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화風化와 삶의 정화淨化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다
불꽃과 눈송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
들어가며
인간은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단독으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까닭에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투영投影하고 그 투영을 통해서 주체적 존재임을 확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표현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자아의 심층을 은폐하는 모순적 성향을 띄게 된다. 시詩는 이와같이 표현이 의미하는 드러냄과 감춤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시에서의 표현은 일상적인 드러냄과는 다른 층위를 지닌다. 자신의 인상을 드러내는 의상이나, 장신구, 일반적인 언술과는 다른 어떤 정서의 간절함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공감共感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의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째든 시는 시간을 경유한 경험과 그 경험의 퇴적인 기억의 호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어나고 먹고 자는 등의 반성이 필요 없는 기억을 사상捨象하고 난 후의 특별한 사건이나 감각적 인상印象이 시인으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든다. 우리는 늘 ‘오늘’만을 살고 있을 뿐이므로 과거의 특별한 사건이나 감각이 일으켰던 인상은 ‘오늘’의 나를 상기하는 정체성正體性과 내일의 삶을 예감하게 하는 주체主體 - 희망, 또는 꿈- 로서 시의 튼튼한 질료가 된다.
유숙희 시인의 시집 『자유를 꿈꾸는 씨앗』도 위와 같은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있으며 어떤 면에서 시인의 전 생애를 조감할 수 있는 지표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시인의 삶을 –정서적 측면에서 - 예감할 수 있는 시작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 보여진다. 이와 같은 예상이 가능한 까닭은 시집『자유를 꿈꾸는 씨앗』이 유숙희 시인의 첫 시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글은 유숙희 시인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시 세계를 음미하면서 시를 통하여 드러난 오늘의 삶을 유추하는 시인의 사유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농경農耕의 풍경을 담다
전통적인 서정시抒情詩의 본령은 자연과의 친화 또는 자연에의 순응을 노래하는데 있다.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극즉반極卽反 - 극에 다다르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 의 순환을 그리는데 있다. 그러나 어느새 후기산업화 시대를 훌쩍 넘어버린 오늘날의 세태는 이와 같은 생태적 삶 – 자연법칙에 따르는 수동적 삶-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환경의 삶, 말하자면 자연을 극복하거나 왜곡시키는데 익숙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협곡에 다리를 놓거나 고산준령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거나 댐을 건설하는 일들은 인간의 삶을 일정 부분 풍요롭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연의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를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
도시화로 요약할 수 있는 오늘의 삶은 자연과의 단절과 더 나아가서 익명匿名의 괴로움을 당연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농경의 삶은 한 곳에 머무르는 정주定住와 이미 우리에게 사라져버린 두레의 협동 정신, 계절의 순환에 맞춰 씨 뿌리고, 열매 맺을 때까지 인내하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아직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농경의 풍습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오늘날의 삶이 놓치고 있는 아름다운 덕목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서정시로 되살아나는 것은 단순한 복고가 아닌 당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숙희 시인의 서정은 ‘자연과 나’의 호혜적 대응에서 비롯되는 건강한 생명력의 복원에 있다. ‘더부살이 같은 삶일지라도 / 뿌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 힘 쓰는’(「민들레 」) 보잘 것 없는 생명은 없다는 의식이 ‘ 소중한 인연들에게 내가 / 무관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화초 앞에서」) 자성의 목소리로 울려나오는 것이다.「별 헤던 밤」,「밤의 파수꾼」,「모교 축제」 등의 시들은 우리에게 잊혀진 농촌의 풍경을 통해 쫓기듯 하루를 사는 오늘을 되비추는 아련함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런 예를 보여주는 시 한 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머 언 읍내 길
소달구지에 갖가지 곡식을 싣고
신작로 길에 나서면
하루종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투명하게 비치는
냇물 속의 다슬기도 잡고
햇살이 눈부시게
물결 위에 일렁이고
반질반질한 뽕잎 사이로
오디가 익어갔다
읍내 간 소달구지는
해가 저물어서야
동네 어귀에 들어서고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장 보따리가 풀어지고
선홍빛 기대와 실망
지친 소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 먹는 행복한 저녁 시간
풍경이 달빛에 물들고 있었다
-「장날, 머 언」전문
읍내, 소달구지, 신작로, 장날은 익숙하면서도 우리 생활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정겨운 낱말들이다. 그 낱말들 속에 오롯이 숨어 있는 ‘머 언’은 조급해하지 않는 기다림을 품고 있다. 일 년 열두 달 갖가지 물품을 사고 파는 마트 대신 오일을 기다려야 서는 읍내 장터에 팔 것을 소달구지에 싣고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新作路로 나서는 어른들과, 혹시 맛있는 누깔사탕을 먹을 수 있을까 해질녘까지 기다리는 아이들은 이제는 없다. ‘장 보따리가 풀어지고 / 선홍빛 기대와 실망’이 지친 소가 여물을 먹는 행복함으로 바뀌는 풍경도 사라졌다.
초를 다투는 변화 속에서 ‘먼’도 아니고 ‘머언’도 아닌 ‘ 머 언’이 주는 느림의 미학을 감지하는 시인은 ‘마루에 걸터앉아 달을 보고 / 별을 헤던 시절’(「별 헤는 밤」1연)이 ‘그 세월, 그 시간은 / 가장 순수하게 머릿속에 남아 / 나를 정화 시킨다’(「별 헤는 밤」끝 연)라고 고백한다.
이와 같은 과거를 회상하는 언명은 느림과 묵언의 소통이 사라진 시대를 건너가는 또 하나의 처방이라고 보여진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추억은 날이 갈수록 젊어진다
- 「친구」
이러한 회고는 퇴행적 감성이 아니라 강고한 오늘의 삶에 대한 응전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오늘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가?
태양이 사라져 간 겨울바람 속에
세상의 밤은 춥고 어두운 섬이다
바다에 갇혀있는 섬도
세상에 갇혀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밤은 까만 섬이다
섬에서 섬으로 넘나드는 바람같이
내 마음속의 어두운 섬들도 파도처럼
밀려왔다 부서져 간다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주어도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커스단의 코끼리처럼
익숙해진 것에 구속당한 것들이여
- 「족쇄에 채워진 삶」전문
시집『자유를 꿈꾸는 씨앗』의 시편 중에서 이 시만큼 강열한 삶의 부정성을 드러낸 시는 없다고 본다. 유숙희 시인은 어떤 장면에서도 감상感傷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는 균형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인에게 다가온 오브제를 통해 직관적 아포리즘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예는 뒷글에서 다뤄보기로 한다.-
이 시에서 모든 존재는 ‘섬’으로 상징되는 고독과 ‘밤’으로 제시되는 시계視界가 차단된 시간을 표류하는 존재들이다. ‘섬’과 ‘밤’의 족쇄는 마땅히 풀어야 할 것인데 그 구속을 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질범에 동화되어 그의 편을 드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 에 빠진 혼란된 의식 속에 아무렇지 않게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백으로 남껴진 시인이 남기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굳이 막스K.Marx가 주장한 소외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키면서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부자를 원망하고,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에 눈을 돌려 지루한 노동의 시간을 마다하지 않는 허망한 희망 때문에 기꺼이 족쇄를 감내하는 즐거운 고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회사후소 繪事後素의 시
예술 일반에 있어서 작품과 작가의 품성을 연계하여 평가해야 한다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아니다. 단지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를 어떻게 표현해느냐가 중요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성정性情이 작품의 성과를 반영한다는 주장이 하나의 시론詩論으로 여전히 살아있음도 부인하기 힘들다. 회사후소는 교언영색 巧言令色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논어論語에 등장한다. 교언영색선의인 巧言令色鮮矣仁 - 교묘하고 화려한 말솜씨와 얼굴빛과 표정을 좋게 꾸미는 자 중에 어진 사람은 드물다- 과 대응하는 회사후소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흰 바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일부에서는 그림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로 흰 칠을 쓴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시를 짓는 마음은 어린아이의 동심童心이어야 한다는 동심설童心說과 맥락을 같이한다. 시가 말(言)을 잡는(持)일이라 할 때 표현과 회사후소는 시를 짓는 일에 중요한 요소가 됨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는 가치판단, 즉 사물에 대한 호불호, 선악과 옳고 그름을 평가를 하지 않는다.「족쇄에 채워진 삶」에 보이는 바와 같이 어떤 현상에 대한 기술記述을 통하여 타자(독자)의 의식을 깨우는 일을 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시가 표현의 수단을 언어로 삼는 이상,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달리 일정 부분 시인 개인의 성정과 연관이 되어 있음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유숙희 시인의 시가 농경문화의 공동체 의식과 자연 친화적 순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음을 살펴 보았음을 상기해 본다. 덧없이, 어김없이 오가는 계절과 그 시간 속에 묵묵한 삶을 시인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못생긴 사람도
성품과 행동에서 아름답듯이
겉보다 내면이 고운 사람
둘 다 갖추면 빛이 난다
- 「오동나무」 1연
체우고 비워가는
소유와 무소유가 함께 하는 이 계절
- 「가을이 지나간다」 마지막 행
저 높고 넓은 아름다운 곳에
내 마음을 전해 주고 싶어
어두운 밤에도
별이 빛나는 밤에도
간절히 기도했네
- 「해바라기」 1연
오동나무는 번식력이 강해 어느 곳이든 잘 자란다. 성장 속도도 빨라 몇 년 사이에 훌쩍 키를 세운다. 그러나 그 속살은 생각보다 단단해서 가구를 만들거나 거문고를 만드는 훌륭한 쓰임새를 가졌다. 시인은 그런 오동나무를 빗대어 이상적인 삶의 원형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유숙희 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온 현상이나 사물을 통해 아포리즘의 결구結句를 간결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가을을 채움과 비움으로, 소유와 무소유로 요약하거나 해바라기의 일반적 특성을 그리면서도 낭만적 기다림을 놓치지 않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촛불도 인간의 삶도 / 한 세상 오롯이 / 자신을 불태우는 일’(「어둠 속의 촛불」)이라고 단언하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죄라면 / 못견디게 보고 싶은 마음은 / 지독한 형벌’(「죄와 벌」), ‘늙음과 죽음은 /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축복’(「공정한 인생의 겨울」)과 같은 경구警句는 농경의 순리를 체화한 회사후소의 결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산다는 이유
생노병사는 피할 수 없는 모든 생명의 숙명이다. 탐진치貪瞋痴의 괴로움을 피할 길이 없다. 순수한 마음도 세월의 역경을 견디기 힘들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삶을 꾸리려고 해도 몸이 말을 안듣는다. 불면증이 찾아오고, 느닷없이 갱년기의 우울이 찾아온다.
‘보이는 것만 보여주는 / 속이지 않는’ 거울 앞에서 ‘차라리 보지 않아야 할 / 불편한 진실 앞에서 / 자꾸만 초라해져’(「거울」)가는 나는 ‘마음이 푸석푸석해지고 / 자꾸만 가랑잎 소리가 들’(「갱년기」)리고, ‘몽롱한 의식은 / 밝은 빛에 깨어나고 / 몸은 좀비처럼 / 흐느적거리는’(「불면증」)노년의 문턱에 서 있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아무리 순정한 마음이라도 세파에 시달리고 세월에 부대끼다보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삶의 모습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시간들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려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생각
산다는 것은 그렇게
음지도 양지도 될 수 있다는 것
한때는 진실했던 사랑도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어
마음을 괴롭히고
사랑도 미움도 초연해지는
현실의 미래가 안갯속 같아라
- 「산다는 것은」전문
그럼에도 유숙희 시인의 시편 속에는 ‘동행’, 또는 ‘함께’의 의식이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쓴 맛이 단맛이 조화를 이루듯 / 행복도 불행도 함께 공존’(「함께 존재한다」)는 이율배반의 모순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본연적으로 시인이 구유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비관에 빠지지 않는 근기가 굳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곧게 자랄 수 없는 숙명
구부러지고 얽히고설키어 넝쿨로 퍼져나가
함께 숲이 되고자 하네
- 「칡꽃 향기」 마지막 연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시인은 어떤 난관도 희망으로 꽃 피울 수 있다는 넉넉한 마음을 잊지도, 잃지도 않고 있다.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자유를 꿈꾸는 씨앗」는 오랫동안 책상 서랍 안에서 잠들어 있던 씨앗을 발견한 이야기이다. 세월이 지나도 씨앗은, 희망이라는 씨앗은 썩지 않는다. 다시 흙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침묵의 힘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임을 시인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부드러운 흙의 품에 안겨
미풍과 함께 생명의 싹을 틔울
자유를 꿈꾸고 있었구나
너의 모습과 이름을 상상하며
어둠 안에서 밖으로 꺼내어 놓는다
- 「자유를 꿈꾸는 씨앗 」끝연
나가며
유숙희 시인의 등단 작품을 읽으면서 시작된 인연이 떠오른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공감 共感의 시’로 일별하고 아래와 같이 평을 붙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말뜻을 꾸미는데 있어 비유의 현란함도, 사유의 깊은 울림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시편은 구수한 숭늉 맛이 우러나온다. 머리를 궁글리며 쓴 시들이 풍기는 현학의 냄새는 가슴에서 모이고 숙성된 체험의 진한 맛을 이기지 못한다. 검이불루儉而不陋라 했던가? 화려한 수사는 없으나 담백한 소회所懷는 간접체험의 공감 共感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시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 같은 이웃이되 삶의 정서를 우리 말의 아름다움으로 빚어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동감同感을 구하지 않고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공감共感을 실현하는 존재로서 족하다.
유숙희 시인의 첫 시집 『자유를 꿈꾸는 씨앗』은 위와 같은 예감이 그대로 구현된 것 같아 기쁨이 더하다. 첫 시집을 발판 삼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풍성한 시심을 가꾸어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시인의 등단작인 「새해인사」를 읽으면서 발복 發福을 기원해본다.
마을에서 까치가 우는 날
산속에서는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이승에 뼈를 묻고 남겨진 묘
자손들의 방문을 반기는 듯
까악 까악 까악
산속의 정적을 깨운다
성묘를 마치고
펼쳐 놓은 돗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눈발이 내렸다
금새 눈은 쌓이고
산의 풍경들은 하얗게 덮여가는데
까악 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
어여 내려가 어여 내려가
하는 소리로 들려 왔다
- 「새해 인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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