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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결 시집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 공극孔隙의 슬픔과 스며듦의 미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6. 16. 23:57

공극孔隙의 슬픔과 스며듦의 미학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

속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자신이 없다

 

김결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는 기의記意를 해체하는 독특한 발화發話를 통해 의식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기억을 더듬고 스스로를 위무하는 길을 탐색하고 있다. 마치 부손蕪村의 하이쿠 「거면居眠」, “꾸벅 졸면서/ 나에게로 숨을까/ 겨울나기여”처럼 결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생의 고독함을 이겨 내기 위해 또 다른 타자인 자신의 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독백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는 존재 간의 공극―결코 결합될 수 없는 간극―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얼마가 적당할까

사랑하다가 한날한시에 같이 묻혀도 간극은 있다

― 「공극」 부분

 

시인의 이러한 독특한 시의 발화는―특히 「또는, 눈사람의 기분」과 같은 유형의 시에서 보여지는―타자화他者化된 자신에게 건네는 일종의 주문呪文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따라서 어떠한 타자와의 소통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자유연상의 자동기술법을 차용하면서 언어를 통한 소통의 무망함을 즉물적 감성으로 대체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의 다수의 시들은 쉽게 해독할 수 없는 불편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시집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김결 시인의 시법이 이른바 상대적 이미지의 시, 즉 객관적 상관물을 활용한 서정시로부터 출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리,

꽃 핀다

둥글게 핀다

죽기 위해 소리

내고

소리 내어 죽는다

떨어지며 꽃,

피어난다

 

느티나무 숲 속으로 한 여자가 들어갔다

 

잠들지 못하던

여름 여름 여름

여름의,

간절한 춤사위

나는 당신이

아프다

― 「매미의 계절」 전문

매미는 오랜 시간을 땅속에 머물다가 번식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나무에 오른다. 매미의 울음은 짝을 찾기 위해 울림통이 없이 온몸을 비벼 대야만 하는 수고로운 수컷의 구애다. 이 시는 ‘소리’(울음)를 ‘피는 꽃’으로 치환하면서 반복적으로 ‘여름’을 배열하며 적절한 리듬감을 살리는 감각이 뛰어난 작품이다.

모든 생生의 욕망은 죽음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이와 같은 계열의 작품을 열거해 보면 열매 수확을 위해 버려지는 꽃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인권 유린에 비유하면서 “그가 말했어요 내 안에 붙박이처럼 눈물이 박혀 있다”고 소외의 슬픔을 토로하는 「적화 1」, 재봉에 필요한 ‘북집’과 하염없는 노동에 일생을 바친 삶을 대비시킨 「북집」, 양육을 위해 온갖 자신의 즐거움을 버린 채 속이 텅 비어버린 부모를 그린 「목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들은 김결 시인의 시력詩歷이 전통적 서정시를 기반으로 하는 탄탄한 시력視力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의 얼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이러니로부터 빚어지는 슬픔이며, 이 슬픔은 존재 간의 공극으로 말미암아 공유할 수도, 나눌 수도 없다는 인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인식은 또한 존재 간의 인식의 어긋남 또는 충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남자가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날에는

비가 내린다

그 여자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부침개를 떠올린다

― 「클래식과 부침개」 부분

 

너는 바람을 안고 걸었고

나는 사람을 안고 걸었다

― 「공극」 부분

비를 둘러싼 상이한 취향, 바람과 사람으로 상징되는 욕망의 다른 층위는 불화不和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각기 다른 체험과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또한 한 개인의 체험과 기억도 중첩된 인식의 결을 지닌다. 김결 시인의 체험과 기억은 농촌이라는 장소의 아날로그―“계동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장유면 대청리 146번지 밤하늘을 바라본다”(「계동, 달의 기억」)―를 견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견고했던 가부장적 사회체계의 기억과 맞물려 있다. 아마도 계동은 시인의 고향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지금은 수몰되어 ‘장유면 대청리 146번지’가 되었지만―장소는 사라지지 않고 변형된 것일 뿐이다. 무뚝뚝하면서도 다감한 양면성을 가진 아버지는 여전히 “가을은 사과가 주렁주렁하고 내 눈가에는 이십 년 전 화목이가 어른어른하고 얼음골은 사과 향 같은 아버지 내음이 진동하”(「가을은 사과가 주렁주렁」)는 존재로 살아 있다.

계동이라는 어제와 장유면 대청리 146번지라는 오늘이 겹치는 기억과 딸을 낳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진이의 발 도장을 둥글게 찍는 기쁨을 감추지 않는” 이중적인 마음을 시인은 아래와 같이 예리하게 짚어 내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어진이가 태어나는 줄도 몰랐다 그날 금줄에는 숯과 솔가지가 달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질어라 어질어라 어진이라 불렀다 …(중략)…// 첫울음을 안아 주지 못한 그는 호인댁 집 앞에는 금줄에 고추까지 달렸더라며 되려 성난 목소리로 마당을 쩌렁쩌렁 채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중략)… 그는 자식이 태어나는 줄도 모르고 동네 개울에 빠진 처녀를 건져내고 있었다 …(중략)…// 늦은 그날, 아버지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진이의 발 도장을 둥글게 찍고 또 찍었다

― 「어진이」 부분

하루를 살아 낸다는 것이 꼭 한 가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교육을 통해서 유해한 환경을 이겨 내기 위해 필요한 도덕과 윤리와 같은 사회규범을 배운다. 어쩌면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 전에 타자화된 자신을 믿으며 한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뜻밖의 난처한 상황에 자주 부딪치고 난제의 행복한 해결을 위해 몸서리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슬픔과 기쁨은 모순개념이 아니다. 슬픔과 기쁨 사이에는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수많은 확정되지 않은 혼융의 관념이 존재한다. 김결 시인은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단정할 수 없는 이 무미건조한 삶의 실체―“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거울 숲에 들면」)―를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술래”(「어른 술래」)이고, “울지도 못하고 서 있는 나”(「슬도」)이며, “저토록 무모하게 외쳐 본 적이”(「능소화」) 없는 소심한 존재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김결 시인 자신으로 표상된 화자話者는 애초부터 세상은 공극인 까닭에 완벽한 이데아는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했다. 따라서 시인은 세상에 대해, 자신에 대해 어떤 열패감도, 허무함도 지니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열패감도, 허무함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표명하지 않을 뿐이다.

길을 잃었다

천장을 뚫고 흘러나왔다

열선은 싸늘해지고

통과하지 못한 예감은 멍이 들었다

바람의 나부낌도 무게로 다가와

눈물의 흔적을 씻어 내려야 하는

폭포가 생겼다

흥건한 바닥에 물고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단 잠그기로 하자

 

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젖은 가슴을 닦는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관통하지 못하고 얼어 버린

검은 공터가 넓어져 간다

오로지 너를 통해서만 읽혔던 세상일들이

깊이와 길이를 잴 수 없는

흐르지 않는 물의 길

조용히 다문 결빙은 습관으로 변질되었다

 

동파된 가슴을 동여맨다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잃어버렸던 표정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로 하자

 

너의 혈관 안에

나의 맥박이 숨 쉴 수 있도록

얼음장 물꼬를 튼다

 

그의 공구 통에서 겨울이 부서진다

― 「결빙의 습관」 전문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낮은 곳으로 섞이고 정화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도관은 견고해 보이는 사회제도의 허점처럼 예고 없이 터지고 얼어붙는다. 그래서 ‘너’라고 불리는 온갖 삶의 규칙들은 때로는 어긋나고 불안을 야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빙, 개인과 집단 사이의 불화를 단지 시인은 결빙의 습관이라고 부르며 단지 얼음장 물꼬를 트는 것은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이라고 관망할 뿐이다. 물컹거리며 기웃대는 그림자―일상의 불안―는 “잘려 나간 마음에서 푸른 더듬이가 자라나”(「바디 드로잉」)는 것으로서, 다르게 말하면 달리 떨쳐낼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의 전망에 대해 시인은 어떤 결기도 내색하지 않는다. 슬픔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김결 시의 미학이다.

 

산책의 풍경들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의 적지 않은 시들은 시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들의 풍경을 소재로 삼고 있다. 장거리 여행과는 달리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은 없으나 익숙하고 친근한 풍경이 지니고 있는 장소는 무의식적으로 시간(변화)에 대한 성찰이 돋보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여름 언덕」, 「소등껄 수국」, 「분산」, 「해반천 블루스」, 「혼신지」, 「Welcome to 42길」 등등의 시는 노마드nomad의 삶이 아니라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풍경을 느리게 해찰하면서 찾아 낸 시간의 흔적들을 음미하는 산책散策의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시인이 살고 있는 김해는 옛 가야의 땅으로 고분古墳과 같은 유적과 설화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기에 자연스럽게 시인은 시간에 대한 사유를 깊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구지는 물결치며

어느새 높아져

뎅, 뎅,

한여름 밤이 피워 올리는 군중의 종소리 들으며

천년을 다시 꿈꾸어요

― 「여름 언덕」 부분

 

성벽을 더듬으면 주름진 손이 만져진다

당신에게로 가는 미로

천년이 가도 무너지지 않고

열려 있는

― 「분산 盆山」 부분

 

그냥 걷기로 해요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열고

밝아오는 아침 소리 듣기로 해요

― 「해반천 블루스」 부분

시인은 자신의 생활 반경에 자리 잡고 있는 시간의 흔적들을, 한여름 밤이 피워 올리는 군중의 종소리와 같은 청각으로, 성벽을 더듬으면 주름진 손이 만져지는 촉각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낮과 밤의 교차, 계절의 순환은 멈춤이 없으나 세워지고 낡아 가다가 허물어지는 건물들, 문득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망연자실하며 시간을 곱씹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제의 주인공이 오늘은 관객이 되고, 나를 보면서 어쩌면 너가 되고 싶기도 하는 변심과 변형 사이를 안개처럼 사라져 가는 시간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시인은 이런 문장을 남기기도 한다.

돌아누우면 왼쪽 어깨뼈가 뚝 소리를 내는 시간

잠들 수 없는 물고기가

지문이 닳도록 밤의 지문을 만드는 시간이다

― 「밤의 지문」 부분

그리하여 “쫓지 않아도 가는 시간이며/ 밀어내지 않아도 만나는 세월 속에/ 더디게 간다고 야단할 사람 없으니/ 천천히 그렇게 산책”(「해반천 블루스」)하자고 권유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천천히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새 눈은 있지만 입술이 없는 억새꽃이 되고 사라진 기억보다 돌아온 기억 쪽으로 가까워지는 모습이 되어 가고(「분실물 보관함」 참조), “밤사이의 안부를 물어오는 새, 아득히 멀어져도// 언제나 무궁 무궁할 꽃”(「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으로 산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에게 있어서 산책은 시간과 소멸의 의미를 캐묻는 순례에 다름이 아니다.

나는 어디로 떠났던 사람일까요?

 

지금까지 시집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에 내재된 특성을 모든 존재 간의 해소될 수 없는 틈(공극)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소외疎外와 우리의 삶이 산책을 통해서 시간에서 파생되는 허무와 동행할 수 있음을 밝혀 보았다. 또한 극기克己나 반성, 사회적 현상에 대한 반발과는 거리가 먼 김결 시인의 감성은 모든 존재가 이룩하는 스며듦에 맞춰져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회규범에 따른 형식적 소통의 무모함보다는 서로에게 스며드는 측은지심 또는 교감의 발화가 시인의 시법詩法이라고 볼 때 가식적 소통에 반발하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이 시집에 등장하는 키워드인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시집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의 많은 시들에 등장하는 ‘당신’ 또는 ‘너’는 과연 어떤 실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시 「또는, 눈사람의 기분」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텍스트예요 주기적으로

폭발하죠

사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요

 

당신은 여전히 모르는 사건으로 남았죠

제발 얼룩을 읽어 주세요

 

들끓던 용암을 가라앉히는 오늘

눈 내린 불면에 로그인을 하고

거울 속의 분화구를 외면합니다

숱한 넷플릭스의 드라마와 마주하죠

 

바닥에 웅크린 나의 주인공이

사월에 내린 눈처럼 녹고 있고

 

대답할 의무도 없이 드라마는 끝이 납니다

사월의 눈과 여전히 모르는 당신에게

잠시 머물던 내가 눈사람으로 녹아 가죠

 

질 때 더 붉은 당신을 오려 붙여

텍스트를 읽는 내 눈동자가 젖어듭니다

 

날이 저물어요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

 

계절의 터미널에서 갓 내린 커피를 마셔요

나를 저울질하며 주문을 걸죠

 

사월은 불타오르거나 녹아내리고

소리 없이 모란이 다녀가고

떠난 이와 남은 자가 일으켜 세운 터미널만 남았죠

 

이제 나는 누구인가요

김결 시인의 각각의 시에 등장하는 ‘당신’을 하나의 명확한 인물이나 사물로 특정하려고 할 때 우리는 연상과 유추와는 거리가 먼, 감상鑑賞의 불편함에 빠진다. ‘여전히 모르는 사건’으로 남거나, ‘질 때 더 붉거나, 낡거나’의 주어인 ‘당신’은 과연 누구일까? 아니 ‘누구일까?’보다는 ‘무엇일까?’ 되묻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탤릭체로 강조된 문장들―“제발 얼룩을 읽어 주세요” “바닥에 웅크린 나의 주인공이/ 사월에 내린 눈처럼 녹고 있고” “날이 저물어요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은 화자의 발언이고 다른 문장들은 화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개되는 상황으로 가정한다면 그 상황들은 연속성이 배제된 미끄러지는 기의들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김결 시인의 독특한 발화는 구획할 수 없는, 나눌 수도 없는 이 세계에 대한 의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시인이 지칭하는 ‘당신’은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대, 시인 또는 화자話者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이거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시인의 인지 여부를 떠나 자연스럽게 하이데거Heidegger의 존재론으로 생각을 이끌어 간다. 그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존재자이며, 존재자를 성립시키는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인간만이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데, 왜 인간들에게는 인식의 틈(공극)이 생기는 것이며. 그로부터 소통의 부재가 일어나는 것일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국지局地(장소)와 신분身分의 차별성으로 빚어지는 생명에 대한 경박함과 도구화를 목도할 때 김결 시인의 시는 내면으로 파고드는 유령과 같은 당신에게 바치는 비명悲鳴이거나 탄식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에서 명명하는 ‘당신’은 나를 옭아매는 시간, 자연, 감정을 주고받는 어떤 사람,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 속에 숨어 있는 관념들이 얽혀 있는 걷잡을 수 없는 애매함으로 읽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미덕은 어설픈 깨달음이나 분노의 표출을 억제하고 각 존재에게 주어진 슬픔을 서로에게 스며들게 하는 정서의 교감에 있다.

어차피 시는 엘리엇의 말대로 ‘오독의 역사’이다. 김결 시인이 펼쳐 놓은 사건과 사물 간의 충돌과 겹침을 통한 문장을 섣불리 해석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시인이 장치해 놓은 역설의 늪에 빠질 것임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시는 정서(느낌)의 전달이지 설명(이야기)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는 김결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제기한 물음을 어떻게 자신만의 어법으로 축조해 낼 것인가? 전통적 서정시를 기반으로 ‘존재’와 같은 철학적 관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구현해 낼 것인가? 자못 궁금해진다. 모든 예술은 독창성과 철학성을 지닐 때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건필하시길!

달아실 시선 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