跋文
삶의 슬픔을 꽃으로 피우는 시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詩는 깨달음의 경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기도문이다
1.
시인 詩人을 일러 광인狂人이라 하기도 하고 곡비哭婢라 부르기도 한다. 광인이라 함은 시대를 앞서가는 까닭에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예지자叡智者를 말하고 곡비라 함은 말뜻 그대로 ‘대신 울어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자신의 아픔을 여러 가지 이유로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울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시인을 가인歌人이라 덧붙인다면 어떨까?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시류詩類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시가 노래가 되는, 이른바 전통 서정시는 낡은 것, 또는 시대의 흐름에 걸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가인이라 불리는 시인은 매우 드물다.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은 여러 나라의 대중들이 부른 생활의 희노애락을 수집한 노래이다. 말하자면 문자로 표현하기 이전에 노래가 먼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노래는 절실한 삶의 표현으로서 교언영색巧言令色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와 같이 노래를 기반으로 하는 서정시는 그 핵심이 물활론物活論에 있다. ‘세계의 자아화’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 물활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우리 인간과 같이 감정을 지니고 있음으로 얼마든지 그 사물들과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으며 소통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시단詩壇은 극도의 추상화와 산문화가 횡행하여 시가 노래가 되는 서정시의 본령이 위축되는 추세에 놓여있다고 보여진다.
정은율 시인은 등단 이전부터 이미 시 낭송가로, 시 낭송가를 양성하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시 낭송은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동시에 우리 말이 지니고 있는 높낮이와 길고 짧음을 시에 녹여내야하는 고도의 숙련이 필요한 작업이다. 시인은 시낭송가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광인도, 곡비도 아닌 가인으로서의 시를 써야겠다는 꿈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은율 시인의 첫 시집『눌러 주세요』는 생활인으로서 마주쳤던 희노애락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가꾸어낸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시 낭송을 통해 마주쳤던 수많은 시들과는 결이 다른 자신만의 어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등단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시의 집을 꾸린다는 것은 신중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2.
워즈워드 W.Wordsworth 는 시를 ‘감정의 유로流露’ , 즉 충만한 감성의 자연스러운 발화라고 하였다. 어떤 대상과 마주쳤을 때 일어나는 감흥은 시인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던 기억을 환기했을 때 서정抒情으로 전이된다. 다시 말하자면 서정시는 기억(체험)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과 융합되어 탄생하는 감성의 꽃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정시의 개요를 살펴볼 때 정은율 시인의 시집『눌러주세요』의 많은 시들이 이와 같은 서정의 통로를 통해 이루어낸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감성을 촉발시키는 계절 감각과 시인이 일상생활을 영위한 지역과 낯선 곳에서의 색다른 체험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심詩心을 불러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눌러주세요』의 얼개는 시인의 생활 체험, 그 체험으로부터 빚어진 시간에 대한 관념과 활동 공간이라는 세 부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비로서 그 전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우선 정은율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삶의 양태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낸 시편을 감상해보기로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삶은 기쁨보다는 슬프고 아픈 역경逆境을 겪게 마련이다. ‘날마다 순간 순간이 / 신호등이 정지선이고 / 과속이고 추월이다’(「건널목에서」마지막 연)이라거나, ‘내 생 닮은 흐물거리는 몸통’(「삼숙이가 있는 풍경」부분) 이라거나, ‘오늘도 쉼 없이 팽팽한 줄을 당긴다’(「청호동靑湖洞에 가서」부분)와 같은 토로에서 언뜻 시인이 마주한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들에 드러난 애환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시인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길을 나서지 못했다
납작하게 주저앉은 가방은
지루한 시간 집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눈감고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비닐 벗고 내려온 가방 열고
무겁고 긴 훗날은 아래쪽에 넣고
급하고 가벼운 것들은 위쪽에
찌든 일상 한숨 한 토막까지 잘라 넣고
가벼운 일상들은 그냥 들고 가기로 한다
뒤통수를 때리는 날선 말과
꽃잎들의
아우성 뒤로하고
틈새 바람맞으며 한참을 망설이다
긴 그림자 끌고 집을 나선다
- 「그림자에 기대어」 전문
단지 생활인으로서 시인이 겪어야 할 ‘뒤통수를 때리는 날선 말’이 횡행하는 세상으로 어쩔 수 없이 ‘긴 그림자 끌고 집을 나’서야 하는 신고辛苦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와 공감을 주는 이유는 구체적인 이야기의 전말이 생략이 될 때 신고의 외연이 확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초록빛 체온」,「풀꽃처럼」,「강릉을 떠나며」와 같은 시편을 들 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픔의 시간이 훨씬 많고, 잠시 피었다 지는 꽃처럼 행복한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타인과의 끊임없는 경쟁과 타협,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규율에 얽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결코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래의 시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새벽노을 붉게 피어오를 때
나는 교차로에 서 있다
여행 가는 중이었고 왼쪽만 가능했다
초록 물고기였고 장미꽃은 금지되었다
자정이 되면 꾸벅꾸벅 졸기도 해서
가끔은 해금된 노래였고
늘 중앙선 옆길이고
적당히 자유롭긴 하지만 그래도 법이었다
내 삶의 소중한 교차로
그걸 지키며 지금은 집으로 가는 중이다
- 「비보호 좌회전」 전문
비보호 좌회전은 직진 신호등이 켜져 있을 때, 좌회전을 할 수 있는 교통규칙이다. 마주 오는 차를 피해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좌회전을 할 수 있으나 만일 직진하는 차와 충돌이 일어날 때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규칙처럼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망설임 – 양심에 어긋나기는 하나 법적인 책임을 면할 수 있는 – 좋게 말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종종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난제는 솔로몬의 지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정은율 시인의 망설임- 슬픔 –은 선의의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는 결벽에 가까운 심리적 압박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윤리적 문제 하나를 생각해보자. 효심이 지극한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린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특효약을 얻는 일인데 그 값이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지인에게 돈을 빌리고자 한다. 지인은 상환날짜를 지켜주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는데 사실 그 날짜에 상환할 능력이 없다. 당신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지인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아니면 약속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약을 사지 않겠는가? 시「비보호 좌회전」은 이렇게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삶의 교차로를 건너가는 자신의 안타까움을 변용하면서 삶의 아픔을 견뎌 나가야하는 행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견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인은 시「시간」에서 ‘삶은 여행이다’라는 놀라운 잠언을 던지고 있다. 여행旅行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여러 곳을 다닌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간을 여행으로 비유한 것은 신고의 ‘견딤’이 한 순간에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시간의 고비를 넘어간다는 것이 곧 유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시로 대관령을 넘는다. 고향이면서 타향인 강릉에서 때로는 상처받고 때로는 위로 받으며 대관령을 넘나드는 동안에 삶의 불편한 이쪽과 저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혜안을 얻게 된다.
날 새려면 아직 멀었다
따뜻한 불빛 찾아
유리창 밖을 서성이는 아침 버드나무
늘어진 팔을 잡지 못하고
절뚝이며 앞질러 간다
찌든 벽은 절은 곰팡이로 뒤덮이고
빗물에 젖은 벽돌 날마다 담과 마주친다
안개는 신다가 버린 구두 속에서 잠들고
비로 쏟아지는 활자들
허공에 젖은 소매에 부딪혀 흩어지고
날 선 사금파리로 깊은 동맥을 긋는다
꽃그늘에서 복숭아 꽃잎 떨어지고
이 악물며 온기 하나로 스스로를 품어 견디는
이른 새벽
아픈 이마에 손을 얹고
대관령을 넘는다
- 「강릉을 떠나며」 전문
시집『눌러주세요』에는 강릉의 여러 곳을 모티프로 삼은 시들이 많이 있다.「초당에서」,「청호동에서」,「겨울 경포호에서」,「연잎에 앉아」, 「영진에서 몇몇이」 등등의 시편은 단순한 기행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거울이며, 거울에 투영된 시인의 애환을 들어주는 친구와도 같다. 그런데 시「강릉을 떠나며」를 주목하는 이유는 누구나 그러하듯 본연의 자신을 떠나 가면을 쓰고 속말을 감추어야만 살 수 있는 고단한 삶의 현장으로 떠나는 비감悲感을 노래한 시로서 ‘넘음’(극복이나 초월)의 반복을 통해 시인이 터득한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공감의 영역이 넓다는데 있다.
이와 같이 시집『눌러주세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음 보다는 파스텔 톤의 암울함이 깔려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은율 시인은 희망은 절망에서 피는 꽃임을 알고 있다. 성급한 비약으로 절심함이 결여된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견디고 슬픔을 넘어가야 희망이 꽃 피운다는 사실을 시로 승화시키는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3.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온 시인은 다시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바다도 없고 탑처럼 우러러 볼 수 있는 산도 없는 그저 벽만 가득한 세상에 도착했다.
입에 자물통을 채웠다
날개를 달지 못한 그는
도시서 살기에 연약한 입 때문에
입술을 뒤통수에 달고
자물통으로 들어 갔다
-「자물통으로 들어간 사람」부분
나는 나에게 벽 하나 사이에 두고
문자만 오갔다
빗물도 받아내지 못하는 우산도 못 된다
- 「공중도시」 1연
실종된 장병들 시신 한 구씩 들어올 때마다
가족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가슴 치며 통곡해도 모자랄 상황인데
...중략...
그 후 남겨진 가족들은
자식 잃은 슬픔 뒤로 하고
억측과 비아냥 때문에 더 아팠던 사람들
- 「유족의 기쁨」 부분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함부로 말해서는 해害를 입고, 그러다보니 스스로에게 갇혀 자신에게 벽을 세워야 하며 시신이라도 찾으면 박수를 치는 유족이 있는가 하면 그런 유가족을 편협한 정치적 견해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숨어 살다가 말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 – 시「노숙자 유씨」, 「고시원 정씨」참조 –과 괴롭게 헤어지기도 한다.
바람 불어와 웅크렸던 쓰레기들
흩어지고 깊이 박혀 잠들었던 비닐봉지
여기저기 구르다
너덜대는 날개깃 전선에 걸렸다
여름날 뜨거운 태양도 걱정 없고
쏟아지는 빗소리도 무섭지 않고
얼어붙은 달빛에도 전혀 끄떡없는
그러나 아무도 내려주지 않는다
목마름으로 끝없이 추락하며
밭 자락에 누운 검은 비닐
한때 그의 일상에서
뭐든 척척 담아내던 요술 주머니 아니던가
지금은 검은 밭에서 풀 위를 덮고
흙들 그 속 가득 채운 채 말이 없다
- 「비닐봉지」 전문
그리하여 우리는 그 누구의, 그 무엇의 사용가치가 되었다가 끝내 버려지는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비닐봉지는 충분한 사용가치가 있다. 그러나 필요한 물건을 담고 사용한 뒤에 비닐봉지는 그 가치를 다하고 가차 없이 버려진다. 인륜이 무너지면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자신의 발이 되었던 차가 유행에 뒤처지는 구물이 되면 폐차장으로 끌려간다. 칸트Kant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제로섬 Zero Sum- 승자독식-에 어느새 함몰되어 버렸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버려지고 잊혀지며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정은율 시인의 슬픔과 생의 아픔은 이렇게 타자화他者化된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는데서 출발하는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시인이 꿈꾸는 세상은 원래 그러한 것, 즉 자연自然에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마주한 자연은 단순한 완상琓賞의 대상이 아니다. ‘언제나 낮게 피어/ 달콤한 향으로 / 사람들 꿇어앉히는 꽃’(「제비꽃」 끝연)을 통해 겸손과 사랑을 배우며, ‘불을 켜지 않은 날들의 빛 /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고 / 늙은 매화나무 물먹은 팔뚝에서/ 툭툭 튀밥 터지는 소리 들린다’(「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끝 연)고 끝끝내 생명의 강인함을 늙은 매화나무로부터 듣기도 한다.
좋은 서정시 백미는 해박한 지식이나 절절한 체험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의 말을 순연히 받아 적는데서 우러나온다. 이 글에서 언급하지 못한 시「달팽이 아재비」나 「눈색이꽃」 등이 바로 이에 해당되는 좋은 시임을 밝혀둔다. 현란한 수식이 없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전범을 보여주는 몇 편의 시로도 시집『눌러주세요』는 충분히 빛나고 있다.
4.
『눌러주세요』는 정은율 시인이 등단 이후 10년이 넘은 후에 발간되는 첫 시집이다. 짐작컨대 장년기를 지나면서 쓴 56편의 시는 시인의 반생을 응축한 장면들로서 앞으로 펼쳐질 나머지 반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예고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마주한 대상(경험 또는 소재)들은 슬픔의 눈망울을 달고 있는데 시인은 그 눈망울들을 생명의 고귀함을 갖춘 꽃으로 변신시키는 순전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20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한 차를 떠나보내며 ‘그러면서도 서운한 마음 뒤로 하고 / 새로운 삶을 위해 오늘 나는 / 힘차게 또 다른 액셀을 밟는다’(「너를 보내고」 마지막 연)는 토로는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물아일체의 경지로 다가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돋보이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너와 나 사이에 관용이 사라진 극한의 대립이 일상화된 세태에서 물아일체를 지향하는 시인의 자세는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눌러주세요」에 더 뚜렷이 함축되어 있다.
틀을 들여다보니 속이 텅 비었다
다식판이라면 꽉 채워야 하는데,
속을 비울 줄 알았던 그
박달나무에 새긴 섬세한 문양
꽃, 물고기, 나비, 복(福)
마른 바람 몸 더듬으면
등 타고 내려온 송화
꿀벌 무정란 껴안고 꾸들꾸들
꽃 틀에 안기고
잘게 부숴 조청과 뒹군
육포 나비 등에 올라타고
황태 보푸라기 동해 그리워
힘차게 솟구쳐 물고기 틀에 숨고
밭에 누웠던 콩 도리깨질에 놀라
복(福)자에 뛰어들어
강하게 밀어 넣는다
물컹거리는 영혼 속에 손 밀어 넣고
꿈틀대는 세포들 빈틈없이 채우며
아무도 낚지 않을 음각 속 문양
꼭꼭 눌러주세요
-「눌러주세요」 전문
긴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식판의 용도를 잘 알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더 맛있다는 우리네 미감美感이 다식판에 새겨진 문양에 더해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인은 그런 미감을 넘어서서 ‘누름’과 ‘눌림’의 실체에 눈길을 더하고 있다. 주객主客이 따로 없는 관계, 기꺼이 누르고 눌려지는 관계는 공허한 상생相生의 외침을 부끄럽게 한다. 고래로 문질빈빈文質彬彬을 시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왔는데, 이 시야말로 순박하면서도 우리 삶의 진경을 보여준 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기에 덧붙어 산문시로 쓰여진 「연잎에 앉아」와 같은 시가 앞으로 정은율 시인이 걸어가야 할 단초를 보여주는 시로서 독자 여러분의 음미를 권하고 싶다.
이 글의 서두에 붙인 ‘詩는 깨달음의 경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기도문이다’는 필자 또한 시를 쓰면서 마음에 새겨놓은 경구警句이다. 누구나 자신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면 정작 자신의 마음을 놓치고 독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멋드러진 풍취風趣에 현혹되고 말 것이다. 정은율 시인의 첫 시집 『눌러 주세요』상재를 축하드리며 앞으로 간절한 기도의 시심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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