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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존재의1) 메멘토 모리mento mori를 탐색하는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3. 00:11

존재의1) 메멘토 모리mento mori를 탐색하는 시

                             나호열

 

 

 

오늘을 살아내면

내일이 덤으로 온다고

내가 나에게 주는 이 감사한 선물

 

2)-「덤」

 

 

 

오래전 「삶의 현장과 죽음의 리얼리티reaality」라는 글을 통하여 조광현 시인의 시를 조망한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 ‘시인이 내려놓은 시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풍경들은 장자의 물아쌍망관 物我雙忘觀 이나 불교의 무아론無我論, 더 나아가서 여러 종교의 내세관에 귀의하라는 메시지로 읽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시인이 의도하는 바는 공자가 설파한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생활화를 넌지시 권유하는, 삶 속에서 죽음을 명상하는 내성內省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 발표하는 시 다섯 편도 윗글의 맥락에서 감상할 때 그 의미가 선연해진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평생을 보내고 이제는 한 생의 종점을 향해가는 정류장인 요양병원에서 ‘나름, 정류장에 머문 이들을 배웅하기 위함이고 / 어쩜 부족한 나를 보살피기 위’(「머물러 있겠습니다」부분)한 삶을 사는 시인이 그려낸 풍경은 그전의 시풍과 관통하는 일관된 슬픔을 보여준다. 그가 마주하는 사람들은 완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며, 어쩌면 그들은 시인의 미래를 흘낏 비춰주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배웅과 보살핌의 역할이 끝나면 우리 또한 배웅과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는 까닭에3)‘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

 

굳이 철학적 질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존재(being)에 대해 피상적이나마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또는 ‘변하지 않는 나만의 속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변화와 부동不動에 관점에서 흔들리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 말은4)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언명을 상기시킨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 욕망을 일으키고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가 야기하는 권태가 종극에는 죽음을 일으키는 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행복하게도(?) 요양병원이라는 정류장에서 죽음을 연마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論語』 學而)’는 뜻처럼 공평하게 다가오는 존재의 소멸(죽음)을 포용하는 연습을 신앙이 아닌 체험의 숙고로 승화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존재는 변화와 부동성에 대해 양가적 兩價的 감정을 지니게 되는데 시인은 그런 표상으로 나무를 상기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깊어져가는 뿌리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굴피나무 한 그루에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기왕에 좋은 시절은 가고 또 오는 것

온천천 범람하여 아랫도리 다 잠겨도

아래로, 아래로 뿌리내리는 나무의 자세

 

때로 눈이 부신 햇살에 팔을 펼치고

하늘과 맞닿은 상념의 이파리 떨며

세상에서 숨 쉬는 나무의 이름 하나

나의 존재 이유를 나에게 묻는다

 

더러 눈물 같은 빗방울이 떨어져도

속으로 속으로 여물어 가며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법이다

 

생각하면 오늘 하루도

내 그늘에 쉬어가는 그 사람으로 하여

더없이 위로받는 나무의 이야기.

 

- 「나무의 이야기」후반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나무에서 한 생애를 돌이켜보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바로 세우며 묵묵히 기다리는 법을 배운 나무와 같은 삶을 반추하는 시인의 마음은 이윽고 자신의 보살핌(그늘)에 쉬어가는 환우들로부터 오히려 더 큰 위로를 받는데 까지 다다른다. 애별리고 愛別離苦가 거듭되는 요양병원이라는 경전을 매일 마주하는 불편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명명한다. 그가 마주하는 환우들과의 만남과 헤어짐뿐만 아니라 지우知友들과의 이별에서도 시인은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회한에 젖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쉼 없이 달려오는 강물을 마주하였네

이제는 돌아서서

아득히 멀어지는 그날을 바라보네.

 

-「강변에서」 마지막 연

 

바람보다 가벼운 배낭 하나 메고

총총히 먼 길 떠난 사람아

나도 이제 모든 걸 버려야 하리.

 

-「달빛 산책」 마지막 연

 

 

지난날을 돌아보고 친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앞길을 예견하는 –욕심을 버리는- 행위는 자칫 수동적 운명론으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슬픔의 정서를 내성의 힘으로 치환하는 일을 거듭함으로서 숙명의 유혹에서 벗어난다, 내가 나를 도우리라!

 

나는 가리라, 알츠하이머 치매의 숲으로

가서 보리라, 나의 미래를

내가 나를 도우리라.

 

-「알츠하이머의 숲」 앞 부분

 

다가올 미래가 알츠하이머의 숲을 헤매는 일이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의지는 범인凡人이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병원에서 마주한 사람들을 병자가 아니라 꿈속을 거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동화될 때 조광현의 시는 어떤 화려한 수사修辭보다 간절한 아름다움이 된다. 시「알츠하이머 숲」에 등장하는 남자는 수많은 군사를 이끌던 장군이었는데, ‘방금 다녀온 물리치료실에 또 가자고 보채며 / 나는 멀쩡하다 멀쩡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또 한 여자는 ‘오일장 곡물 거리 휘젓던 전설의 여인 /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5)술람미 여인처럼/ 참으로 당당했는데’ 지금은 오늘 아무 부끄러움 없이 사타구니 자꾸 긁‘는 사람이 되었다. 시인은 생각한다. 한 때 장군이었고, 여장부였던 사람들의 정확한 정체는 무엇일까? 그저 재수 없이 알츠하이머에 걸리거나 평생 회복될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함부로 병자라 그들을 부를 수 있을까? 그래서 시인은 변화와 부동의 사이에서 염세厭世에 빠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꿈을 꾸는 존재로 우리 모두를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어느새 우리나라 인구의 20%에 해당되는 천만 명이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치매환자는 점점 늘어가고 어렴풋나마 잘 죽음(well dying)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우연히 이 글을 쓰기 전에 『죽음 공부』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젊은 의사인데 절대 안 죽을 듯이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죽음을 똑바로 볼수록 삶이 밝아진다고 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잊었던 기억 몇 토막이 생각났다. 어느 병실에서 오십을 갓 넘긴 환자에게 의사가 말했다. ‘앞으로 1년 남았어요, 잘 준비 하세요!’ 그 광경을 목격하면서 속으로 매정한 의사를 미워했었다. 또 하나의 기억은 어머니가 임종할 때의 기억이다. 10년 넘게 알츠하이머로 힘들어 하셨는데 마지막 말씀이 ‘죽기 싫어’ 이었다. 우리는 천 년을 살듯이 오늘을 소비한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는 못된 사람일까? 나의 어머니는 편히 눈을 감으셨을까?

 

드디어 임종 가까운 어느 날

온기가 멀어지는 손을 잡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거짓말 하는 의사」 부분

 

 

조광현의 시는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정류장 –요양병원-의 생생한 현장을 통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의 시는 고도의 싱상력이나 깊은 비유의 맛을 버리는 대신 죽음을 상기하고 –메멘토 모리-, 운명을 사랑하는 Amor Fati의 메시지를 자신에게 각인시키는 고백이다. 시인과 의사 사이에서 시인은 아마도 계속 괴로워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 사람을 속이는 것은

한 세상을 속이는 일이다

 

 

-「거짓말 하는 의사」 부분

 

1)메멘토모리(Memento Mori)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래한 라틴어로서 Memento는 ‘기억하라’, Mori는 ‘죽음’이다.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2)필자의 시 「덤」의 앞부분이다. 조광현 시인의 신작 5편을 관통하는 오늘의 삶을 긍정하는 뜻과 일치한다.

 

3)‘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 는 필자의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1999)에서 인용했다. 「나무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시인은 아픔을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며, 눈물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에 슬픈 것이 아닐까.

 

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1788-1860)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욕망을 줄이고 예술을 가가이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으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욕망이 충족되면 곧 충족물에 권태를 느끼고 새로운 충족물을 찾게 되는 악순환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5)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

 

* 계간 미네르바 2025년 봄호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