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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185

[26] 우암의 글과 브로치 외교

오피니언전문가칼럼 [정민의 세설신어] [26] 우암의 글과 브로치 외교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0.22 22:23 | 수정 2009.10.29 10:16 1 1668년 현종이 74세의 원로 대신 이경석(李景奭·1595~1671)에게 궤장(�Q杖), 즉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하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당시 잔치 장면을 그린 세 폭 그림이 보물 930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이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건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경석은 글이라도 보내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우암은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게 된 경과를 담담히 적고, 국가에서 원로를 예우하는 미풍을 칭송했다. 이경석은 1650년 효종의 북벌 계획이 밀고로 청에 알려졌을 때, 목숨..

[25] 국화 축제

[정민의 세설신어] [25] 국화 축제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0.15 21:51 | 수정 2009.10.21 16:44 김 노인이란 이가 있었다. 국화를 잘 심어, 꽃 피는 시기를 마음대로 조절했다. 손톱만 한 것부터 엄청나게 큰 것까지 자유자재로 피워냈다. 옻칠한 것처럼 검은 국화뿐 아니라, 한 줄기에 여러 색깔의 꽃을 동시에 피워낼 수도 있었다. 그의 국화는 다른 사람 것보다 몇배 비싼 값에 팔려, 그는 이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강이천(姜彛天·1769~1801)의 '이화관총화(梨花館叢話)'에 나오는 얘기다. 18세기 조선에서는 국화 재배 붐이 크게 일었다. '국보(菊譜)', '예국지(藝菊志)', '동리중정(東籬中正)' 등 국화 재배 방법과 품종을 소개한 책들의 인기도 높았다...

[24] 명량대첩 축제와 거북선 탐사

[정민의 세설신어] [24] 명량대첩 축제와 거북선 탐사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0.08 23:12 | 수정 2009.10.12 11:42 전남 진도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이다. 명량대첩은 거북선 한 척 없이 단 1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133척의 왜군 함대를 물리친 기적의 승리였다. 2007년부터 거북선 탐사프로젝트를 계속해온 경상남도청은 10월 말에 2단계 탐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거북선 민간탐사 프로젝트 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이 진행 중이다. 이렇듯 충무공과 거북선은 잇단 경기 침체로 시무룩해진 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상징 코드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명량대첩에서 보듯 충무공의 승리는 거북선 때문이 아니었다. 원균의 손에 들어간 거북선이 힘 한..

[23] 우측통행

[정민의 세설신어] [23] 우측통행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0.01 23:17 | 수정 2009.10.02 11:15 가는 곳 계단마다 '우측통행' 표지가 선명하다. 지하철 역에 따라 에스컬레이터 방향도 평소와 반대로 바뀌었다. 다음 역도 그러려니 하고 그쪽으로 가면 거기는 예전 그대로다. 몸은 익은 대로 좌측 벽을 따라 걷는데, 화살표는 자꾸 역방향을 가리킨다. 아무 생각 없이도 잘 걷던 길을 갑자기 방향을 의식해야 한다고 하니 길 가기가 참 피곤하다. 예전 대만에 교환교수로 가서는 학교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내가 자꾸 학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본에 가면 통행은 불편함이 없는데, 대신 차가 예상과 반대 방향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화들짝 놀라곤 한다.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은 선택의 ..

[22] 제주의 외국인 표류민

[정민의 세설신어] [22] 제주의 외국인 표류민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9.24 23:06 | 수정 2009.09.25 10:23 MBC의 주말 드라마 '탐나는도다'는 17세기를 배경으로 제주 해녀 버진과 표류 난민인 영국 청년 윌리엄, 귀양 선비 박규, 동인도 회사 직원인 일본인 얀이 벌이는 사랑 이야기다. 문화충돌을 화두 삼아 좌충우돌하는 전개에 시청자의 호기심이 부쩍 쏠리는 모양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어났다면 외국인 표류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네덜란드인 하멜 등은 1653년 8월 제주에 표착하여 무려 13년간 억류되었다가, 1666년 9월에 간신히 일본으로 탈출했다. 여기 또 한 사건이 있다. 1801년 8월, 제주 대정현 당포에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다. 배는 앞바다에 ..

[21] 지상담병(紙上談兵)

[정민의 세설신어] [21] 지상담병(紙上談兵)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9.17 23:19 | 수정 2009.09.24 10:00 조(趙)나라의 명장 조사(趙奢)는 아들 조괄(趙括)을 좀체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모두들 병법은 조괄을 당할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 터였다. 답답해진 그의 아내가 연유를 물었다. 조사가 말했다. "군대는 죽는 곳인데 저 아이는 너무 쉽게 말을 하오. 조나라가 저 아이를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대를 무너뜨릴 자는 반드시 저 아이일 것이오." 훗날 조나라 왕이 진(秦)나라와의 전투에서 싸울 생각을 않고 성을 지키고만 있던 노장 염파(廉頗)를 빼고 젊은 조괄을 투입하려 했다. 그러자 그 어미가 안 된다며 막고 나섰다. 왕이 이유를 묻자, 대답이 이랬다. 그 아비..

[20] 중국판 동의보감

[정민의 세설신어] [20] 중국판 동의보감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9.10 22:18 | 수정 2009.09.10 23:30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중국에서 출판된 '동의보감(東醫寶鑑)' 이야기가 나온다. 25책으로 간행된 이 책은 판본이 몹시 아름다웠다. '동의보감'은 의서로서 콘텐츠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중국에서도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연암은 책이 몹시 탐나서 꼭 사고 싶었지만 5냥이나 되는 책값 마련이 어려워, 결국 능어(凌魚)란 이가 중국판 앞에 쓴 서문만 베껴 써오고 만 것을 두고두고 애석해했다. 능어는 서문에서, 구석진 외국 책이 중국에서 행세하게 되었으니 담긴 이치가 훌륭하다면 땅이 먼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했다. '동의보감'은 내경(內景)을 먼저 서..

[19] 재석도(載石圖)와 박면교거(剝綿攪車)

[정민의 세설신어] [19] 재석도(載石圖)와 박면교거(剝綿攪車) 정민 입력 2009.09.03 22:57 | 수정 2009.09.08 19:01 중국에 사신 갔던 신위(申緯)가 돌아왔다. 휘장을 친 수레 하나가 따라왔다. 가족과 친지들은 입이 그만 귀에 걸렸다. 휘장을 걷자 온통 돌뿐이었다. 그 무거운 괴석을 싣고 만주벌을 건너왔던 것이다. 자신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화공을 불러 재석도(載石圖), 즉 돌 싣고 오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추사가 '수선화부(水仙花賦)'를 글씨로 쓰는 등 수선화 예찬론을 펼치면서, 중국에서 수선화 구근을 수입해 오는 것도 한때 크게 유행했다. 수반에 구근을 얹어 겨울철 방 안에서 수선화 향기 맡는 것을 사대부의 고아한 풍류로 여겼다. 나중에는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호변(號辨)

[정민의 세설신어] 호변(號辨)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8.27 23:18 화가 최북(崔北)은 오기로 똘똘 뭉친 사내였다. 천한 화공의 신분이었지만 기개가 드높았다. 최북의 몇 가지 호 중에 '거기재(居其齋)'란 이상한 이름이 있다. 내 추정은 이렇다. 양반집 사랑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업수이 여겨 이름을 안 부르고 '이봐 거기!' 하고 불렀다. 그림을 다 그린 최북은 호를 '거기재'로 떡 썼다. 너희가 나를 '거기'라고 부르니, 부르는 대로 낙관해 준다는 뱃심이었다. 그는 칠칠(七七)이란 호도 즐겨 썼다. 본명인 '식(埴)'자를 초서로 쓰면 칠(七)자를 두 번 쓴 것 같아서 장난친 것인데, 혹은 최북의 북(北)자를 파자(破字)한 것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술법에 능했던 도사 중에도 ..

[17] 수경신(守庚申) 신앙

[정민의 세설신어] [17] 수경신(守庚申) 신앙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8.20 23:01 중국의 관광기념품점에 가면 흔히 세 마리 원숭이를 새긴 나무 조각을 볼 수 있다. 각각 입과 눈과 귀를 가렸다. 일본의 신사에 가도 세 마리 원숭이 조각상을 자주 본다. 인사동에서도 심심찮게 보았다. 설명을 청하면 대뜸 시집살이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이란 뜻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고상한 축은 '논어'의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는 구절을 일러준다. 그런데 왜 하필 원숭이인가? 사실 이 조각상은 예전 민간 도교의 수경신(守庚申) 신앙에서 나왔다. 우리 몸에는 삼시충(三尸蟲)이란 벌레가 있다. 요놈은 몸속에 숨어 주인이 하는 과실을 장부에 기록해 둔다...

[16] 칭찬 교육

[정민의 세설신어] [16] 칭찬 교육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8.13 23:05 시인 백광훈(白光勳·1537~1582)은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서울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했다. 그가 자식에게 보낸 편지 24통이 문집에 실려 있다. 편지 중에 특별히 내 눈길을 끈 것은 형남(亨南)과 진남(振南) 두 아들에게 막내 흥남(興南)이의 교육을 당부한 대목이다. 45세 때인 1581년에 쓴 편지에서는 "흥남이도 공부를 권유하되 마구 힐책하지는 마라. 향학의 마음이 절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편지에서도 "흥남이는 늘 잘 보살피고 북돋워 일깨워서 저절로 배움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절대로 나무라거나 책망해서 분발함이 없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또 "흥..

[15] 파초설(芭蕉說)

[정민의 세설신어] [15] 파초설(芭蕉說)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8.06 22:54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파초'란 글이 있다. 여름날 서재에 누워 파초 잎에 후득이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을 아껴 파초를 가꾸노라고 썼다. 없는 살림에도 소 선지에 생선 씻은 물, 깻묵 같은 것을 거름으로 주어 성북동에서 제일 큰 파초로 길러낸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앞집에서 비싼 값에 사갈 테니 그 돈으로 새로 지은 서재에 챙이나 해 다는 것이 어떻겠냐 해도, 챙을 달면 파초에 비 젖는 소리를 못 듣는다며 들은 체도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파초 기르는 것이 꽤 유행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파초 사랑도 유난했다. 파초는 남국의 식..

[14] 청선(聽蟬)

[정민의 세설신어] [14] 청선(聽蟬)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7.30 22:08 | 수정 2009.08.01 10:20 퇴계 선생이 주자(朱子)의 편지를 간추려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란 책을 엮었다. 책에 실린, 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장한 편지는 서두가 이랬다. "수일 이래로 매미 소리가 더욱 맑습니다. 매번 들을 때마다 그대의 높은 풍도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남언경(南彦經)과 이담(李湛) 등이 퇴계에게 따져 물었다. 요점을 간추린다고 해놓고 공부에 요긴하지도 않은 이런 표현은 왜 남겨 두었느냐고. 퇴계가 대답했다. "생각하기 따라 다르다. 이런 표현을 통해 두 사람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단지 의리의 무거움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 빼면 사우(師友) ..

[13] 절대 가난

[정민의 세설신어] [13] 절대 가난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7.23 23:16 | 수정 2009.07.27 11:09 1813년 6월 12일, 다산초당으로 이성화(李聖華)란 이가 찾아왔다. 당시 그는 남쪽까지 내려와 막객으로 있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좀체 나아지지 않는 생활을 푸념했다. 다산은 대답한다. 물정 모르는 부인네가 서울서 살려면 고리채를 얻지 않고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 결국 몇 년 벼슬살이 월급을 꼬박 모아도 1년 서울 생활 비용을 댈 수가 없다. 땔나무가 귀해 말똥을 태우고 개가죽 옷을 입고 겨울을 나는 서울 생활은 늙으면 가래 기침을 고질로 안겨줄 뿐이다. 진작 벼슬을 그만두고 산골짝에 들어가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이익이다. 그러면서 양수리 근처 서..

[12] 표류선과 해저유물선

[정민의 세설신어] [12] 표류선과 해저유물선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07.16 21:41 | 수정 2009.07.20 09:28 18세기 중반 청나라의 해금(海禁) 정책이 풀리면서, 중국배의 서남해안 표류가 부쩍 잦았다. 중국배가 표착하면 나주 등 관할 지역 목사는 문정관을 파견해서 구호케 했다. 실정 파악 후 배가 부서졌으면 육로로, 배가 온전하면 고쳐서 수로로 돌려보냈다. 관련 기록만도 수십 건 전한다. 그런데 막상 현지의 사정은 달랐다. 문정관이 섬으로 건너오면 함께 온 아전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섬 주민들이 수십명에서 백여명에 이르는 표류민에게 상당 기간 거처와 양식을 제공해도 관에서는 그 비용을 좀체 배상해주지 않았다. 표류선이 한 척 들어오면 인근 여러 섬의 경제가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