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정민의 세설신어 185

[140] 체구망욕(體垢忘浴)

[정민의 세설신어] [140] 체구망욕(體垢忘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01.12. 23:30업데이트 2020.07.31. 17:43 권소운(權巢雲)이 이학규(李學逵· 1770~1835)를 찾아와 자신의 거처 관묘당(觀妙堂)을 위한 기문을 청했다. 그는 40년간 과거에 응시하다가 만년에 포기했다. 머리맡에 당송 고시 한두 권을 놓아두고 자다 일어나 펼쳐지는 대로 몇 수씩 읽곤 했다. 취하면 두보의 '취가행(醉歌行)'을 소리 높여 불렀다. 집 이름의 연유를 묻자, 그가 대답한다. "사물의 이치는 깨달으면 묘하고, 묘하면 즐겁지요. 천기(天機)는 날마다 새롭고, 영경(靈境)이 나날이 펼쳐집니다. 묘함을 깨달을수록 보는 것이 점점 묘해집디다. 그래서 관묘당이라오." 대답을 들은 이학규가 벌..

[139] 자지자기(自止自棄)

[정민의 세설신어] [139] 자지자기(自止自棄)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01.05 23:41업데이트 2020.07.31 18:19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임금에게 먼저 뜻을 세울 것을 청한 '청선입지소(請先立志疏)'의 한 대목. "대저 뜻이란 기운을 통솔하는 장수입니다. 뜻이 있는 곳이면 기운이 반드시 함께 옵니다. 발분하여 용맹을 다하고, 신속하게 떨쳐 일어나는 것은 힘을 쏟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면서 꼭대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치는 것[自止]이 됩니다. 우물을 파면서 샘물이 솟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自棄]이 됩니다. 하물며 성현과 대덕(大德)이 되려면서 뜻을 세우지 않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등산은 정상에..

[138] 습정투한(習靜偸閑)

정민의 세설신어 [138] 습정투한(習靜偸閑)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2.29 23:32업데이트 2020.08.10 02:17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부산하다. 정신없이 바쁜데 한 일은 없다. 울리지 않는 휴대폰의 벨소리가 귀에 자꾸 들린다. 갑자기 일이 생기면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혼자 있는 시간은 왠지 불안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정신 사납다. 고요히 자신과 맞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본 것이 언제인가? "세상맛에 푹 빠지면 바쁨을 구하지 않아도 바쁨이 절로 이르고, 세상맛에 덤덤하면 한가로움에 힘쓰지 않아도 한가로움이 절로 온다(世味濃, 不求忙而忙自至; 世味淡, 不偸閑而閑自來)." 명나라 육소형(陸紹珩)이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에서 한 말이다. 관심이 밖으로 향해 있으면 바쁘단 ..

[137] 설니홍조(雪泥鴻爪)

[정민의 세설신어] [137] 설니홍조(雪泥鴻爪)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2.22 23:10 송나라 때 소식(蘇軾)이 아우 소철(蘇轍)에게 화답한 시는 이렇다.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한가. 기러기가 눈 진흙을 밟는 것과 흡사하네.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았어도, 날아가면 어이 다시 동서를 헤아리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이 되어 섰고, 벽 무너져 전에 쓴 시 찾아볼 길이 없네. 지난날 험하던 길 여태 기억나는가? 길은 멀고 사람 지쳐 노새마저 울어댔지.(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君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시의 뜻은 이렇다. 사람의 한 생은 기러기가 눈 쌓인 진흙밭에 잠깐 내려앉아 발자국을 남기..

[136] 토붕와해(土崩瓦解)

[정민의 세설신어] [136] 토붕와해(土崩瓦解)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2.15 23:30 1529년, 중종의 정국 운영이 난맥상을 빚자 대사간 원계채(元繼蔡) 등이 상소문을 올렸다. 요지는 이렇다. 나랏일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상황인데도 임금이 끝내 깨닫지 못하면 큰 근심을 자초한다. 임금이 통치의 근본은 잊은 채 자질구레한 일이나 살피고, 번잡한 형식과 세세한 절목은 따지면서 큰 기강을 잡는 일에 산만하면, 법령이 해이해지고 질서가 비속해진다. 밝은 선비가 바른말로 진언해도 듣지 않다가 큰일이 닥쳐서야 비로소 후회한다. 이는 고금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이렇게 일반론으로 운을 뗀 후, 이어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전하는 즉위 초에는 정성으로 덕을 닦고, 세운 뜻도 굳었다. ..

[135] 수락석출(水落石出)

[정민의 세설신어] [135] 수락석출(水落石出)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2.08 23:14 | 수정 2011.12.09 13:44 1082년 7월 16일과 10월 15일, 소동파는 적벽에 놀러 가 전후 '적벽부(赤壁賦)'를 각각 남겼다. 당시 그는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반대했다가 황주(黃州) 땅에 유배된 죄인의 신분이었다. 7월의 흥취가 거나했던지, 동파는 11월 보름에 벗들과 다시 겨울 뱃놀이를 감행한다. 똑같은 장소임에도 이곳이 그때 여긴가 싶으리만치 느낌이 달랐다. 맑은 바람이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조차 일지 않던 그 강물은 물살이 빨라져 소리를 냈다. 이슬이 하얗고 무성하던 잎은 모두 땅에 지고 없었다. 배가 적벽 아래로 들어서자 깎아지른 벼랑은 줄어든 물 때문에 갑자기 천..

[134] 쟁신칠인(諍臣七人)

[정민의 세설신어] [134] 쟁신칠인(諍臣七人)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2.01 23:21 증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아버지 말씀을 잘 따르면 효자라 할 수 있을까요?" 공자의 대답은 뜻밖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옛날에 천자는 바른말로 간쟁(諫諍)하는 신하가 일곱 명만 있으면 아무리 무도해도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는 다섯 명만 있어도 그 나라를 잃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는 그런 신하가 셋만 있어도 제 집안을 잃지 않지. 사(士)는 바른말로 일깨워 주는 벗만 있어도 아름다운 이름을 지켜갈 수가 있고, 아비는 바른말 해주는 자식이 있다면 몸이 불의한 일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불의한 일을 당하면 자식이 아비에게 바른말로 간하지 않을 수가 없고, 신하가 임금에게 바..

[133] 매독환주(買櫝還珠)

[정민의 세설신어] [133] 매독환주(買櫝還珠)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1.24 23:45 신지도(薪智島)에 귀양 갔던 명필 이광사(李匡師)가 '해동악부(海東樂府)'란 책을 짓고 직접 글씨를 썼다. 정약용이 그 책을 빌려 보았다. 이광사 자신이 득의작으로 여겼으리만치 글씨가 훌륭했다. 다산은 내용만 한 벌 베껴 쓰고는 원본은 돌려주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준 셈이로군요." 다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구슬이 상자만 못해도 나는 구슬을 사는 사람일세." 글씨가 값져도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해동악부 발문'에 나온다. 홍담(洪曇)이 자제들에게 말했다. "학문의 요체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게 행동하며, 말을 삼가고 행실을 바로 하는..

[132] 발호치미(跋胡疐尾)

[정민의 세설신어] [132] 발호치미(跋胡疐尾)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1.17 23:03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반대했다. 홍천(洪川)으로 귀양간 뒤 다시 여주(驪州)로 이배(移配)되어 10년 가까이 고생했다. 인조반정 당일 인조는 그를 영의정으로 다시 불렀다. 반정 직후라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여론이 흉흉했다. 이원익이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동대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완평 어른께서 오셨다!"며 기뻐했다. 동요하던 민심이 즉시 안정되었다. 훗날 임금이 국가의 원로로 높여 그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자,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이식(李植)이 하례하는 시를 올렸다. 첫 네 구절이 이랬다. "풍운의 큰 운세 되돌아오니,..

[131] 봉인유구(逢人有求)

[정민의 세설신어] [131] 봉인유구(逢人有求)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1.10 23:31 전국시대 이극(李克)은 재상으로 누가 적임인지를 묻는 위문후(魏文侯)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평소에는 친한 바를 보고, 부유할 때는 베푸는 것을 보며, 현달했을 때는 천거하는 바를 보고, 궁할 때는 하지 않는 바를 보고, 가난할 때는 취하지 않는 바를 보십시오.(居視其所親, 富視其所與, 達視其所擧, 窮視其所不爲, 貧視其所不取)" 평소 그가 가까이하는 벗을 보면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부유할 때 베풀 줄 모르는 자가 궁해지면 못하는 짓이 없다. 아무리 궁해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취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 법이다. 이 분별을 잃으면 마침내 버린 사람이 되어 손가락질을 ..

[31] 관물론(觀物論)

[정민의 세설신어] [31] 관물론(觀物論) [정정내용 있음]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1.26 22:24 | 수정 2009.12.18 10:26 공주에서 나는 밀초는 뛰어난 품질로 유명했다. 정결하고 투명해서 사람들이 보배로운 구슬처럼 아꼈다.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그 공주 밀초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불빛이 영 어두워 평소 알던 품질이 아니었다. 살펴보니 다른 것은 다 훌륭했는데, 심지가 거칠어서 불빛이 어둡고 흐렸던 거였다. 그는 《수여연필(睡餘演筆)》에서 이 일을 적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이 거친 사람은 비록 좋은 재료와 도구를 지녔다 해도 사물을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다." 밀초의 질 좋은 재료가 그 사람의 집안이나 배경이라면, 심지는 마음에 견준다. ..

지장(智將) 덕장(德將) 맹장(猛將)

[정민의 세설신어] 지장(智將) 덕장(德將) 맹장(猛將)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1.19 22:10 | 수정 2009.11.23 15:22 장수를 흔히 지장(智將)과 덕장(德將), 맹장(猛將)으로 나눈다. 지장은 불가기(不可欺)니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다. 덕장은 불인기(不忍欺)라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못 속인다. 맹장은 불감기(不敢欺)니 무서워서 감히 못 속인다. 지장은 워낙에 똑똑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처방해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조직을 이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상황을 장악한다. 대신 조직은 리더의 결정만 쳐다보고 있어 수동적이 된다. 능력으로 판단하므로 인간미가 부족하고 구성원 간의 결속력이 약하다. 때로 리더의 판단이 잘못되면 조직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덕장은 ..

[29] 까치집 상량문

[정민의 세설신어] [29] 까치집 상량문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1.13 00:14 | 수정 2009.11.16 09:18 성종(成宗)이 미행(微行)을 나갔다. 외진 마을 사립문 열린 집을 지나는데, 집 앞 나무에서 까악까악 하는 소리가 났다. 나무 아래 여자가 까치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위로 건네면, 남자가 까악까악 화답하며 그 가지를 받아 까치집을 만들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며 알은체를 하자 내외는 화들짝 놀라 집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임금이 들어가 연유를 물었다. 나이 50에도 과거 급제를 못해, 집 앞에 까치집이 있으면 급제할 수 있다기에 10여년 전에 나무를 심었는데 까치가 집을 짓지 않아 부부가 직접 까치집을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성종이 돌아와 인작(人鵲), 즉 '사람 ..

[28] 14세 급제와 18세 교수

[정민의 세설신어] [28] 14세 급제와 18세 교수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1.05 23:00 조선조 최연소 대과 급제자는 고종 때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다. 1866년 강화에서 치러진 별시 문과에서 만 14세로 급제했다. 이 신동을 놓고, 조정에서는 너무 일찍 급제했다 하여 4년간 더 학문을 익히게 한 뒤 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 벼슬을 제수했다. 23세 때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의 탐학을 탄핵했다가 귀양 갔다. 그는 불의와 당당히 맞서 어지러운 시대에 중심을 세우고 살다 간 구한말 최고의 문장가였다.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예조참판과 대제학(大提學)을 겸직했다. 조선 500년 동안 31살의 대제학은 이덕형이 처음이자..

[27] 정조의 활 솜씨

[정민의 세설신어] [27] 정조의 활 솜씨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09.10.30 02:44 | 수정 2009.11.25 10:45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어사기(御射記)'를 읽었다. 정조(正祖)가 1792년 10월과 11월에 쏜 활쏘기 기록을 적은 글이다. 정조는 보통 한 번에 10순(巡)을 쏘았는데, 1순은 화살 5대이다. 과녁 안을 맞히면 1점, 과녁 중앙의 정곡(正鵠)을 맞히면 2점으로 계산해서 정조는 보통 70점 이상 80점을 맞히었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은 한 대도 없었다. 어느 날은 20순을 쏘아 153점을 얻기도 했다. 대단한 활 솜씨다. 자신의 점수가 계속 향상되자 정조는 정곡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 가며 연습의 강도를 높였다. 접부채나 곤장에 종이를 붙여 정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