는 빈만큼의 적막을 풀어 놓는다 어느 한 곳 놓치지 아니하고 탐색등처럼 달빛이 지나간 흔적 새벽 일찍이 나가보면 그 길엔 말끔히 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이 있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9.05
조명기구 가게에서 · 2 조명기구 가게에서 · 2 / 나호열 먼 곳에서 한 사람이 편지를 읽고 있다 물방울 합쳐지듯이 영롱한 불빛들 가만히 한쪽 실끝을 잡아당기자 생명을 거슬러 오르는 단단한 씨앗이 마악 터져나오고 있었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9.03
가을을 향해 · 1 가을을 향해 · 1 / 나호열 삼십 촉 전등만큼 어두워지고 있다 단물이 든 빛나던 웃음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툭 떨어지는 입맛일 때 승전의 환희보다 차라리 한방울 눈물을 사랑하는 깊은 눈맞춤 종소리는 낮게 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어디에도 닿지 못했던 길들이 되돌아온다 미납으로 떨어..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9.02
조명기구 가게에서 ·Ⅰ 조명기구 가게에서 ·Ⅰ/ 나호열 아직 영혼이 깃들지 않은 아기의 얼굴 전구들은 반짝인다 작으면 작은대로 서로 어울리고 큰 것들은 저 홀로 당당히 뽐내기도 하면서 아직 이어지지 않은 전선의 끝에 아득히 아득히 내가 서 있다 잠재된 필라멘트의 혈관 속으로 뜨겁게 흘러드는 나의 목숨 긍휼한 하..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9.01
등용문 등용문 / 나호열 질문이 없으면……강의가 끝나고 지우개에 털리는 막막함 아름다운 이상과 공식이 절반으로 접히고 꽝꽝 문이 닫힐 때 우리가 숨죽여 호명을 기다릴 때 서둘러 떠나는 오월 원인은 없고 단지 삐뚜름한 책걸상 제멋대로 돌아가지 못 할 울울청청 숲을 꿈꾸고 꿈은 움직일 때마다 두통..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31
모기향을 피우며 모기향을 피우며 / 나호열 음험한 공기가 방 안에 퍼진다 낮은 목소리의 모의가 무차별하게 짜증나는 여름밤의 배후를 친다 피리소리처럼 가늘게 마약처럼 습관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성 향기로운 모기향은 파리, 모기, 나방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처럼 방 안에는 편안한 잠이 보장..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30
젖소 젖소 / 나호열 젖소는 일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풀과 사료를 먹으면서 아무 생각없이 젖을 만든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고무장갑의 큰 손이 우유를 가져가기 위해 방문한다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들에게 젖소는 반항하지 않고 화내지도 않는다 젖소는 제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결코 젖소는 제..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29
가을을 향해 · 3 가을을 향해 · 3 / 나호열 조율이 되지 않는다 슬픔은 백자 수반에 서성거리는 꽃의 그림자 문 닫히는 소리가 낮은 도음으로 울려왔다 조용하였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29
가을을 향해 · 2 가을을 향해 · 2 / 나호열 누가 숨어 있는지 싸리비자락 쓸리는 소리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있다 가까운 듯 먼 풍경 속에서 지우개 같은 가을이 올 때 툭 투욱 끊어지는 현 세상은 부서진 악기처럼 한 층 또 한 층 낮은 음계 속으로 울음소리 들리다 깊어져갔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29
부자에게 하는 말 부자에게 하는 말 / 나호열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사람들은 제 무덤 밖의 세계가 더욱 외롭지만 제 마음의 깊이와 너비를 가늠하던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서 영원을 산다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29
자서 自序 / 나호열 태어나 처음으로 당선 소감이라는 것을 썼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이제 나는 나의 生에 칼을 들이대고 살게 되었다.''라는 첫출나기의 辨이 몇 년이 니잔 지금에도 유효한 것인지, 시 가 내 생의 시녀인지, 아니면 내가 시의 제사장인지, 몹시 어 지럽다. 別居 상태, 적절한 표현이 될른..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2010.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