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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그의 혼을 다시 불러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7. 21:18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그의 혼을 다시 불러내다

 

5일 막을 올린 권진규미술관 개관기념전 ‘권진규와 여인’을 둘러보고 있는 관람객들.

 

춘천 월곡리 권진규미술관 개관
42년 전 51세에 스스로 목숨 끊어
“세속과 타협 않은 정결의 작가”
개관기념전 여인 두상 등 4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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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학교를 다닌 춘천시에 둥지를 튼 권진규미술관 외관.

그가 남긴 소리 없는 절규는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었다. 조각가 권진규(1922~73)가 쉰한 살 나이에 목을 매 자살한 서울 동선동 작업실 벽에는 유언처럼 이 한마디가 남아있었다. 고인이 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인생은 공(空), 파멸’이란 짤막한 글이 다였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꽤 짙지만 권진규는 유독 이 기이한 그늘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한 비운의 작가다.

 5일 오후 춘천시 동면 금옥길 228번지. 옥광산으로 이름난 이곳 월곡리에 권진규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는 신념을 고독하게 실천하던 기인(奇人) 권진규를 기리는 사람들이 40여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그의 유작을 보며 상념에 젖었다. 오라버니가 남긴 작업실과 작품을 오롯이 보존해온 여동생 권경숙(88)씨는 “진규 오빠는 내가 만난 가장 진지한 인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권진규미술관 관장을 맡은 권씨는 “‘얘들이 나의 자식이다’라던 오빠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며 “그를 키워준 학교가 있는 춘천에 자식들을 맡길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돼 가슴 속 빨간 하트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진규의 140여 점 작품과 수백 점 드로잉 뭉치를 수집한 김현식(대일광업주식회사 대표)씨는 “권진규의 작품만을 위한 새 미술관을 짓고 앞으로도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키워가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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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백윤기씨가 제작한 권진규 전신상.

 

 

개관기념전 ‘권진규와 여인’에는 그가 남긴 여인 두상과 자소상 등 40여 점이 나왔다. 연인이자 동료였던 오기노 도모의 영혼을 담은 ‘도모, 바람의 얼굴’, 모델을 서준 제자와 지인들인 지원을 비롯해 혜정·상경·선자의 초상은 한 여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이상적 원형질을 탐구한 극기의 수련기록처럼 보인다. 자신의 얼굴을 담은 자소상은 깎고 또 깎아 한 점 불꽃 같은 혼의 고갱이만을 남긴 듯, 수도승처럼 다가온다.

 권진규미술관 개관은 그동안 비극적 생애에 가려져 정작 작품 평가가 소홀했던 권진규에 대한 새 탐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유희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자신의 재능을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 제작에 바친 정결의 작가를 제대로 기억하게 됐다”고 축하했다.

 결벽증에 가까운 작업 태도로 사람들을 멀리 했던 그는 스스로 벽을 쌓고 고독 속에 침잠하며 한국 조각계를 걱정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寫實)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고 토로했던 권진규. 그는 우울한 시대정신을 온몸을 던져 끌어안고 갔지만 이제 그가 좋아했던 해바라기처럼 부활해 타오르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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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는 내년 5월 31일까지. 033-24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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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권진규=테라코타(점토로 성형해 구운 소상)와 건칠(乾漆) 작품으로 한국 현대조각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춘천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를 나온 뒤 59년에 귀국해 전통에 기초한 두상 조각과 흉상을 제작했다. 2009년 무사시노미술대학 개교 80주년 대표 작가로 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