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197

최연하 시집 『햇볕의 지문』: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삶의 여정旅情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삶의 여정旅情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모든 예술은 시간의 기록이며 기억의 표현이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70억의 모든 사람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그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존재이며, 그 표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예술가라 불려지고 자아실현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일찍이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은 모든 사람은 시심詩心을 지니고 있으며,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음 없이 누구나 펜과 종이만 있으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시심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애틋한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될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사람, 더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희로애락의 대화를 나누되, 슬..

김명림 시집『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 전원田園에서 피워 올린 생명의 노래

전원田園에서 피워 올린 생명의 노래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시인의 길 어느 시인이든 그들의 행로는 대체로 두 개의 방향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끊임없이 전위의식前衛意識으로 자기갱신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변함없이 자신의 하나의 주관을 곧게 이어가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기법技法의 신선함으로 예술의 창조성을 향해 나가는 길과 오롯이 올곧은 하나의 시선視線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려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길을 가든, 작품의 성패成敗나 우열優劣의 나눔은 의미가 없다. 『어머니의 실타래』(2013)에 이은 김명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는 아마도 후자의 길, 즉, 시인이 축..

진명희 시집 『고구마껍질에게 고함』:독락獨樂을 포획하는 찰나의 시어詩語

독락獨樂을 포획하는 찰나의 시어詩語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나의 시는 뒤돌아보는 기억 한 점 - 「기도 ·1」 1. 진명희 시인은 시마詩魔가 들린 사람이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 여 년 전에 등단한 이후 시집 『고구마껍질에게 고함』을 포함하여 여섯 권의 시집을 생산했다. 어찌 보면 이십 년의 시력 詩歷에 여섯 권의 시집을 낸 시인에게 시마가 들렸다고 하면 과한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희로애락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삶의 와류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 부조리가 횡행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오롯이 시로 육화肉化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마가 들린 사람으로 시인 진명희를 호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

이서은 시집 『피노키오 기상청』: 복면覆面의 마음으로 사람 찾기

跋文 복면覆面의 마음으로 사람 찾기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팬데믹의 풍경과 그늘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가지 측면의 난경難境에 처해 있다. 그 하나는 코비드 19(2019년)의 창궐, 즉 팬데믹pandemic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온 사회구조의 변화 – 일자리 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은 노동시장의 축소와 기계에 소외되는 인간, 각 세대 간의 인식의 격차 등–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난제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를 요약해 본다면, 21세기 들어서 사스(2002년), 메르스(2012년)에 이어 코비드 19와 같은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옴은 물론 이..

서정의 본질과 생명의 탐구

서정의 본질과 생명의 탐구 나호열 1. 이충이 시인이 영면에 든 지 일 년이 되어간다. 마침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등 10편의 시가 그의 컴퓨터에서 걸어 나와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이제 온화한 그의 눈빛을 마주할 수 없지만, 새싹처럼 푸른 유고遺稿는 다시 이충이 시인을 상기하게 만든다. 2. 이충이 시인은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하여 등단하였으며,『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고』(1986),『저녁 강에 누운 별』(1988)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1989), 앞의 세 권의 시집에서 고른 62편의 시를 실은 시선집 『달의 무게』(1996), 그 이후『깨끗한 손』(1996),『빛의 파종』(1999)을 남겼다. 이번의 미발표 시들은『빛의 파종』(1999) 이후의 오랜 침묵이 단순한 휴지..

윤은영 시집 『시옷처럼 랄랄라』: 밀레니엄의 환상과 디스토피아의 초상

밀레니엄의 환상과 디스토피아의 초상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 Arbeit macht Frei!- 윤은영 시인의 시집『시옷처럼 랄랄라』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한다. 가족의 해체와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빈곤, 더 나아가서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의지를 억압하는 전 지구적 문명의 폐해를 돌이켜보게 한다.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의 실존實存을 반추하게 만든다. 이상향 理想鄕에 대한 질문 누구나 안락한 삶을 꿈꾼다. 근심 걱정 없는 소요유逍遙遊를 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근대정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구호인 자유와 평등, 박애博愛는 인류가 마땅히 구현해야할 가치이지만 그런 이상은 우리가 지구에 ..

김석흥 시집 『천지연폭포 天地淵瀑布』:자연과의 대화와 생명의 판타지Fantasy

跋文 자연과의 대화와 생명의 판타지Fantasy 나호열 · 문화평론가 서정시의 출발 세계의 자아화는 시 특히 서정시抒情詩를 이야기할 때 당연히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이다. 세계를 주관적 관점에서 자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를 좀 더 설명하자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자연)은 – 이 글에서의 세계는 우주, 또는 자연과 동일한 의미로 쓰기로 한다 - ‘나’를 포섭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나’와 유리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 노자老子의 ‘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주장이나, 주역周易의 ‘극에 도달하면 되돌아간다(극즉반極則反)’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자연을 대상으로 의식하는 ‘나’와는 불화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의 인간은 자연의 비가시적..

이신남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 삶의 경계와 아타락시아ataraxia

跋文 삶의 경계와 아타락시아ataraxia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 Es ist gut!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 이신남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시집이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만으로 이 시집의 전모를 단정지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추모를 넘어서서, 그 추모의 마음이 일으키는 파장은 추모 너머에 숨어 있는 삶의 풍경들에 가 닿아서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삶의 배후를 상기하게 한다. 애써 피하고 싶은 죽음의 그늘과 개인과 가족이라는 사회적 관계의 의미를 되묻게 하면서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의 고마움을 온전하게 느껴야하는 당위성을 當爲性를 더듬게 하는 것이다..

박순 시집 『페이드 인』:‘나’와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다

‘나’와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페이드 인』은 신예新銳 박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명멸하는 세태 속에서 시의 참신성, 다시 말해서 주제의 새로움과 그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필요한 작법作法의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가 시인의 위의威儀를 공고히 만드는 것인데, 시집『페이드 인』은 신예가 갖추어야 할 당찬 어법 - 다수의 산문시와 「올코트 프레싱」,「달에게」와 같은 형식의 실험 -과 앞으로 전개될 시세계를 예감할 수 있는, 현상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일관된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음을 눈여겨 볼만 하다. 박순 시인의 시선은 전통적 서정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사회적 변화에 반응하는 저항의식의 표출에 놓여져 있지 않다. 그는 오직 자신..

권혁소 시집 『수업시대』 : 현실과 몽상에의 반역

현실과 몽상에의 반역 나호열 1. 그곳은 먼 곳이다. 고비사막보다도 멀고 은하계 저 너머보다 아득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첩첩한 산골짜기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거나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다. 강원도 태백에서 시인 권혁소는 그렇게 산다. 한 때는 산업혁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도구로, 에너지의 보물로 취급되던 석탄지대, 그러나 지금은 공해의 주범으로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도시 서민의 시린 등짝을 덮혀주는 소모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사양화되어가는 구시대 산업의 중심지에서 시인 권혁소는 풋풋한 석탄기의 언어들을 캐내어 시로 달구어내고 있는 것이다. A.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이란 인간의 생존을 향하여 압박해 들어오는 여러 조건들을 ..

강애란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 시간의 경계를 응시하는 잠시 멈춤의 기록

시간의 경계를 응시하는 잠시 멈춤의 기록 나호열(시인·문화평론가) 1. 강애란 시인의 첫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는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집이다. 어느 시를 읽으면 아스라이 멀어져 가버린 꿈이 돋아 오르고 또 다른 시를 읽으면 늙어감에 대한 넉넉한 사유가 저녁노을처럼 은은해지기도 한다. 이 시집에 응축되어 있는 ‘꿈’, ‘골든 에이지(Golden Age)’, ‘노인삼반(老人三反)’의 생각을 더듬으며 이 시집을 음미하는 즐거움에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하기도 한다. 등단 이후 이십여 년이 흐른 후에 첫 시집이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감이 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긴 시간을 녹여내고 다독이며 이루어낸 시편이 보여주는 풍경은 자못 삶의 먼 순례의 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아마도 강애란 ..

최양순 시집 『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 농경農耕의 가계家系와 소외의 극복

농경農耕의 가계家系와 소외의 극복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한 권의 시집 詩集은 단순히 여러 편의 시를 묶은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이 의도하는 주제와 그 주제를 이끌어내는 필법에 더 많은 눈길이 간다면, 시집은 각각의 시편詩篇이 구축한 - 그것이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 삶의 뼈가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 뼈는 시인의 본질적 삶의 태도이면서 삶을 지탱하는 시인 나름의 예지叡智이고 구도求道 의 길이기도 하다. 또한 그 뼈는 감출 수도 없고, 장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삶은 생로병사 生老病死와 희로애락 喜怒哀樂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굴레가 주는 고통과 안타까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그 극복과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시의 위의 威儀..

조하은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비극悲劇의 명랑성과 비극非劇의 알레고리Allegory

비극悲劇의 명랑성과 비극非劇의 알레고리Allegory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오래 전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悲劇을 통하여 삶의 애환을 정화淨化하였다고 한다. 연극(비극)을 통하여 관중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고 있는 사건을 동일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억눌린 감정을 배설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어째든 비극悲劇은 개연성을 지닌 허구의 세계이다. 그러나 비극悲劇은 허구의 세계임과 동시에 우리의 삶이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非劇(현실)임을 각성하게 한다. 모든 존재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점과 그 누구도 소멸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悲劇은 단순히 비극非劇이 아니라는, 즉 누구나 한번은 묻게 되는 존재의 의미에 정답을 내놓아야 하는 ..

최경선 시집 『그 섬을 떠나왔다』:거문도와 농섬 사이의 삶을 노래하다

거문도와 농섬 사이의 삶을 노래하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섬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다. 이항대립적二項對立的인 느낌이 동전의 양면처럼 혼재하고 있는 곳. 말하자면 고립무원孤立無援, 해방, 유폐, 자유, 도피, 이상향理想鄕 등등의 상징이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달리 인식되는 곳이 섬인 것이다. 어느 사람은 뭍이 지닌 복잡함에 지쳐 바다를 건너 은거隱居를 꿈꾸고, 오로지 바다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은 섬이 지닌 생활의 불편함과 가난에 지쳐 섬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렇게 은거의 낭만과 간난艱難의 세파世波가 교차하는 섬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익명의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어야 하는 강박과 서로 관계 맺으며 공존해야 하는 두레 그 사이에 떠 있는 섬. 그래서 최..

처용 아내와 섹슈얼리티 Sexuality

처용 아내와 섹슈얼리티 Sexuality 나호열(시인) - 모든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고 결코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 하라- 칸트 Kant 스스로 처용 아내임을 선언하면서 90년대 시단에 등장한 정숙 시인은 처용 處容을 모티브로 한 시와 시극, 나아가서 SNS를 통한 호작질 퍼포먼스를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보여 주었다. 이번의 여덟 번째 시집 『연인, 있어요』는 시인의 삼십 여 년의 시업을 집약하면서 시인이 집요하게 추구해온 시의 주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는 시집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부연하면 남성중심사회의 상징과 같은 처용과 역신 疫神, 역신과 동침한 처용의 아내,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불구 不具로 남아 있는 성性의 통념을 가로지르면서 해방 이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