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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죽어서도 평가받아… 그래서 남편은 캔버스가 두려웠나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15. 21:50

"화가는 죽어서도 평가받아… 그래서 남편은 캔버스가 두려웠나봐"

故 권옥연 화백 아내, 이병복 무대미술가가 기억하는 그
  • 김미리

    발행일 : 2015.12.15 / 문화 A2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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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데 옷 벗고 코피 질질 흘리면서 바들바들 떨었지. 결혼하고 나서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던 시절이야." 하얀 단발머리의 이병복(89·작은 사진)이 50여년 전 이맘때 남편 권옥연(1923~2011)의 누드모델이 됐을 때를 추억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들창코야. 못생겨 가지고." 4년 전 떠난 남편의 그림이 널려 있는 전시장을 돌며 아흔 언저리의 아내는 잔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퍽퍽한 경상도 사투리 섞인 타박 속엔 짙은 그리움이 배 있다. 권옥연과 이병복은 대한민국 예술원 부부 회원이었다. 권옥연은 청회색 아득한 색조에 한국의 서정미를 담아낸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이고, 이병복은 한국 연극계에 의상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1세대 무대미술가다. 두 사람은 6·25 때 피란 간 부산에서 결혼해 평생 해로(偕老)했다. 권옥연은 1950년대 파리 유학 시절 초현실주의 운동 선구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으로부터 '동양적 초현실주의'라는 평을 받았다.

    이병복은 남편이 가고 4년 만에 가나문화재단과 함께 회고전을 준비했다. 유족이 가진 그림과 소장가들이 가진 그림 50여점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걸렸다.

    "이젠 알겠어요. 왜 '권(權)'이 그토록 하얀 캔버스를 두려워했는지. 연극하는 사람이야 막(幕) 내려가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데,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죽고도 이렇게 작품이 남아 냉정한 평가를 받으니 불안했던 거지." 그는 남편을 '권'이라 불렀다. 남편은 그를 '병복'이라 불렀다. "'권'은 밖, '병복'은 안. 우리는 대등했어요. 평생 서로 칭찬 한마디 없이 빈정대는 사이였지만(웃음)."

    아내가 새 연극을 올리면 '권'은 말했다. "이게 연극이야?" 남편 그림을 보고 '병복'은 말했다. "그만 좀 칠해. 영화관 간판 그리려고?" 그러나 서로에게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였다. "그 정도면 딱 좋다 싶은데 계속 개칠(改漆)하는 거야. 그래서 그림을 몰래 숨기기도 했어. 가끔 사인 없는 재밌는 소품이 있는데 그게 내가 숨겨놓은 거야." 수십년 두 사람을 봐온 한 지인은 "말은 저래도 세상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했다.

    권옥연의 대표작은 청색, 회색, 녹색을 번갈아 발라 만든 청회색 바탕 위에 우울한 표정을 한 여인의 모습을 담은 인물화다. 그는 여인을 '심상의 총화'라 했다. 즐기던 모델이 아내였다. 어쩌면 그에게 여인의 원형은 '병복'이었을지 모른다.

    "남편으로는 '빵점 이하'였어. 그러나 나는 그를 남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권옥연'이라 생각했어. 그는 화가였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했고, 딴 거 신경 안 쓰게 만들어 주는 게 내 임무였고. 그땐 대갈통이 그렇게 돌아갔어." 이병복은 "권이 평생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돈을 벌어야 했다. 도둑질, 서방질 빼고 다 했다"고 했다.

    물심양면 자신을 지지해주던 '예술의 동지'에게 마지막 가는 길 권옥연은 말했다. "여보, 미안해." 그래도 사랑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버티지 않았던가. "사랑? 글쎄 나중에 천국 쫓아가서 물어봐야지. 나 사랑했는지(웃음)." 천생(天生)의 연분(緣分)이 함께 완성한 예술은 내년 1월 24일까지 만날 수 있다. (02)720-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