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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숙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자아의 탐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9. 25. 21:05

시간을 되돌리는 자아의 탐색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시인이란 제1 언어와의 사랑놀이를 평생토록 지속하는 사람이다

-유종호

 

 

들어가며

 

 

이혜숙 시인의 첫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왜 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탐색이 필요할 것이다. 시의 정의는 어찌 보면 각각의 시인들이 펼쳐놓은 시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겠다. 대략적으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자연의 완상玩賞을 넘어 궁극적으로 시인 자신에 내포되어 있는 자아의 확고한 정립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시류詩類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혼자 떼어보는 화투놀이나 혼자 두는 독장기와 비슷하다’ (유종호)는 시 쓰기는 종종 과장된 깨달음에 경도되기도 하면서 전인적 인격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모순을 범하기 일쑤이다. 오래전 어느 연구 결과를 보면 우리는 자신이 타인보다 도덕적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많은 시(시인)들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시에 들여놓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다시 이혜숙 시인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시인은 시 「즐거운 외도」에서 스물 두 살에 만난 시를 삼십육 년쯤 지나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가슴 속에 감추어 두었던 그를 향한 그리움이/ 내 심장을 뜨겁게 담금질 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라고 칭한 시는 일상적 행복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며, 일상 속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과도 맥이 통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라는 존재는 의식 속에 수많은 타자他者를 포용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행복은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들여만 하는 관습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얻어야만 하는 무지개와 같다. 시인은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러한 행복을 성취했다. 그럼에도 시(시 쓰기)를 행복에서 벗어난 즐거운 외도라고 정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보장받은 상태에서 우리는 더 많은 행복의 버킷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 멋진 집,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여행 등등에서 정신적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의 자각은 그러한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해 내팽개쳐 두었던 불편한 자아의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열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열망은 원망이나 증오의 해소가 아닌 따뜻한 사랑을 찾아가는 여로가 시의 실체이고 시 쓰기인 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이혜숙 시인에게 들어온 시마詩魔는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자아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일 따름이다.

 

죽은 듯한 고목을 보았을 때

시 쓰기를 멈춘 나를 보는 것 같았네

죽은 듯이 보이는 나무가

움을 틔우기 위해서는

뿌리가 살아 있어야 하네

꽁꽁 언 땅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정신은 살아 있어야 하네

나의 뿌리는 어디로 갔나

나의 심장은 왜 아직 잠자고 있나

노구에 꽃이 피운

저 고목처럼

나도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리라

 

- 「각오」 전문

 

 

추억을 더듬다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는 현재형의 진술보다 과거형 어법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 속으로 되돌아가서 그 당시의 자신을 비춰보는 시들이 산견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 나를 지우며 살아왔을까 / 최근 들어 나를 찾으려 애를 쓰고 있다’(「잃어버린 발자국」)라거나, ‘우리는 죽은 그림자를 따라 새의 눈물을 만져보았다’(「숲의 계보」), ‘추억에는 내용물이 없어도 추억이 됩니다’(「나뭇잎 일력」) 와 같은 토로가 그러하다.

 

가장 춥고 가장 더운 자리에서

나는 고독하게 살아 있다

바람과 구름, 비와 눈의 세월을 사는 중이다

낭떠러지 길로 떨어지는

번개 치는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생사의 물음에 답은 없는 것인가

 

뿌리 뽑힌 발바닥

죽은 듯이 살아 있는 나는

말라서 죽어 가는가, 죽어서 말라 가는가

산 듯이 죽어 있는 나는

자고 있는 것인가, 영생을 꿈꾸는 것인가

 

몇 해 전부터 누워 있는 나는, 끝내

죽기를 고사하며 땅이 되고 싶다가도

살기를 고사하며 하늘이 되고 싶기도 하다

 

 

-「고사목」 전문

 

이 시는 화자인 고사목을 통해 인간 일반의 생애를 조망하고 있다. 생노병사 生老病死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한계와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허망을 죽음枯死 과 한사코 그 길을 마다하는 고사固辭로 중의重義하는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죽은 듯이 살아있기도 하고 살아 있어도 죽음과 다름없는 세상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 존재로서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겹겹의 가면을 쓴 채로 본연의 자아를 잊어버리거나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즐거운 외도는 추억 속에서 때묻지 않은 자아를 찾아보는 여정旅程에 다름 아니다. 시인이 호명하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그들로부터 받은 가족애로부터 유발된 것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 가족애의 각성覺醒이 시인의 자아를 발견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집의 3부에 수록되어 있는 「어머니 생각」, 「김장김치」, 「가을 햇살」, 「그리운 손맛」, 「자화상」은 어머니를 소재로 삼은 시들이고 「대추와 아버지」, 「월급」 등은 아버지를 회상하는 시들이다.

 

부모들을 대상으로 삼은 시편들은 보편적으로 자애慈愛와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 은덕을 다 기리지 못하는 회한을 그리움으로 표상하는 경우가 많다. 이혜숙 시인의 시편들 또한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 시편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시인 또한 부모가 되고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존재로서 선대의 내리사랑을 자신이 어느만큼 수행하고 있는지 되물어 보는데 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다’(「월급」 부분)는 회상은 월급장이로서의 아버지의 신고를 체감하는 것이며, 힘들어하면서도 매년 김장김치를 보내오는 어머니의 노고를 ‘어머니 솜씨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 이제 어머니 입맛에 맞는 김치를 담가드려야겠’(「그리운 손맛」마지막 행)다고 예순이 다 되어 결심하는데서 그 의의를 더하는 것이다.

 

엄마의 응원과 사랑이 있어 지금에 내가 있는 것을

나는 왜 예순이 다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을까

음식을 흘려도 좋으니 스스로 숟가락질하시며

오래오래 나의 곁에 계시길 기도할게요

나의 거울 우리 엄마

 

- 「자화상」 마지막 연

 

누구나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효도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자식의 마음이다. 이제 부모는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거나 노년의 힘듦을 견디고 있다. 효도를 받으려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만분의 일이라도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자식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시 「자화상」은 시인 자신이 노년의 길에 접어들면서 앞 서 가는 어머니를 향해 나지막히 전하는 웃픈 이야기이다. ‘나의 거울 우리 엄마’ 이 말만큼 가슴 저린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받은대로 돌려주기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식 속으로 틈입하는 수많은 타자他者 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속박을 벗어나기 어렵다. ‘나’라는 존재에 따라 붙는 수많은 명칭들 – 아버지, 아들, 직장의 여러 직급들 등등- 은 항상 나에게 ‘~다움’을 요구한다. 그 무언의 명령들을 수행하려면 가면을 쓰고 본심을 숨기고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해야만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바, 자신이 타인들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착각이 갈등과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사회생활을 원만히 유지하려면 상하관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변동되는 갑을의 관계를 노심초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로는 상생相生을 외치지만 실제로 그상생을 실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고난의 깊이만큼 가시를 내 몸에 키우며

험한 세상 살아내다 보니

 

- 「가시 같은 말 삭제하기」 부분

 

함께 지내지 않으면 많은 불편이 따른 것을 알기에

명탐정 카톡 형사 너를 해고 시키지 못한다

 

- 「명탐정 카톡 형사」 마지막 연

 

그래서 자신의 안위安慰를 위해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받은 대로 돌려주기 tit for tat’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행위에 공정公正의 잣대로 대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시대와 젊은 세대들의 트랜드로 정착되는 시류로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강력히 저항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징어와 남의 말은 씹을수록 맛있어진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하루를 독한 술로 푸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면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안줏거리가 된다

오징어는 화려한 불빛에 눈이 멀어

낚시에 걸려 내장 버리고 껍질 벗겨져서

술잔이 오고 가는 자리에 안주가 되었다

뼈도 없고 줏대도 없이 평생을 씹히며 살았다

잘살아 보겠다고 도시로 왔다

오늘도 누군가 내 말을 하는지 등이 뜨끈거린다

오징어 먹물 자국처럼 남은 지울 수 없는 실수는

안주가 되어 오징어처럼 씹혔다

 

- 「뒷이야기」 전문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남을 험담할 만큼 공정한 사람인가? 이 질문은 시인 자신에게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시인 또한 뒷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알기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쏟아 놓은 가시 같은 말들 삭제 키를 누른다

삭제한 언어의 가시가 누군가의 가슴에 용서의 꽃으로 피기를 바라며

꽃기린 가시를 가슴으로 안아본다

 

- 「가시 같은 말 삭제하기」 마지막 연

 

이혜숙 시인은 인생의 도道를 깨달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 시를 써야한다는 명제를 체득하고 있다. 이런 고해야말로 보잘 것 없는 장삼이사들에게 건네는 소중힌 위로이기도 하다. 험난한 세상을 떠나 ‘아무리 살아봐도 잘 모르겠어요 / 내 인생길을 가르쳐줄 내비게이션은 없나요’(「내비게이션」 끝연)라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간구하기도 하고 시집의 끝머리에 보이는 사물과의 대화를 통해 위안을 삼으려고도 하는 마음을 피력하기도 한다.

 

이제 용기를 내어볼 생각입니다

내 손가락 끝에 꽃이 피는 날까지

당신을 괴롭혀 볼 생각입니다

 

- 「피아노」 끝 행.

 

아마도 시인은 피아노를 쳐볼 요량을 가졌지만 바쁜 일상 속에 연주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랜 시긴이 지나 장식품처럼 방치(?)되었던 피아노에 손길을 건네고 싶은, 첫사랑의 기쁨을 갖고도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통적 서정의 기계적 인식에서 벗어나 시인은 자신의 실체(자아)가 어떤 것인지를 바람의 속성을 통해 실감하게 된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다 건너 이국땅에도, 산으로 들로 다니며 바쁘게 삽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죠

사람들은 좋은 날 꽃이 핀다고 호들갑을 떨죠

나는 질투가 나서 살랑거리는 아가씨 치마를 뒤집어 놓았죠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즐거웠죠

 

나는 산행을 마치고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찾아갔었죠

나를 보더니 쾅 하고 문을 닫아버리고 창문도 닫아버렸죠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그 사람과 항상 같이 있고 싶었죠

나는 그 사람의 두꺼운 외투를 벗기고 싶었어요

그의 가슴이 얼마나 넓은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죠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면서 옷을 여며 입었죠

 

나는 그가 다른 여자와 나란히 걸어가는 걸 보았죠

질투가 폭발해서 그 여자 머리를 정신없이 헝클어 놓았죠

스타일 구겼다고 당황하는 꼴이라니 재미있었죠

그가 목련꽃은 보면서 나의 존재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

질투가 나서 마구 흔들어 놓으니 꽃들이 추락했죠

 

역마살이 끼었다는 건 고단한 일이죠

산에도 가야 하고 들에도 가야 하고 바다에도 가야 하니까요

구름도 나무도 꽃들도 내가 없으면 안 되는,

나는 바람이죠

 

- 「바람의 사랑법」 전문

 

시로서의 품격 여부를 떠나서 바람으로 표상되는 ‘나’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순짐구한 실체를 재미있게 풍자하고 있다. 태어남도 죽음의 거처를 알 수 없는, 보이지 않으나 끊임없이 꿈틀대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나’이지만 ‘구름도 나무도 꽃들도 내가 없으면 안 되는,/ 나는 바람’이라는 주체적 인식을 체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 바람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무형의 실체이다. 자신의 실체가 바람이라 해도 시인은 허무함에 빠지거나 비탄에 함몰되지 않는 미덕을 체득하고 있다.

 

시 「즐거운 외도」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이 충분히 행복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럼에도 겹겹이 쌓인 가면 속에 숨어있는 자아를 탐색하는 일이 시(시 쓰기)임을, 그럼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야만 하는 숙제를 스스로 떠안은 셈이다.

 

쾌락주의 철하자 에피큐로스는 명성과 권력은 행복의 조건에 전혀 부합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혜숙 시인이 인정한 의식주의 안락함 또한 절대적인 행복의 조건이라고 보지 않았다. 에피큐로스는 자연스럽고도 가장 필요한 행복의 조건은 우정과 자유, 그리고 불안을 야기하는 죽음, 질병, 빈곤에 대한 사색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불사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이혜숙 시인의 시 쓰기는 바람이라는 자유, 바람이라는 덧없는 실체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흙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라는 무지개, 쓰고 나면 버려질지라도 상처를 감싸안는 밴드도 시인이 찾아낸 진실된 자아임이 틀림이 없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비상용 밴드를 사다 서랍에 넣는다

마음의 상처를 싸매줄 수 있는 밴드의 삶을 살아보자고

찬바람 들어오는 창문을 닫는다

 

- 「밴드의 삶」 마지막 연

 

새봄이 되면 혹시 구근이 색깔을 잊을지라도 흙은 기억하리라

그리하여 갖가지 색으로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아,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마지막 연

 

나가며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는 자아의 탐색을 세계의 자아화, 즉 서정抒情에 의탁하는 유형을 취하고 있다. 시인이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 속에 자리잡은 ‘나’를 드러내는 기법은 시 읽기의 안정감과 독자로 하여금 시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예술일반이 추구하는 독창성과 철학성을 담보하는데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함께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어떤 주제, 어떤 소재를 이끌어내던 간에 ‘시는 은유이다’라는 명제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시인이 의도하는 주제를 진술이 아니라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이 자칫 해독의 어려움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꾸준히 실험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책무인 것이다.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의 57편의 시편 중에서 이혜숙 시인이 앞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는 시세계가 드러나는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음이 이 시집의 또다른 성과임을 말씀드린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레퀴엠」, 「날개의 이유」, 「숲의 계보」와 같은 시들은 오랫동안 음미해야 알 수 있는 차의 맛을 언어로 보여주는 시편들로서 다음 시집을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오독의 역사이기 때문에 필자의 감상이 정답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 글을 마치면서 인상 깊은 시 한 편을 함께 감상해보기로 한다. 다양한 느낌이야말로 좋은 시로 가는 첩경이라는 믿음으로!

 

말캉한 식감을 유리그릇이 삼켜버리고 나면

한 번도 내 입안에 들어와 꿈틀거린 적 없었던 숨결

나는 왜 지금도 사라진 키스의 온도를 믿고 있나

 

집을 버리고 달아나지 못한 배고픈 검은 고양이

죽음 직전의 유언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컹한 식감

낮은 담장 안엔 한 번도 꽃 피우지 않은

오래된 무화과 열매

 

칼끝으로 물컹한 심장을 열어 보았다

한 번도 꽃 피운 적 없던 두려움의 무게를 잠재우고

봄이 오면 날고 싶은 욕망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 「무화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