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망각은 하얗다 1991 42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비가 후박나무 잎에 잠시 머물렀다 눈물 한 방울 드넓은 대지를 적시지는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를 향하여 가는 한 생애에 발걸음을 남긴다 만리 밖에서 어느 사람이 활짝 웃을 때 마침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을 내가 보듯이 오늘 밤 내리는 성긴 빗소리는 또 누구의 울음이겠느냐 열매 하나 맺힐 때마다 하늘이 우르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할 때마다 별들은 맑은 종소리로 울린다 비가 후박나무 잎을 적실 때 나는 땅의 소리를 듣는다

불씨

불씨 로마 시내 폐허의 지하에서도, 카이로 근방 불모의 사막에서도 인간이 일으켜 세운 문명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런던 대영박물관의 미이라와 폼페이 유적지의 호화로운 저택에서도 인간의 발자취는 영원히 현재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간이여! 그러나 나는 볼 수 없었습니다 문명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영혼이 살았던 사랑의 흔적은 아무런 불씨도 남기지 않고 완벽한 폐허로 내게 묻혀 있었습니다

철새와 나무

철새와 나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새였고 또 한 사람은 나무였습니다. 새가 멀리서 날와 왔습니다. 내가 있는 곳은 너무 더웠어, 그렇지만 그곳에는 절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지, 은빛 날개를 나무가지에 걸치고 새가 말했습니다. 나무는 날개가 없으므로 발돋음을 하면서 그 곳을 찾아 보았습니다. 나무는 새의 집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무는 새에게 기댈 수 없어 날마다 똑같은 이파리를 흔들면서 새가 보았다는 좋은 세상을 향하여 키를 세웠습니다 나무와 새는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될 수 없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닐씨가 추워지자 새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이곳은 너무 춥고 너에겐 아무런 양식도 없단 말야, 나는 떠나겠어, 너는 날개가 없으므로 같이 갈 수도 없지 나무는 아무 말..

동면 冬眠

동면 冬眠 문이 잠긴다춥고어두운등뒤에서누군가안녕이라고말한다돌아서보면안으로잠긴완고한당신나는기억할수없다털실처럼포근한숨소리와어긋나는안락의자의움직임 살점같은진흙을털어내며다시는돌아갈수없는늪을빠져나온다작고아름다웠던긴방결코머리와다리를쉴수없었던시간열쇠가없었을때나는한마리의뱀이되어긴겨울을건너가고있다

내 마음의 흑판

내 마음의 흑판 하늘을 보면 왜 눈물이 나는 지 아니 왜 하늘은 저렇게 파란 빛으로 출렁이는 지 아니 혼자 길을 가다가 던진 외로움의 반쪽 혹시 누가 볼까 황급히 그려 보던 너의 얼굴 반쪽 살아가는 날들이 제 혼자 제 힘으로 자라나서 온통 마늘 밭으로 변해버린 것을 이제 너는 아니 아무도 탐내지 않는 아린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면 그저 말없이 별빛이나 내려주는 그런 하늘의 마음을 너는 아니

가을이 가고, 그도 가고

가을이 가고, 그도 가고 거리의 끝에서 조등이 걸어온다 하나, 둘, 셋 가슴을 환하게 비워두고 어둠한 밤길을 태우는 종이 냄새 살아 있는 사람만이 울 수 있다 울면서 후르륵 라면을 먹고 울면서 담배를 태울 수 있다 죽음은 죽은 이의 것 왁자지껄한 이 세상의 안부가 자욱한 향불에 가려 가물거린다 어색한 조문객들이 서투르게 서로의 그물진 얼굴을 숨긴 채 관심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밟는다 울지 않는 나뭇잎을, 더 세게 밟으면서 저 언덕 밑의 조등들. 점자로 읽어내고 있다 문장이 되지 않는 몇 줄의 바람을, 남루로 흔들리는 한 생애를,

바람의 불

바람의 불 화해하라 불로써 화해하라 나즈막한 바람이 지나간다 따스한 손길을 따라 더듬거리는 맹목의 팔벌림 해일이 되어 다가왔다가 첫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허깨비를 보듯이 마른 꽃 한 묶음으로 가슴에 서걱거리는 시간을 향하여 내지르는 증오의 눈빛 미세하게 부서져내리는 옷을 걸치고 이문동에서 석관동쪽으로 걸어가는 분신 焚身의 가로수들 마주치는 곳 마다 불꽃이 인다 희디흰 뼈 속 화인으로 박힌 하나님 순례의 행렬 뒤에 남겨지는 사막을 증명하신다

첫 출발

첫 출발 눈물은 씨앗이 없습니다 눈물은 핵분열을 하지 않는 박테리아 입니다 그 옛날 지구가 일산화탄소로 가득하였을 때 그 독기를 양식으로 삼았던 바닷속 생물입니다 눈물은 아름답지 않지만 눈물은 썩지 않습니다 눈물은 온통 짭니다 눈물은 오늘도 운동을 합니다 오늘도 나는 거리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는 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책은 꽃이 피고 지는 반복운동이고 그래서 역사책은 썩지 않습니다 온통 소금밭입니다

사람들

사람들 어른들은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이 비행기를 접지도 않고 모형자동차를 굴리지도 않는다 아! 시시해 어른들은 전쟁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면 이 세상은 신기루로 보이고 비로소 이 땅이 오아시스임을 느낀다 갈증을 느끼므로! 어른들은 자극을 원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사막의 한 가운데서 선인장을 부둥켜 안고 있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분법

이분법 선을 긋고 절벽을 만들어 너와 나를 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최루탄과 돌팔매질 사이를 증오아 화해의 감정을 표백한 채 묵묵히 잠수해 가는 군중은 지금 비겁하게 썰물로 빠지고 있지만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강물은 스스로 깊어지고 제 힘으로 깨끗해지듯이 그들은 말없는 몸짓으로 풍진 세상을 밀어내며 돌팔매와 최루탄을 한꺼번에 받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은빛 비늘 갑옷으로 감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